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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이 탄광 수몰 유해 발굴 시급하다

기자명 법보신문
  • 사설
  • 입력 2016.01.04 14:11
  • 수정 2016.01.08 10:35
  • 댓글 1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이 조선인을 강제 징용해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세이탄광 사고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0년대 일본 야마구치현의 주요 탄전인 우베 탄전에는 59개의 탄광이 있었다. 그 중 해저 탄광인 조세이탄광은 생산량 3위를 기록할 정도로 엄청난 석탄을 캐내고 있었다. 그러나 내외부 환경은 최악이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운영하는 다카시마 탄광의 깊이, 즉 수면에서 탄광까지의 수직 깊이가 600m, 700m 정도였는데 조세이탄광의 수면 높이는 30m에 불과했다. 해저탄광 입지 조건에 전연 맞지 않았다. 이 해저에서는 아예 석탄을 채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탄광 입구서 갱도로 들어가는 경사는 급했고, 천장까지의 높이는 어른의 허리 정도. 심지어 천장을 지탱하는 갱목도 대지 않은 구간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막장이 수면과 너무 가까워 배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탄광이 그 지역 59개 탄광 중 3위를 기록할 정도의 석탄을 캤다. 폭압에 꼼짝 못하는 억눌린 사람들의 노동력이 동원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조세이탄광 노동자들은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 이주에 관한 건’ 즉 조선 노동자를 일본 땅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법안이 발령된 직후 탄광측은 1939년 10월부터 조선인을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인명만도 1258명이다. 탄광 내 일본인은 모두 감시원들이었다. 장생(長生)을 뜻하는 조세이탄광이 조선인 탄광으로 불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탄광 내에서 물이 새는 게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었지만 1942년 2월엔 유독 물이 새는 곳이 많았다. 캄캄한 갱도에 물이 새고, 위에서는 배 지나가는 소리 들리니 그 누가 그 공포심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조선인 노동자들은 수차례에 걸쳐 갱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감시인들은 몽둥이를 들고 위협하며 갱 안으로 몰아넣었다.

2월3일. 갱도는 붕괴됐고 탄광은 수몰됐다. 183명이 수장됐다. 136명이 조선인이었고 47명이 일본인이었다. 탄광측은 붕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갱도 입구만 막아버리고는 생존한 노동자들을 다시 다른 갱도에 투입시켰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1월30일 현장에서 위령제를 지낸다고 한다. 그 날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고, 바다에 가라앉은 유해를 발굴해야 그들의 넋이 위로가 될 것이다. 종단협의회가 이 난제를 풀어가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326]호 / 2016년 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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