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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 ‘마음렌즈’로 찍는 육명심 사진작가

  • 새해특집
  • 입력 2015.12.28 13:43
  • 수정 2016.01.0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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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경계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 불이 세계 찍어야 참 사진”

▲ 육명심 사진작가는 “카메라의 무당이며 영매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카메라에 현상 속 본질을 꿰뚫어보는 ‘마음렌즈’를 달았다. 그에게 사진은 너와 내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기다림이자 순간이었다.

죽어야 산다.

사진은 ‘나’를 죽여야 한다. 그래서 고독하다. 유명 광고카피처럼 72시간 기다림 끝에 비로소 셔터를 누른다. 피사체가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때, 완벽하게 동화돼야 사진 한 장 나온다. 삶도 '내가' 죽어야 산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 오가는 선하고 악한 인연들 모두 숙명처럼 온전히 껴안고 감내해야 ‘인생(人生)’이다.

만 50년 사진인생 맞은 원로
1966년 ‘동아국제~’로 입문

시 등 예술 전반에 깊은 관심
“사진의 감성 원천 8할이 시”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연민에
백민 등 ‘우리 것 3부작’ 연작

10년간 150여명 찍은 ‘예술가’
‘문인’ 껍질 벗겨 ‘인간’ 촬영

사랑과 정, 자비가 잘 죽는 법이다. ‘내’가 죽고 ‘사람’이 ‘산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길[道]이다. 그 길에 ‘마음렌즈’ 고정시키고 반백년 기다림을 이어온 인생이 있다. 육명심(84) 사진작가다. 사진은 1964년부터 시작했지만 1966년 ‘동아국제사진살롱’ 입상으로 사진계에 정식입문했으니 꼬박 50년 사진인생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6월6일까지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사진 ‘육명심’ 전을 열고 그의 사진인생을 총 망라하는 5개 시리즈를 테마로 190여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 육명심 작가는 사진작품집을 넘겨가며 사진철학을 설명했다.

그의 인생은 불연의 씨줄과 날줄이 촘촘하게 짜인 소설과 같다. 어머니는 씨받이였다. 아버지는 부부 연 맺은 지 두 달도 안 돼 집을 나갔다. 사실 아버지는 스님이었다. 짧은 명줄 탓에 어려서부터 속리산 암자에 맡겨진 운명이었다. 삼형제 중 막내였지만 큰형은 딸 하나 낳고 폐결핵으로 일찍 세연을 접었고, 둘째 형도 딸 하나 낳았다. 집안에 대가 끊길 판이었다. 어렵게 설득해 장가 들였지만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끊겼다. 요 밑에 쪽지 하나 남겼다. “만약에 아이 낳거든 아들이든 딸이든 밝을 명(明)자, 마음 심(心)자를 써서 ‘명심(明心)’이라고 지어주시오.” 아들이 일곱 살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고를 전했다. 목탁과 회중시계, 대추나무로 만든 표주박 등 유품 세 개가 아버지를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가 1938년이었다.

소설 같은 유년은 망원이나 광각 등 기계적인 렌즈가 아닌 ‘마음렌즈’를 만들어가는 궤적으로 이어졌다. 인생 전부를 관통하면서 ‘나’를 죽이는 길이 명심, 그의 삶에서 뚜렷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시골로 행상을 나가게 됐다. 그 무렵 명심은 큰댁에 자주 맡겨졌고 혼자 외롭게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고독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시에 관심이 컸다. 초등학교 졸업 후 당시 6년제였던 대전사범학교(현 충남여자고교 자리)에 입학, 우연히 대전 시립도서관에서 ‘청록집’을 봤다. ‘청록파’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시인 3명의 시집이었다. 황홀했다. 그는 “그때 박목월 선생의 시가 정말 감명 깊어 모두 다 외웠다. 그때부터 시에 푹 빠져 살았다”고 했다.

운명 같은 인연은 여기서부터였다.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해 1학년 교양과목인 대학국어 시간을 지도한 스승이 박두진 시인이었다. 박두진 시인 권유로 시 습작을 했다. ‘항아리’로 1959년 제1회 연세문학상을 수상했다. 훗날 문인들 초상을 찍게 된 인연도 박두진 시인의 시집 ‘하얀 날개’ 출간에 동참하면서부터다.

시가 없었다면 삭발염의 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성장기 내내 스님이 되고 싶었다. “아들까지 절에 뺏길 수 없다”는 간곡한 어머니 만류로 뜻을 꺾었다. 그래도 끝까지 독신을 고집했단다. 서른셋이 돼서야 결혼했다. 아내가 혼수품으로 가져온 카메라는 늦깎이 사진작가를 탄생시켰다. 신혼여행에서 그 카메라로 자신을 찍었고 아내에게 카메라 조작법을 배웠다. 첫 번째 사진 스승이 아내였다.

그는 2년 만에 사진계에 두각을 드러냈다. 사진 관련 각종 콘테스트 수상자 이름에 수없이 오르내렸다. 치열한 독학과 사진계 거장을 좇아가 배움을 청한 노력 덕분이었다. 특히 남다른 시선 때문이었다. 첫 전국 촬영대회에 참가해 남들 찍는 모습을 흉내 냈다. 아차, 싶었단다. 남들이 어떻게 찍는지 관찰했다. 배우려는 게 아니었다. 남들과 똑같이 안 찍으려고 관찰했다.

▲ 육명심 작가는 서울예전 축제서 굿판에 뛰어드는 등 소통을 강조했다. 네이버 제공

▲ 폭염에 검은 모래로 지친 삭신을 찜질하는 제주도 여인들. ‘검은 모살뜸’.

▲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팔짱을 끼고 등성이에 쭈그리고 앉은 미당 서정주 사진은 육명심 작가의 대표작이다.

그는 우리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포착하고 싶었다. 보통 렌즈로는 볼 수 없는 세계다. 그래서 ‘마음렌즈’를 들이댔다. 그 렌즈에 감성원천 8할이 시였다. 지금도 가방엔 늘 시집이 있다. 서울 대치동 집에서 역삼동 작업실 오가는 길 지하철에서 시집을 읽는다. 소설보다 사색의 여백이 많은 시를 즐겨 읽고 사유한다고. “머리로 쓰지 않고 가슴으로 쓴 시”라며 서정춘 시인의 시를 권했다.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것/ 그곳이 고향이란다”(‘30년 전-1959년 겨울’ 전문)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生이 있었다.”(‘달팽이 略傳’ 전문)

추천하는 시에서 연민이 보였다. 그는 편리해질수록 사라져가는 우리 것들에 대한 연민을 사진으로 남겼더랬다. 지금의 그를 대표하는 ‘백민’ ‘검은 모살뜸’ ‘장승’ 등 ‘우리 것 3부작’과 ‘예술가의 초상’이다. 1977년 ‘현대시학’에 ‘시인의 얼굴’을 연재하며 문예진흥원에서 의뢰받은 인간문화재 국악 부문 촬영을 계기로 ‘백민’ 연작을 시작했다. ‘인간의 발견’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백민’에는 수덕사 초대방장 벽초 스님도 실렸다.  ‘예술가’와 ‘백민’이 인간의 발견이라면 1983년 시작한 연작 ‘검은 모살뜸’은 생명의 발견이었다. 만든 이의 얼굴을 닮은 ‘장승’은 ‘백민’의 연장선상으로 1985년부터 5년간 전국에 위치한 장승을 발로 직접 찾아다니며 찍었다.

‘백민’은 우리 시대 마지막 토박이들의 실제모습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영영 보지 못할 자화상이다. 무당과 스님, 촌로 그리고 소와 개도 등장한다. 이 땅에서 함께 살다 죽어 갈 운명공동체가 무릇 인간 뿐만은 아니라는 메시지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는 ‘미술비평’에서 “이들의 얼굴은 굉장히 흡사하다”며 “모든 대상들과 전적으로 눈을 맞춰 그들의 정신을 드러내고자 찍은 사진들이며 깊은 시각적 교감이자 편안한 눈 맞춤”이라고 평했다.

‘검은 모살뜸’은 검은 모래찜질의 제주도 말이다. 공천포, 이호, 삼양 바닷가 검은 모래밭에서 해마다 여름 폭염이 절정에 이르면 삭신 쑤시는 나이 든 제주 여인네들이 모래밭에서 몸을 지진다. 모래밭에 즐비한 검은 봉분들과 거기에 잠든 여인들…. 여지없는 죽음의 광경에서 ‘마음렌즈’는 삶의 풍경을 봤다. 박명욱 문화평론가가 “검은 모래밭은 소멸과 불귀의 자리가 아니라 치유와 소생의 자리이고, 그러므로 죽음으로 돌아가는 자리가 아니라 생으로 돌아오는 자리”라고 극찬한 이유다.

‘장승’은 사라지는 우리 고유의 얼굴이다. 그래서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만난 우리네 얼굴이다. 그 과정에서 배움이 없어 비참한 가난에 시달렸던 어머니의 포근한 품이 떠올랐고 간절한 고향의식이 생겨났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전북 남원 운봉면 북촌에서 찍은 사진이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장승 이미지는 기이한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낸다. 자신이 뿌리박고 있는 대지 위에 허공을 향해, 세상을 향해 길고 긴 구음을, 신음소리를, 낄낄거리는 웃음을 마구 내지른다. 그는 ‘육명심’(열화당 사지문고)에서 이렇게 적었다. “분명히 귀신은 이렇게 있다. 찍을 때 살짝 카메라를 흔들었더니 귀신이 렌즈 속에 나타났다.”

그는 “카메라의 무당이며 영매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그래서 현상 속 본질을 꿰뚫어보는 ‘마음렌즈’를 닦았다. ‘우리 것 3부작’은 물론 1972년 시작한 ‘예술가의 초상’ 연작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예술가’를 찍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술가’도 ‘사람’이라는 자각 뒤 렌즈 안에서 거추장스러운 ‘예술가’ 꼬리표를 뗐다. 2007년 5월 출간된 ‘문인의 초상’(열음사)에 ‘사람’이 실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71인의 삶과 혼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가 감동했던 박목월은 새벽에 이슬만 받아먹고 살 것 같았다. 이런 시를 쓰는 시인 아니던가.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나그네’ 전문)

‘시인’을 죽였다. “순수서정시인인 그는 발바닥에 흙도 안 묻히고 사는 사람 같았다”는 편견이 죽었다. ‘사람’이 살았다. 순수서정시인인 ‘박목월’은 한 아내의 남편이고 아홉 자식의 아버지이며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마당에 강아지 두 마리, 그리고 흰 러닝셔츠와 바지를 입고 입을 내밀며 웃는 ‘사람’ 박목월에게 셔터를 눌렀다. 시인 고은은 저고리 앞섶을 풀어헤치고 환하게 웃었다. 방에 널브러진 원고지와 이불, 재떨이 한 가운데서 모든 경계도 무장해제했다. ‘천년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라는 문단의 평가를 받는 미당 서정주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팔짱을 끼고 ‘햇빛 속 갈맷빛 등성이’에 앉았다. 김석종 경향신문 기자는 “‘팔할은 바람이 키운’ 미당이라는 인생과 시세계의 아우라가 풍긴다”고 평했다. 뒷간에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듯한 모습에 미당도 아주 좋아했단다. 술상과 술 그리고 담배와 마주앉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 편한 자세로 내려다보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사진은 찰나의 미학’이라는 고정관념에 칼을 댔기에 가능한 사진이었다.

“사진 한 장 찍으려면 조사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친해질 때까지 함부로 카메라를 대면 안 됩니다. 기다려야 하지요. 사진하면 속도가 생각나지만 사진은 기다림의 미학입니다. 대상을 알아가면서 이렇게 찍어야겠다 그런 마음도 들면 안 됩니다. 욕심내면 사진을 망친다는 뜻입니다. 명심해야할 점은 찍어야 할 사람과 통하는 겁니다. 대화하면서 마음이 통하는 순간, 그때 셔터를 누르면 누구라도 사진 한 장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 활짝 열 생각은 않고 여기 봐달라, 웃어달라, 앉아달라 청하기 바쁩니다. 이외수를 찍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한 장소와 자세를 물으니 살짝 기대어 앉은 사진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연 상태, 완전한 소통이 이뤄질 때 찍으세요. 사진은 소통입니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지요. 하나가 된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 자체가 바로 삶입니다. 너와 내가 서로 경계가 없어진 불이의 세계를 포착할 때 찍으면 됩니다.”

어려서부터 시와 국악, 연극 등 각 예술분야와 인문학에 두루 관심을 갖고 탐독한 내공으로 소통을 이뤄냈다. 사진 찍는 과정에서 생긴 여러 가지 소통의 일화에서 확인된다. 박목월은 자신의 시를 훤히 꿰고 있는 사진작가에게 흰 러닝셔츠까지 내보였고, 밥도 권했다. 고은은 30분이면 족했다. ‘똥 철학(?)’이 먹혔다. 고은이 발끈 했을지 모르겠다. 일러보라 했단다. 해서  이렇게 답했다. “24시간 중 가장 사기 안 치는 것은 똥 싸는 행위다. 똥은 남들 보라고 하지않고 가리고 싼다. 마려우면 싼다. 자연스럽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을 쥐어 짜내고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고민한다. 시 쓰는 게 똥 싸는 것처럼 시원하느냐?” 고은은 “대한민국 인물 다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어디서 이제 나타났냐”며 반색했다.

중광 스님을 조계종에서 체탈도첩 시킨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 비화도 흥미롭다. 말 몇 마디로 통해 30분도 안 걸렸다. 스님이 직업을 묻자 “사진도 찍지만 교사”라고 답했더니 “제자가 많겠네?”라고 되물었다. “하나도 없다”고 했더니 스님이 의아해하더란다. 그래서 “나 잡아먹는 놈이 제자인데 그런 학생이 없다. 안 잡아먹히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다”고 했다. 스님은 활짝 웃었다.

“껍데기 벗겨낸 있는 그대로 한국불교 본래면목 담고 싶다”

마음으로 찍은 성철 스님 사진
사진작가 집착 버린 최고 순간
“욕심버리면 목석도 마음 연다”

티베트·라다크·부탄 순례
10년 여정 흑백 필름에 기록
한국불교 진면목 담는 전초전
이번생 마지막 화두 ‘선사일여’


▲ 하늘의 푸른색과 오색의 룽다, 스님들 승복의 붉은 색 모두 흑백이다. 티베트 본래면목에 한 발짝 다가가고자 색이라는 편견을 지우고 그네들 삶에 셔터를 눌렀다. 육명심 사진작가는 온갖 고정관념 걷어낸 민낯의 한국불교 선을 찍고 싶다.

때론 미련하게 기다린다. 주제 하나를 잡으면 5년은 기본이고 10년이 걸린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상대방이 가슴 열지 않으면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판소리계 군계일학일 정도로 창을 잘하는 남자 명창을 그가 찍지 않은 이유다. 또 하나,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을 찍지 않은 일화도 유명하다. 3000배를 하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았던 성철 스님을 무작정 해인사 백련암으로 찾아가 친견했다. 스님은 웬일인지 방으로 불렀다. “사진은 무하러 찍을라카나?” “스님, 만약 부처님 생전에 사진술이 있었더라면 세상의 불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가야산 호랑이’가 웃으며 사진을 허락했다. 그러니 이제 그가 거절했다. 당시 신장이 좋지 않던 스님 눈 근처가 조금 부어 있었다. “나중에 다시 찍겠다” 말씀 올리고 물러섰다.  사진작가로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으로 찍은 최고의 순간이었다.

“왜 5년 이상 찍느냐고 묻습니다. 간단합니다. 자꾸 만나면 정이 들지요. 목석도 자연도 산 하나도 바위도 정이 듭니다. 정이 들 때까지 찾아가서 만나고 기다립니다. 그래야 진정한 만남과 소통이 이뤄집니다. 우리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진을 찍으면서 잘 나오길 기대합니다.”

서라벌예술대에서 신구전문대 사진과에서 서울예술전문대 사진과에서도 그의 철학은 같다. 기다림과 소통이다. 소통은 사랑이자 정이며 자비였다. 이 모든 것은 껍데기라는 굴레와 편견을 벗기기 위해서다. ‘우리 것 3부작’과 ‘예술가의 초상’을 관통하는 철학이다.

학생들에겐 한 학기에 한 가지만 찍으라고 말한다. 사실 그동안 대상과 정이 들라는 가르침이다. 대개 한 가지 대상만 찍다보면 건질 수 있는 사진은 별로 없다. 망원으로도 광각으로도 찍어봤자 거기서 거기다. 그렇게 몸부림치다 한계에 다다르면 살짝 길을 보여준다.

“엄마를 찍겠다는 학생이 있었지요. 어느 날 사진이 달라져서 물었더니 큰 이모와 작은 이모와 함께 있을 때 엄마를 찍었답니다. 그동안 그 학생은 자기 입장에서만 바라본 ‘엄마’를 찍은 겁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은 여인도, 외할머니의 애교 많은 딸도, 이모들에게 언니이자 동생도 엄마이지요. ‘인간’으로서 엄마를 찍으라고 일렀습니다.”

법정 스님에게 했던 사진강의도 같은 맥락이다. 송광사 방장 구산 스님을 찍으러 하룻밤 산사에 의탁할 때였다. 불일암에 드니 법정 스님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꽃도 나무도 하늘도 있었다. 스님에게 한 마디 건넸다. “스님, 눈으로 찍으셨네요.” 스님이 “눈으로 찍지 어떻게 찍느냐” 대꾸하자 “마음으로 찍으세요”라고 했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쓴 격이었다. “사진을 보면 이건 꽃이다라는 설명밖에 없습니다. 스님은 분명 이 꽃을 찍을 때 ‘아름답구나’하고 찍었을 테지요. 스님이 그 느낌을 느꼈을 때 찍은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옵니다.” 스님은 단박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챘다. “사진도 도였네.” “항상 가슴으로 찍어야 한다”고 전한 뒤 암자를 내려왔다. 이 일화를 털어놓으며 설명을 곁들였다. “나비 연구자가 나비를 찍으면 날개, 다리, 더듬이를 분석하는 설명만 들어가지만 예술가가 찍으면 자유로움이나 아름다움이 찍힌다.”

그는 임계의식을 강조했다. 우리가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구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마음도 그렇다. 코끼리를 만진 맹인 세 사람이 각자 자신의 경험에 의지해 코끼리를 이해하려 한다는 얘기다. 부분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늘 주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안이비설신의와 오온으로 파악된 경험적 지식에 기대 대상을 본다고 지적했다. 색깔도 다르지 않다. 동물들이 보는 색은 우리와 같지 않다. 그래서 사진이 흑백이다.

 
 
 
 
70세가 넘는 고령에도 구도자처럼 히말라야 고원과 라다크, 부탄을 10년간 순례하며 담은 티베트의 본래면목도 흑백이다. 하늘의 푸른색과 오색의 룽다, 스님들 승복의 붉은색도 흑백이다. 티베트 본래면목에 한 발짝 다가가고자 색이라는 편견을 지웠다. 그리고 과감히 그네들 삶에 ‘마음렌즈’ 대고 셔터를 눌렀다. 한국불교 선의 경지를 사진에 담고자 하는 이번 생 마지막 화두를 들고자 나선 순례길이 티베트였다. 티베트를 담은 것처럼 온갖 고정관념 걷어낸 민낯의 한국불교 선을 찍고 싶다. 올해부터 선과 사진이 하나 되는 ‘선사일여(禪寫一如)’를 풀고자 카메라를 든다. 정년퇴임 뒤 17년째 새벽 3시면 일어나 집과 작업실에서 참선수행하는 일과로 ‘마음렌즈’ 닦는 것은 한국불교 선을 찍고자 하는 그의 신심이다.

‘나’를 죽여 ‘사람’을 살렸고 ‘한국불교 진면목’을 보려는 그에게서 시 한 편이 겹친다.

“그것은, 하늘 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 아래/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서정춘 ‘빨랫줄’ 전문)

예술가와 백민 그리고 장승, 제주도 여인네들 초상에 오롯이 드러난 우리네 삶에서 ‘빨랫줄’을 포착한 그의 시선이다. 그 ‘마음렌즈’가 한국불교 본래면목의 첫 장을 어떻게 남길까. 그 첫 장에 걸린 것은 껍데기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리라.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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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년퇴임 뒤 17년째 새벽 3시면 일어나 집과 작업실에서 참선수행하는 일과도 ‘마음렌즈’ 닦는 과정이다.

육명심은

1964년 처음으로 사진을 시작해 사진인생 만 50년을 맞는 원로 사진작가다. 당시 국내 사진계 주류를 이루던 리얼리즘 경향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한국의 정신과 정체성을 흑백 사진 프레임에 담았다.
1970년대부터 ‘예술가의 초상’ 연작이라는 10년에 걸친 프로젝트에 착수했고, 1980~2000년대에 ‘백민(白民)’ ‘검은 모살뜸’ ‘장승’ 연작으로 ‘우리 것 3부작’을 완성했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대상과 진정한 소통을 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 우리 정서의 가장 깊은 곳을 포착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1325호 / 2016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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