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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뀌고 세상을 바꾸는 발원] 2. 불보살 발원의 의미

기자명 이제열
  • 새해특집
  • 입력 2015.12.29 10:12
  • 수정 2016.01.08 10:24
  • 댓글 0

모든 중생 고통 없애겠다는 가장 위대하고 간절한 염원

▲ 성불이 목표라면 발원은 의지이고 바라밀은 실천이다. 불보살의 발원으로 자신의 성불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불보살이 일으켰던 원을 자신이 일으켜 남들을 제도하겠다는 자세가 절실하다. 사진은 지극함이 깃든 평창 월정사 석조여래좌상. 월정사 박물관 제공

농부가 수확을 얻으려면 땀 흘려 일해야 하고 운동선수가 승리를 이루려면 피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모든 일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불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의 목적은 성불에 있다. 성불은 중생들에게 법의 실상을 깨닫게 하고 일체의 고통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결실을 가져다준다.

불교수행 출발은 발원서 비롯
원 세우지 않고 성불 불가능
경전마다 다양한 발원 등장

중생 위한 불보살 발원들은
모든 불자가 따라야 할 지침
바라밀행도 원력이 선행돼야

발원의 삶 갈수록 희박해져
수행의 목적은 세상 위한 것
남 제도하겠다는 발원 절실

과거 불보살행이 곧 내 과제
홀로 성불은 결코 옳지 않아
불자들 부처님 원력 동참해야

그러나 성불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필연적인 노력과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성불을 위한 노력과 과정들을 인지법행(因地法行)이라고 부른다. 흔히 불자들이 수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 말이 곧 인지법행이다. 인지법행은 성불하기 위해 일으키는 모든 수행 및 과정들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인지법행과는 다른 과지법행(果地法行)이 있다.

과지법행은 인지법행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인지법행으로 성불한 부처가 중생들을 위해 온갖 제도행을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인지법행이 중생이 성불하기 위해 올라가는 과정이라면 과지법행은 성불한 부처가 중생을 향해 내려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할 때에 ‘상구보리’는 인지법행에, ‘하화중생’은 과지법행에 해당된다.

과지법행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지법행에는 수많은 실천덕목들이 들어있다. 다시 말해 중생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여러 수행이 뒤따라야 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바라밀이라고 한다. 바라밀은 인지법행의 주요 수단으로 중생이 부처가 되는 길이다. 이런 까닭에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한결 같이 바라밀을 닦을 것을 강조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과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바라밀을 통해 불도를 이루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가르친다. 즉 바라밀을 닦지 않고서는 누구도 성불할 수 없다는 것이 경전의 분명한 입장이다.

남방불교의 경우 목표가 성불, 즉 불과(佛果)가 아니고 아라한과이기 때문에 바라밀을 중시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불과를 목표로 삼는 수행자에게만 바라밀수행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부처님과 당시 아라한들에게는 큰 차이점이 있다. 부처님은 바라밀의 결과로 부처라는 칭호를 얻지만 아라한들은 바라밀을 닦지 않고 계·정·혜 삼학만을 닦기 때문에 부처라는 칭호를 얻지 못한다. 부처님은 아라한들과는 달리 32길상과 80종호, 18불공법을 성취한다. 바라밀의 공덕은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완벽할 뿐만 아니라 중생을 제도하는 능력까지도 완벽하여 아라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금생에 닦은 수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3아승지겁이라는 무수한 세월 동안 닦은 바라밀에 의해서이다.

‘본생담’에는 부처님이 얼마나 바라밀을 중시하고 이를 실천했는지가 잘 나타난다. 대승에서는 오로지 삼학만을 닦아 아라한에 이르려는 수행자들을 소승이라 꾸짖으며, 중생들이 대승에 귀의하여 바라밀을 닦을 것을 권고한다.

성불에 이르는 길로써의 바라밀에는 육바라밀과 십바라밀의 2종류가 있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바라밀, 지계(持戒)바라밀, 인욕(忍辱)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선정(禪定)바라밀, 반야(般若)바라밀이다. 또 십바라밀은 육바라밀에다 방편(方便)바라밀, 원(願)바라밀, 역(力)바라밀, 지(智)바라밀을 더한 것이다. 이 가운데 육바라밀은 주로 ‘반야경’에서 강조하고 있고, 십바라밀은 ‘화엄경’에서 강조하고 있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며 이 사바세계가 곧 불토임을 가르치는 ‘화엄경’에서는 바라밀의 종류를 더욱 확대하고 이를 적극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십바라밀 가운데에서 원바라밀과 역바라밀은 후에 원력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불자들의 중요한 수행 덕목으로 자리하게 된다. 원력은 원바라밀과 역바라밀이 합친 용어이다. 특히 대승의 가르침에서는 원바라밀을 발원이라는 용어로 승화시키고 모든 수행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불교의 온갖 수행이 발원을 축으로 굴러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보시를 비롯한 지계, 인욕, 정진 등 모든 바라밀에서 발원이 빠지면 힘을 잃어 성불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보시와 지계, 그리고 인욕, 선정, 지혜, 방편, 지 등 모든 바라밀에도 발원이 깃들어야 한다. 발원이 있기에 온갖 바라밀이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발원이란 무엇인가? 곧 자신과 모든 존재를 성불시키고자 마음을 크게 일으키는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 무명과 번뇌 속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여 필경 부처를 이루게 하려는 간절한 열망이 발원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에 관한 일화들을 접하다 보면 발원의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아미타불의 ‘사십팔대원’, 지장보살의 ‘십대원’, 약사여래의 ‘십이대원’, 문수보살의 ‘십대원’ 등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원을 세우고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해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경전에서는 불보살의 발원이 얼마나 간절하고 위대하며 지극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내가 중생의 악과 번뇌를 깨뜨려 줄 수만 있다면 아비지옥에 늘 있으면서 중생 때문에 무량겁에 걸쳐 고통을 받는다 해도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달게 받을 것이다.”(‘열반경’) “나는 널리 온갖 중생을 위해 어떠한 고통을 받더라도 그 헤아릴 길 없는 생사의 괴로운 바다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 나는 널리 저 중생을 위해 선근을 부지런히 닦을 것이며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내가 설혹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험난한 곳에 볼모로 잡혀간다 해도 온갖 악도의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겠다.”(‘화엄경’) “원컨대 성불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니라 지옥을 깨뜨리되 그 지옥이라는 이름마저 없애는 것이 나의 목적이니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있다면 나는 성불할 수가 없다. 지옥의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된 후에야 맨 나중에 내가 부처가 될 것이니 나의 서원은 끝이 없다.”(‘지장보살본원경’)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법계의 중생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제도되어 해탈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대승기신론’)

이렇게 경전에는 불보살들이 발한 원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그렇다고 불보살의 발원들이 대승경전의 전유물은 아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다룬 ‘불본행집경’이나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다룬 ‘본생담’ 같은 경전에는 부처님이 수행할 때 항상 발원이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히말라야 산의 코끼리에 관한 ‘본생담’은 부처님의 발원 정신이 어떠한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코끼리는 자신의 금상아를 빼앗기 위해 출가수행자로 위장하여 독화살을 쏜 사냥꾼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금상아를 내준다. 그런 뒤 그 공덕으로 부처가 될 것과 사냥꾼을 반드시 제도하겠다고 발원한다. 이렇듯 경전에 등장하는 발원의 내용들은 공통적으로 성불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모든 부처와 보살들이 일으킨 원은 중생들로 하여금 번뇌를 끊게 하고, 생사의 고뇌를 여의게 하며 부처를 이루게 하여, 세상을 부처님 나라로 만들겠다는 내용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불보살의 원이 반드시 성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보살의 원의 궁극 목표는 성불에 있지만 중생들의 삶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한다. 배고픈 중생을 위해 음식을 주겠다거나 헐벗은 중생에게 옷을 주겠다거나 병든 중생에게 의사가 되어 주겠다거나 하는 등 갖가지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 되어 있다.

불보살의 원은 출세간의 공덕과 세간의 공덕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불교의 발원은 과거 불보살의 거룩한 행위나 인지법행으로 끝나지 않고 그 발원들을 중생들에게 똑같이 권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지장보살의 원이 있다면 그 원을 지장보살 개인의 원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불도를 닦는 중생이 그대로 지장보살의 원을 계승할 것을 요구한다. 달리 말하면 지장보살에 귀의한 중생은 새로운 지장보살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화엄경’의 ‘보현행원품’도 발원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발원은 과거 불보살의 행이 아닌 지금 내가 행해야 할 과제임을 분명히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발원에는 바라밀이 뒤따르고 바라밀은 인지법행이 되어 성불이라는 과지법행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수행자나 불자가 과거의 불보살이 세운 원을 도외시한 채 혼자만의 성불을 위해 수행한다면 이는 올바른 인지법행이 될 수가 없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발원을 실천하는 삶을 찾기란 쉽지 않다. 출가자들이나 불자들도 세상에 나타나 활동하려 하지 않는다. 성불이 목표라면 발원은 의지이고 바라밀은 실천이다. 목표와 의지, 그리고 실천이 결여된 수행자와 불자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불보살의 발원을 기다려 자신의 성불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불보살이 일으켰던 원을 자신이 일으켜 남들을 제도하겠다는 자세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수행의 목적이 자신의 안락만을 위한 것인지 세상의 안락을 위한 것인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발원과 바라밀이 없는 인지법행을 소승이라 꾸짖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떠올린다면 모든 스님과 불자들이 부처님의 원력에 동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제열 yooma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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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은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과 원광대 동양학대학원에서 불교철학을 연구했다. 해박한 불교 지식과 명쾌한 논리로 정평이 나있는 그는 ‘불교, 기독교를 논하다’‘원각경’ 등 다수의 저술이 있다.

 

 

[1325호 / 2016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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