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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형기의 ‘절벽’

기자명 김형중

인생 절벽서 나가는 용맹심 읊은 시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떨어지는 꽃잎 자연 섭리
인생 마지막 절벽은 죽음
죽음을 초월하는 사람이
부처 능가할 충천대장부

이형기(1933~2005) 시인은 1949년 진주 촉석루예술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여, 이듬해 ‘문예’에 ‘비 오는 날’과 ‘코스모스’ ‘강가에서’를 발표하여 서정주의 추천으로 17세, 최연소 중학생 시인으로 시단에 등단하였다.

국제신문 편집국장, 동국대 국문과 교수,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고 그의 시 ‘낙화’가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니 시인으로서 최고의 영화를 누린 셈이다. 환갑에 뇌졸중을 맞아 십여 년을 병상에서 생활했으니 시인이 노래했듯이 인생 낙화요, 절벽을 산 생애였다. ‘불꽃 속의 싸락눈’처럼 인생을 살다간 시인이다.

‘절벽’은 1998년 오랜 투병생활 중에 발표된 시집으로 그 속에 있는 대표시이다. 시인이 죽음 앞에선 병상에서 쓴 시이다. 죽음에 대한 시가 많다. 시인은 죽음의 절벽 앞에서도 의연하게 절벽을 돌파하고 있다.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죽음 앞에서 무슨 선택이 있겠는가. 떨어지는 꽃잎은 자연의 순리요 섭리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냉혹한 현실을 앞에서 무수히 좌절하고 굴복한다. 시인은 절벽의 정점에서 고립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온몸을 던져 길을 열어가는 투신(投身)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경덕전등록’과 ‘무문관’에 보면 “백 척이나 되는 높은 절벽에서 손을 놓고 앞으로 한 발 더 내딛어야 깨달음을 얻는다(百尺竿頭進一步)”는 깨우침으로 인도하는 화두공안이 있다. 구도자의 삶은 마지막 궁극이 없다. 꼭대기 정상에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히 집착과 고정 관념을 버리고 새롭게 앞으로 나가는 용맹심과 굳건한 결의가 있어야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될 수 있다. 큰 깨달음의 경지는 모든 것을 내던지는 자세라야만 이룰 수 있다. 통속 안에서 몸부림쳐봐야 소용이 없다. 통을 깨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와서 통을 굴리면서 살아야 자유인이다. 버리면 크게 얻는다. 묶이면 구속이다. 벗어나야 해탈이다.

우리의 인생길이 순탄하고 간단하지 않다. 산을 넘고 냇가를 건너면 계곡이 있고 절벽을 만난다. 진퇴양난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무섭고 냉혹한 절벽에 부딪힐 수 있다. 좌절과 포기는 게임 아웃이다. 끝까지 용기를 갖고 버티고 견뎌내는 사람에게 승자의 기회가 주어질 뿐이다.

이형기는 진정한 시인으로 시에 대한 경건함으로 구도자적 자세로 시를 사랑하고 탐구하였다. “아직도 시가 무언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찾노라고 몸부림 친 기록이 여태까지의 나의 작품이다.… 내게는 오늘 쓴 시 한 편뿐 이것도 내일이면 휴지통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웅산(大雄山)에 홀로 우뚝 선 한국시단의 고독한 대호(大虎)였다.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절대자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다. 그의 마지막 모습도 절벽에서 꽃잎 하나 하롱하롱 떨어져가고 싶은 것이다.

‘절벽’은 인생의 막다른 절벽에서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대장부의 용맹심을 읊은 시이다. 절벽은 죽음을 상징한다. 인생의 마지막 절벽은 죽음이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난다. 죽음을 초월하는 사람이 부처와 신을 능가하는 충천대장부이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324호 / 2015년 12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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