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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 전국비구니회 11대 회장 육문 스님

  • 새해특집
  • 입력 2015.12.28 13:24
  • 수정 2016.01.0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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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대중의 원력 모아 변화 훈풍 세간에 전할 것

 
담장도 없는 백흥암엔 수시로 등산객들이 들락거렸다. 누각 밑에 텐트 치고 야영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날도 아침부터 고기 끓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누각 아래 야영객들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분명했다.

물러섬 없는 ‘팔공산 호랑이’
대중 뜻 부처라 여기고 출마

25안거 성만한 수좌 덕화가
회장 선거서 믿음으로 돌아와 

94년 개혁서종회 의원 맡아
종회 비구니 10석 확보 성과

“비구니회 변화 바람은
대중 화합에서부터 시작”

“이거 갖고 갈라요, 안 갈라요.”

파르라니 젊은 비구니 스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야영객들은 들은 척 만 척이다. 물러설 스님이 아니다.

“중노릇 수십 년 하는데 나도 고기 먹고 싶어요. 왜 여기 와서 냄새 피워요.”

그제야 한 젊은이가 돌아보더니 “그러시겠네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일행들을 채근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렇게 스님에게 야단맞고 물러난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덕분에 스님에게는 ‘팔공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벌써 30여년도 더 지난 일이다.

“고기 먹고 싶어 그랬겠어요? 그네들 생각에 맞게 한 말이지. 자기들 생각에 ‘고기 냄새 나면 스님도 먹고 싶겠다’ 했겠지. 알아듣게 하려다보니 야단을 칠 때도 있는데 이게 소문이 그렇게 났어요.”

제11대 전국비구니회장 육문 스님은 스스럼없이 옛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팔공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었다는 기자의 말에 “‘사납다 소문났더니 와서 보니 요조숙녀’라는 말도 많다”고 받아 넘겨 한바탕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해야겠다’ 결심이 서면 물러섬 없기가 호랑이 같지만 대중의 뜻에 따라 고집을 꺾을 줄도 안다. 호통이 필요하다면 큰 소리 내기를 주저 않지만 때로는 유쾌한 농담을 던질 줄도 안다. 그것이 대중들이 육문 스님을 따르는 이유다. 11대 전국비구니회장 선거를 앞두고 전국비구니회의 개혁을 주창하던 열린비구니모임은 육문 스님 후보 추대에 사활을 걸었다.

육문 스님은 “세납 70이 되면 외부 소임을 안보겠다”고 일찌감치 상좌들에게 공언을 한 터였다. 공교롭게도 세납이 꼭 70이었다. 이미 바깥 소임도 모두 내려놓은 후였다. “상좌들과의 약속도 약속이니 회장 후보로 나설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수락 안 하시면 열린비구니모임을 해체하고 개혁이니 뭐니 다 접겠다”며 비구니 스님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될 상황이 된다면 그것은 부처님 뜻입니다. 대중의 뜻은 거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집을 꺾고 거뜬히 전국비구니회장에 당선됐다. 특히 선방 스님들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25안거를 성만한 수좌이자 10년간 전국비구니선원 선문회장 소임을 맡아 불합리한 관행들을 고쳐온 것이 스님을 향한 믿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출마를 결심하고도, 당선이 되고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당선 되고 나서 좀 웃으라 하는데, 할 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나요. 그런데 한 생각 바꾸니 달리 보였어요. 대중 뜻으로 시작했으니 대중을 믿고 가면 되겠지요. 우리 비구니 스님들 믿고 가면 되겠다 생각하니 그때부터 마음이 놓이더군요.”

서울 비구니회관서의 생활은 경상북도 군위 법주사 산중 생활과 비교하면 차이가 많다. 하지만 크게 다를 바도 없다. 새벽 1시면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은 변함이 없다. 바뀐 것이 있다면 새벽까지 비구니회칙을 살펴보는 일이다.

“무슨 일이든 맡으면 전문가가 돼야 해요. 그래야 일을 맡기죠.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던 말도 자꾸 들여다보고 공부하면 알게 돼요. 소임을 맡았다면 그런 노력을 해야 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 합니다.”

육문 스님은 11대 조계종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그에 앞서 94년 종단개혁 당시에는 개혁종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개혁종회에 들어가 처음 본 종헌종법은 다른 나라 말 같았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 종회서 무슨 안건이 다뤄지나 확인하고 밤새 종헌종법집과 씨름을 했다. 비구니 중앙종회의원 10석 배정은 이때 만들어졌다. 20석을 원했지만 절반에서 만족해야 했다. 덕분에 “종회에서 제일 많이 나서는 비구니는 육문 스님”이라고 소문도 났다. 그렇게 시작된 변화의 바람은 가늘고 느리지만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94년 종단개혁에 비구니 스님들이 적극 참여한 결과 종단 행정에 비구니 스님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지금까지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하려고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욕심을 낸다고 되는 일도 아니지요. 하지만 멈추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면 세월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전국비구니회 운영에도 변화가 예견된다. 오는 3월에 정기 총회를 열어서 회칙을 대폭 개정하려 한다. 개정된 회칙에 따라 운영위원회도 구성할 것이다. 운영위원회는 있지만 구성 회칙이 없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구성 회칙을 명확히 해 투명하고 체계적으로 비구니회를 운영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는 게 육문 스님의 생각이다. 이후에는 각 지역별로 순회하며 개정 내역에 대해 설명하고 비구니 스님들의 참여를 독려할 계획이다.

“무슨 일을 하든 계획 없이 일을 하면 안 됩니다. 두서없이 일을 하면 이전과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전국비구니회 운영의 첫 번째 공약인 ‘일하는 비구니회’에는 이런 의지가 담겨있다. 복지, 문화, 기획 등 각 분야별 위원회를 두어 전문가들을 영입할 예정이다. 활동비도 없이 부장과 국장만으로 구성돼 있어 절대 인력이 부족했던 각 부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다.

비구니 인재 양성도 미뤄둘 수 없는 사안이다. 비구니 스님들이 드러나지 않게 키워온 역량을 이제는 필요한 곳에 풀어낼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것도 전국비구니회의 몫이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조용히 사는 것이 미덕이었죠. 하지만 이미 사회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비구나 비구니 스님들의 활동 분야가 거의 같아졌어요. 종무행정에서도 자리가 주어진다면 과감하게 맡고, 맡은 일은 거뜬히 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전문성을 키워야 합니다. 전문성이 없으면 들어가도 소용이 없어요. 내 스스로 내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 잘하는 사람에게 일은 주어지기 마련이죠. 종회도 마찬가지에요. 종헌종법을 충분히 숙지하고 해당 사안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식을 충분히 키워서 준비된 인물을 종회에 보내야지 친분으로 소임을 맡겨서는  안됩니다.”

변화의 바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바람은 거센 폭풍이 아닌 따뜻한 훈풍일 듯 하다. 나그네가 옷섶을 부여잡고 여미는 대신 바람에 몸을 맡기고 마음을 열어주는 바람. 변화는 그렇게 이뤄져야한다고 육문 스님은 강조한다.

“지난해 전국비구니회에는 분명 바람이 불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잘못된 관행을 없애고 새로운 법을 세우기 위해 일어선 것이니까요. 비구니 스님들 스스로가 일어섰다는 점이 자랑스럽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각자 살림만 살 줄 안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각자 주머니 털어 함께 애를 썼습니다. 싸우는 모습 보이지 않고 마지막까지 화합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추대하지 못하고 결국 투표까지 하게 된 것은 조금 유감이지만 이제는 모두 화합해서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할 일이 많아요.”

육문 스님의 한 가지 고민은 오직 스스로에 대한 질문뿐이다. ‘지금 나는 그런 능력을 갖추었는가.’

다시 부처님 앞에 선다. 법당 문 열고 첫 발을 들이면 마음 속을 가득 채우는 발원은 오직 하나다. ‘나라가 편안하고 불교계가 편안하길 발원합니다.’ 발원을 굳게 하고 살면 이뤄지지 않을 일이 없다. 시끄러운 것은 오직 그런 세월일 뿐이다. 묵묵히 발원한 길을 가면 또 다른 세월이 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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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빠른 변화 필요 … 불퇴전 원력 있다면 4년 짧지 않다”

다섯 살 조카 죽음에 느낀 무상
열일곱 출가 인연으로 이어져

밤새 정진하는 노스님 보며
정진 의미 배우고 선방 수행

“나 떠나면 누가 할까” 싶어
돌 나르며 17년 백흥암 불사

오직 세세생생 불제자 발원
다시 태어나도 수행자 될 것

“비구니 스님들이 일하는 모습은 마치 개미가 역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 처에서 개인적으로 열심히 사는 스님들이 많습니다. 사찰을 이루고, 어린이 포교를 하고 복지활동을 합니다. 그런 분들을 격려하고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비구니회의 역할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속도다. 너무 느리면 ‘보수적이다 수구적이다’ 소리를 듣고, 빠르면 ‘급진적이다, 불안하다’는 평이 나오기 쉽다. 스님은 “지금은 조금 빨라야 할 때”라고 단언한다. 지금껏 ‘느리다’는 소리가 적지 않았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총무원은 그때 그때 종법을 개정하며 끊임없이 변화해 왔는데 비구니회는 그러지 못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비구니 스님들이 하면 잘 합니다. 소극적이라고들 하는데 사실입니다. 대신 신중하죠. 그래서 실수도 적기 마련입니다.”

11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한 육문 스님은 다시 11대 전국비구니회장이 됐다. 이런 소소한 우연까지도 인연이라 여긴다. 책임감을 다지는 방편이다. 군위서 서울 오가는 것도 “차 타고 다니는 것 좋아 한다”며 웃어넘긴다. 막중한 소임이 버겁겠다는 위로에도 “시골서 돌 지고 나르며 길 닦던 것에 비하면 일도 아니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렇게 일복 많은 스님의 방엔 첫새벽부터 불이 밝다.

이런 부지런함은 어려서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속가 부친은 선비였다. 모친도 별당에서 ‘동문선’에 ‘소학’까지 다 읽었다. 딸이 글을 읽을 때면 잘못된 부분을 짚어줄 정도로 소양이 높았다. 그런 모친 손에 이끌려 서당에 나갔다. 그 서당에 여자아이는 딱 하나였다. 서당 오가는 길에 사거리서 스님들과 마주쳤다. 어느 날 인사를 했더니 한 스님이 합장을 가르쳐 주셨다. 훗날 은사가 된 성태 스님이었다.

▲ 전국비구니회관에서 만난 육문 스님은 부드럽지만 때론 단호한 어조로 전국비구니회의 변화를 예고했다. 사진 김규보 기자

▲출가 인연이 궁금하다.
“열여섯 살 때였다. 다섯 살이었던 조카가 세상을 떠났다. 조카가 죽고 나니 세상이 텅 빈 것 같이 덧없고 무상했다. 아마도 어려서 한문을 배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절에 찾아가 출가하겠다고 했다. 내년이 모친 회갑이니 회갑을 지내고 오라하셨다. 사월 초파일이었던 모친의 회갑을 치르고 사월 초열흘에 출가했다. 모친은 엄하기도 하셨다. 어렸을 때 고양이가 노는 모습이 우스워 ‘까르르’ 소리 내 웃었더니 ‘계집애가 잔망스럽게 소리 내서 웃는다’고 꾸중을 하셨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큰 소리 내서 웃는 습관이 없다. 그런 모친께서도 육남매 중 막내딸이 출가하니 하루가 멀다고 절로 찾아 오셨다. 하지만 결심을 돌릴 수는 없었다.”

▲죽음에 대한 의문은 풀렸나.
“스님들께 자꾸 물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무상한 세상에서 무상하지 않게 살 수 있냐고. 그러면 참선하라 하셨다. 그때는 큰 방에서 은사 스님이랑 노스님이랑 같이 살았다. 자다가 일어나 보면 잠도 안 주무시고 앉아 계셨다. 무얼 하시는가 여쭈니 참선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셔서 그때 참선을 알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정진하는 거구나, 정진해서 성불하기가 저렇게 어렵구나를 배웠다. 그럴 때면 나도 일어나서 앉았다. 참선을 해야겠다 싶어 화운사강원 간지 1년도 안 돼서 선원으로 갔다. 동화사 양진암이었다. 3년을 살았는데 스님 여덟 분이 계셨다. 내가 막내였다.”

▲스님들 시봉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모르는 게 많았으니까. 어느 날 어른 스님이 작설자를 한 주머니 주셨다. 결제 내내 먹어야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몰랐다. 그냥 커다란 주전자에 다 넣고는 물을 가득 담아 펄펄 끓였다. 다 끓이고 보니 물이 많이 안 나온 것 같아 찻잎을 건져 손으로 꼭 짰다. 작은 병으로 하나가 나왔다. 꼭 간장 색이 났다. 다시 잎을 넣고 재탕을 해서 초탕과 섞어 입승스님에게 드리고 남은 잎은 아궁이에 넣어버렸다. 입승스님이 보더니 깜짝 놀라며 ‘이게 뭐냐’ 묻기에 ‘작설이요’하고 태연히 대답을 했다. 입승스님이 끓이고 남은 잎은 어쨌는지 재차 물으시기에 사실대로 답했다. 끓이고 남은 찻잎도 선방에서는 다 먹는다는 것을 몰랐다. 덕분에 한철 내내 스님들께 놀림을 당했다. 석 달 먹어야 될 작설차를 한 주전자에 끓여 버렸으니 그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이었다.”

▲세납 스물네 살부터 10여년을 선방 수행했다. 내원암에서의 산철 결제가 국내 첫 산철 결제로 알고 있다.
“71년이었다. 내원암에서 원주를 살았는데 해제를 하고 도반들이 다 떠날 생각을 하니 심난했다. 그래서 산철에 결제를 하자고 제안했다. 산철 결제를 하면 내가 원주로 외호를 잘 하겠다고 했다. 옛날에는 양식도 부족하고 땔감을 대기도 어렵다보니 선방에서도 산철 결제하기가 어려워했다. 하지만 내원암 산철 결제 이후 비구 선방에서도 산철 결제가 생겼다. 그 후 백흥암에 들어가서 지금까지도 산철 결제를 한다. 결제를 해보면 봄과 가을이 공부하기에는 더 좋다.”

▲당시만 해도 백흥암은 형편이 좋지 않았을 텐데. 큰 불사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하다.
“10년 선방을 다니다 1981년에 백흥에 와서도 죽비를 잡고 몇 년을 살았다. 그런데 절이 너무 낡아 비가 새는 지경이 됐다. 큰 불사지만 겁이 나진 않았다. ‘부처님 이러이러해서 불사를 해야 하는데 부처님이 도와 주셔야 겠습니다’ 발원만 했다. 물론 일은 힘들었다. 차도 못 들어와 돌을 등으로 져 나르며 길을 닦았다. 일한 기억 밖에 없다. 하지만 한 번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해본 적은 없다. 떠날까 싶다가도 ‘내가 가면 누가 와서 또 이 일을 하겠나’ 싶었다. 내가 금생에 이일을 어쨌든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불사는 순조로웠다. 17년을 했는데 나랏돈 하나 안 받고 할 수 있었다.”

▲요즘 출가하는 스님들 보면 참 좋은 세월이라 느껴질 듯하다.
“우리 때는 절마다 샘이 멀리 있었다. 아침마다 멀리 있는 샘에 가서 지게로 물을 져다가 공양간 옹기에 담아 놓고 썼으니 그 물을 얼마나 아껴 썼겠는가. 지금도 그 습관이 몸에 배어서 저녁마다 목욕하는 것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요즘 가뭄이 심한 것도 그렇게 아끼지 않은 과보라는 생각이 든다. 백양사에서 서옹 스님이 ‘임제록’을 강의하실 때도 종이가 없어 누런 갱지에 등사기로 밀어서 ‘임제록’을 배웠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상좌들에 강조하는 것도 절약인가.
“물론 그렇긴 하다. 종이를 함부로 버리는 상좌를 불러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 아끼고 검소해야 한다. 하지만 더 강조하는 것은 ‘답설야중거(沓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蹟)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이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그 발걸음을 어지럽게 하지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 했다. 그러니 살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중하고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혹 시간을 돌려 다시 17살, 이제 막 출가했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뭐 별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지금도 부처님 앞에 서면 ‘세세생생 태어나도 부처님 법 여의지 않게 해주시고 부처님 정법을 만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고 발원한다. 한 번도 출가를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무슨 복이 있어 부처님 제자가 됐는지 감사할 뿐이다. 어려서부터 어른 스님들이 원을 물어보면 ‘평생 중노릇 잘하게 해주시고 평생 불퇴전입니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러면 ‘그래, 그래. 그러면 맞다’ 하셨다. 뭐가 더 있겠는가.”

▲여러 분야에서 비구니 스님들의 활동성과가 눈부시다. 종단 안에서의 역량도 더 넓힐 때가 되지 않았나.
“개혁 이전에는 비구니 스님은 고사하고 비구 스님들도 종무 행정에 많이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는 다 재가자들이 종무행정을 처리했다. 지금 종단을 보면 스님들의 활동이 정말 많아졌다. 비구니 스님들도 앞으로는 더 많은 분야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재정 관리는 비구니 스님들이 잘한다. 꼼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하다보면 더 좋아질 것이다. 다른 일도 잘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호법부에 국장급 비구니가 있다면 비구니 관련 사안을 더 잘 조사할 수 있을 것이다. 호계원에도 비구니 관련 사안을 처리할 수 있는 비구니 호계위원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일이 맡겨지면 충분히 해 낼 수 있도록 비구니 스님들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전국비구니회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새해, 전국비구니회 발원이 있다면.
“차근차근 해 나갈 것이다. 할 일은 많고 가진 것은 적지만 그래도 불우한 이웃을 살피고 노스님들 계신 곳을 찾아뵙는 것은 미룰 수 없다. 이렇게 우선 급한 것부터 하면 된다. 서둘지 않고 차근차근 살다보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4년이라는 세월은 길지도, 짧지도 않다. 지나서 돌아보면 짧지만 일을 하려면 충분한 시간이다.”

육문 스님은 12월29일 전국비구니회 11대 집행부 소임자 스님들과 함께 서울노인복지관을 찾아 어르신들을 위한 배식봉사에 참여했다.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고, 행동을 결심하면 물러서지 말아야 하며, 항상 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을 인터뷰 내내 강조한 육문 스님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새해 맞이 행보였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325호 / 2016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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