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바뀌고 세상을 바꾸는 발원] 6. 나의 발원문 쓰기

  • 새해특집
  • 입력 2015.12.29 10:56
  • 수정 2016.01.08 10:25
  • 댓글 0

불자로 살겠다는 굳은 다짐·불보살과의 거룩한 약속 담아야

▲ 발원은 중생에서 보살로 바뀌는 거룩한 순간이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삶의 목적은 무엇이며, 삶을 지탱하여 주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자아실현이나 소중한 희망을 달성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 치열한 경쟁 속에 내몰리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매진한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과 이룬 뒤의 성취감, 기쁨은 고통을 감내한 이들만의 몫이 아니다. 그가 누리고 있는 기쁨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도움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발원과 소원은 확연한 차이
타자에 의지하는게 소원이면
발원은 자신과의 굳은 약속

발원도 수행의 과정이기에
귀의·찬탄·참회·회향 등
발원문에도 기본형식 필요

무지하기에 우리는 늘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행동하는 데 익숙해져있다. 이를 한마디로 욕망이라 부른다. 욕망에서 모든 죄가 나온다. 욕망이 업(業)이다. 끊임없이 업을 짓고 그 업의 힘[業力]에 끌려 다니는 것을 중생이라 한다. 그러한 욕망과 업력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길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다. ‘나’라는 존재가 ‘남’이라는 존재에 의해 유지되고 살려지고 있음을 알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깊이 깨달은 삶이다. 남들은 또 다른 나라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 인연법이라는 소박한 진리만 알아도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될진대 더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되면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변화할까.

그렇다. 더 높은 진리를 향해, 끝없이 이웃을 향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확장시켜야 한다. 보다 큰 원(願)을 세워야 하고, 그 원의 힘[願力]으로 살아야 하겠다. 업력으로 사는 이들을 중생이라 하고 원력으로 사는 이들을 보살이라 한다. 원을 세우는 것을 발원(發願)이라 하고 발원이 깊어지면 서원(誓願)이 나온다.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한 힘찬 노력이 원력이다. 결국 발원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임무이자 사명이다.

서원은 금생에 끝나는 단기적인 것도 있겠으나 여러 생을 통해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원도 있다. 불자로서 보살의 서원은 단지 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혹의 세계에 생존하는 중생까지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 곧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니 보살은 남을 돕는 자체가 나의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더욱 적극적으로 천명하여 ‘나를 구제하기에 앞서 남을 구제한다(自未得度 先度他)’는 이타정신의 극명한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이 생각이 더 철저해지면 중생을 모두 건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깨달음을 영원히 유보하는 서원으로까지 나아간다.

대승불교에는 많은 서원들이 설해지는데, 이들은 나중에 정리돼 모든 보살에게 공통되는 서원이 제시되기에 이른다. 이를 사홍서원이라고 하며, 총괄적인 서원이라는 의미에서 총원(總願)이라고도 한다. 총원에 대비해 별원(別願)도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하고 있으며, 법장보살은 ‘괴로운 중생에게 깨달음을 열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깨달음을 얻지 않겠노라’는 뜻을 반복해서 천명하고 있다. 이처럼 위대한 보살들의 개별적인 서원을 별원(別願)이라 한다. 유명한 별원으로는 ‘천수경’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의 10원 6향원이 있고, 아촉불의 12원·보현보살의 10대원·약사여래의 12원·법장보살, 즉 아미타여래의 48원 등이 있다.

본원(本願)이라는 것도 있다. 어떤 부처님이 여러 가지의 서원을 가지고 있다면, 그 서원은 그 부처님이 과거 보살이었을 적에 세웠던 것으로 보아 본원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처럼 발원은 불교정신의 적극성과 능동성, 실천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종교적 덕목이다.

그런데 서원을 발하는 것[發願]과 소원을 비는 것은 엄격히 차이가 있다. 서(誓)는 결의·약속·보증·선서 등의 의미를 갖으며 원(願)은 원망·희망·기대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서원은 단순한 바람이 아닌 그 바람을 실현시키려는 의지가 바탕이 되어 반드시 실현시키려는 강한 결의와 굳은 맹세를 담고 있다.

그에 반해 소원은 단순히 무언가를 바라는 것으로 그 바람의 중심에 ‘나’가 아닌 ‘타자’가 자리 잡고 있다. 곧 다른 대상을 향해 바라는 바를 비는 것이 중심이 된다. 기도문과 발원문은 여기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어떤 원인과 결과를 자신의 행위가 아닌 다른 누군가나 무엇에 의지하는 것은 불교에서 철저히 배격된다. 서원[발원]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의 기저에 자기 자신의 의지와 철저한 노력을 수반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탁하는 성질은 근본적으로 차단된다.

불자라면 누구나 발원을 해야 한다. 발원은 불자로서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이며 불보살님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발원은 지극한 신심과 깨달음에서 나온다. 부처님 전에 불자로서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이 곧 발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발원은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일상의 기도와는 차이가 있다. 물론 불교에서 개인적이며 기복적인 기도를 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기도는 점차 참된 깨달음과 중생의 구제를 위한 서원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발원이라는 수행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바른 발원은 곧 불자의 참된 기도가 될 수 있다. 발원에는 불자로서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형식이 요구된다.

발원문에는 기본적으로 ‘귀의·찬탄 ·참회·발원·회향’등의 몇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물론 이 모두를 반드시 갖출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을 생각하며 자신에게 맞는 발원문을 작성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겠다.

불자로서 크나큰 원을 발하기에 앞서 불보살님께 귀의함은 신앙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어 각자의 발원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도 불교적 사고가 요구된다. 예를 들어, ① “이번 저희 아이가 ○○대학에 응시하였습니다. 불보살님의 가피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저희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② “이번 저희 아이가 ○○대학에 응시하였습니다. 불보살님의 가피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병고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훌륭한 불자가 되도록 힘을 베풀어 주옵소서.”

①과 ②의 발원 가운데, ①번의 발원은 자비와 지혜의 정신이 녹아 있지 않아 불교적이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②번의 발원은 발전적이다. ②의 내용으로 기도하는 경우 혹시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직 인연이 성숙되지 않았음을 자각하고 더욱 열심히 매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속에 깃들어 있다.

전해오는 발원문 가운데, 관세음보살님을 향한 발원으로 의상대사의 ‘백화도량 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보자.

 “삼가 머리 숙여 귀의(歸依)하옵고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의 위대한 깨달음의 세계[大圓鏡智]를 살피옵고 또한 이 제자의 본래 밝은 성품을 살피옵니다. 스승이신 관세음보살님의 영원하신 모습은 저 하늘의 밝은 달이 강물마다 비치듯이 거룩한 상호로 장엄하시건만, 어리석은 이 제자는 허공 속의 꽃과 같이 허망한 이 몸뚱이에 집착하여 마침내는 무너질 육신과 이 육신[正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국토[依報]를 관찰하오니, 차별이 있고 끝이 있어서 깨끗하고 더럽고, 즐겁고 괴로움이 큰 차이가 있나이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이 제자의 몸과 마음이 저 성인의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떠나지 아니하니 이제 관세음보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옵니다. 제자의 마음 거울[心境] 속에 계신 관세음보살님을 우러러 발원하오니 거룩하신 힘으로 보살피고, 가피를 내려주옵소서. 바라오니 이 제자는 세세생생 관세음보살님을 가장 높은 스승과 성인으로 모시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과거에 수행하실 때 세운 열 가지 큰 서원[十願]과 여섯 가지 진리의 회향[六向]과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千手千眼]으로 모든 중생을 보살피는 대자대비심을 갖추어서,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몸을 버리거나 몸을 받는 곳마다 항상 보살님의 설법을 듣고, 중생을 위한 참된 교화를 위해 함께 따라 돕고 거들렵니다. 널리 모든 세상 온갖 중생이 다 함께 보살의 이름을 생각하게 하고, 신비한 대비주(大悲呪)를 외워서 다 같이 원통 삼매(圓通三昧)의 성품 바다에 들어가기를 원하옵니다. 또한 바라옵건대 제자의 이 몸이 다하여 다음 생에 태어날 때 관세음보살님께서 큰 빛을 놓으셔서 저를 친히 끌어 주옵소서. 그래서 모든 두려움을 멀리 떠나 마음이 편안하게 해 주시고, 한순간에 흰 연꽃으로 장엄된 백화도량(百花道場)에 왕생(往生)하여 여러 보살님들과 더불어 바른 진리의 법을 듣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생각마다 묘한 지혜가 더욱 더 밝아져서 부처님의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無生法忍]에 들게 하옵소서.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을 마치오며 다시 이 목숨 바쳐 관세음보살님께 예배드리옵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귀의·찬탄·참회·발원·회향의 모든 요소를 만나게 된다. 끝부분에서 의상대사는 다시 한 번 귀의를 통하여 지극한 신앙을 표하고 있다.

‘화엄경’ ‘이세간품’에 “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마의 무리[不發大願 魔所攝持]”라고 하였다. 발원을 하여 원을 세우면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업력이 아니고 원력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업력소생(業力所生)이 아니라, 원력소생이란 말이다. 중생에서 보살로 바뀌는 거룩한 순간이기도하다.

새해에는 새로운 마음으로 부처님 전에 발원문을 올려보자. 그리고 자주 읽어보며 각오를 새롭게 하면 그 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귀의·찬탄·참회 속에 기쁨이 생기고 거기에 발원을 더하니 제불보살님이 함께 기뻐하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나 자신을 가장 미천한 사람으로 여기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상대방을 최고의 존재로 여기게 하소서. 나쁜 성격을 갖고 죄와 고통에 억눌린 존재를 볼 때면 마치 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을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다른 사람이 시기심으로 나를 욕하고 비난해도 나를 기쁜 마음으로 패배하게 하고 승리는 그들에게 주소서. 내가 큰 희망을 갖고 도와준 사람이 나를 심하게 해칠 때 그를 최고의 스승으로 여기게 하소서.”     ‘달라이라마의 기도문’에서

고우익 교수 mahasatva@hanmail.net

*********************************************************************************************

 
고우익 교수는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육군 군종법사와 전국교법사단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천태종 금강승가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발원문선집’ ‘법화삼부경 강설’ 등이 있다.


[1325호 / 2016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