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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30년 만에 가야산으로 돌아가다

기자명 김택근

▲ 1967년 7월 해인총림으로 격상된 대가람 해인사.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성철 스님은 총림 운영의 기본을 계정혜로 삼고 불교개혁을 외쳤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패싸움의 폐해를 지적했다. 정화란 모름지기 안으로부터 내실을 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성철은 정화운동 초기에 15명으로 구성된 정화대책위원에 선임되었지만 이를 박차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종단은 ‘세 불리기’에 엄청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성철은 해인사 백련암에 들었다. 1966년 가을이었다. 해인사 주지 자운 스님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였다. 자운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김룡사에서 어렵게 지내신다 들었네. 백련암을 비워놓았으니 이제 그만 해인사로 오시라고 말씀드리게. 해인사는 성철 스님이 출가한 곳이니 법 고향이 아니겠는가.”

성철은 처음 삭발한 곳으로 돌아왔다. 돌아보면 30년 동안 제방을 돌며 수행했고, 도를 이뤘다. 그리고 스승 동산 스님이 머물던 백련암에서 어느덧 스승이 되었다. 세수 55세였다. 스승의 말씀을 받았으니 이제 가르침을 내려야 했다.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

해인사 일주문의 주련이다. 일천 겁(劫)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며, 일만 세(歲)를 뻗쳐도 언제나 지금이라는 것이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오로지 지금 뿐이요, 이는 달리 말하면 지금 속에는 과거의 일천 겁이 녹아 있고 미래의 만세(萬歲) 또한 들어있음이었다. 흘러간 것은 흘러갔지만 흘러간 것이 아니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와 있음이었다. 성철은 옛날이 지은, 또 내일이 들어앉은 해인사 속으로 들어왔다.

가야산은 육산(肉山)이면서도 골산(骨山)이었다. 홍류동 계곡물은 변함없었고, 낙락장송의 기개도 옛날과 같았다.

“이산 저산 다녀봐도 가야산만큼 편한 산은 없더라. 지리산은 크지만 밋밋하고, 금강산은 삐죽삐죽 날이 서있지.”

성철은 가야산을 좋아했다. 제자 천제는 흥에 겨워 가야산을 예찬하는 성철의 시를 기억하고 있다.

‘伽倻山色 千古秀 紅流洞天 萬世明(가야산색 천고수 홍류동천 만세명)’

그 가야산 속 백련암은 해인사 내 암자 중에서 맨 꼭대기에 있었다. 주변은 기암절벽이 즐비해서 가야산 제일 승지로 꼽혔다. 성철은 곧잘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나는 진리를 본 산승으로서 한산이 천태산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가야산의 경치를 결코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산은 수나라 말기와 당나라 초기의 난세에 살았다. 비승비속인 채로 천태산 한암(寒巖)이란 동굴에 기거하며 빼어난 선시 300여 편을 남겼다. 성철은 딸 불필에게도 ‘한산시’를 읽으라 권했다.

“한산이 숲속의 석벽이나 마을 인가의 마른 벽에 적은 300여 수의 시와 습득의 시 약간을 얻어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기 ‘한산시’야. 한번 읽어봐. 두 사람은 바보처럼 살면서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를 당했지만 누구보다 쾌활하고 자유자재한 도인이었는기라.”

성철은 한산의 선시를 즐겨 암송했다.

‘내 천태산의 경치 속으로 들어온 뒤로, 몇 겨울 봄을 어느새 지났던고. 산과 물은 그대로이나 사람은 절로 늙나니, 뒤에 올 많은 사람 안타까워라.’

천태산이 성철에게는 가야산이었고, 한암이 곧 백련암이었다. 백련암은 창건연대를 알 수 없지만 서산대사의 제자 소암 스님이 중창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련암 마당에 불면석(佛面石)이 있다. 부처님 얼굴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성철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바위처럼 백련암에 앉아 물소리가 되고 바람소리가 되었다. 스스로 자연이 되었다. 백련암 입구의 산죽 숲, 신선대 바위 위의 늙은 소나무, 홀연히 찾아드는 아침 햇살, 가야산을 덮고 있던 구름바다를 아꼈다. 

1967년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했다. 총림이란 종합도량으로 세 가지를 갖춰야했다. 참선하는 선방, 교리를 가르치는 강원, 계율을 익히는 율원이 있어야 했다. 그 총림의 최고지도자가 방장이었다. 해인사는 1967년 7월 임시중앙종회에서 통과시킨 총림법에 의거하여 해인총림으로 격상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종정에 취임한 도반 청담의 역할이 컸다.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성철이 말했다.

“앞으로 불사 잘하라는 ‘보국대’로 징발당했다.”

보국대란 일제강점기 전쟁에 동원된 노동자들을 일컬었으니 억지로 떠맡았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방장으로서 제대로 된 수행처를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을 내비쳤다.

“총림운영의 기본방침은 계(戒), 정(定), 혜(慧) 3학을 바탕으로 해서 엄격한 계율과 일관된 이론, 철저한 참선 정진으로 견성성불하는 것입니다.”

성철은 부단히 불교개혁을 외쳤다. 그것은 바른 인재를 양성함이었다. ‘중다운 중’을 키워야 불교가 살아나고, 승려가 신도들을 속이지 않고, 절집에서 귀신을 쫓을 수 있었다. 1954년 대통령 이승만의 유시로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은 1962년 통합종단 출범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는 외형상 매듭이지 내용을 들여다보면 봉합에 불과했다. 권력에 의한 타율적 정화운동은 엄청난 부작용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화운동의 화신이랄 수 있는 청담조차 부패한 종단을 개탄했다.

“음주식육(飮酒食肉)의 무리가 들끓는 썩은 못이다.”

사실 불교정화운동은 제대로 된 승려가 없는 데서 비롯되었다. 불교가 세속화되어 절집이 굿집과 별반 다른 게 없었다. 하지만 정화불사가 ‘정화’를 내세운 절 뺏기 싸움으로 전개되었고, 이에 세를 불리는 수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이때 승적은커녕 족보조차 희미한 자들이 머리를 깎고 비구를 자처했다.

성철은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패싸움의 폐해를 지적했다. 정화란 모름지기 안으로부터 내실을 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성철은 정화운동 초기에 15명으로 구성된 정화대책위원에 선임되었지만 이를 박차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전암에서 10년 동안 동구불출 했다. 그 후 종단은 ‘세 불리기’에 엄청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묵은 도둑 몰아낸다고 들어온 사람들이 도둑이 되어 종단을 능멸했다. 그들이 묵은 도둑이 되었음이었다. 그 폐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추이를 성철은 정확하게 예견했다. 성철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정화불사의 기승전결을 예측할 수 있었다. 조계종단은 대처승만 몰아냈지 수행승을 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경내에는 미신적 숭배물이 넘쳐나고, 승려들의 의식은 천박했다. 성철은 총림을 제대로 만들어 진정한 개혁을 이뤄보려 했다. 해인총림이 설치되고 첫 동안거를 맞았다. 선원에 60명, 강원에 70명 등 모두 160여 명이 안거에 들어갔다. 강원의 경전 강독은 지관, 율은 일타, 원시불교는 법정이 맡았다. 전국에서 선승들이 간절한 마음을 앞세우고 산문을 넘었지만 해인사는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름만 총림이었다. 인재를 키워야한다는 데는 공감했지만 종단의 지원은 미미했다. 성철은 방장 자격으로 ‘해인총림 계획안’을 보내 종단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해인총림 운영에 관한 건의문’은 사뭇 절절하다.

‘정화운동 이래 200명 가까운 승려가 한 도량에 모여 정진하는 일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대중이 한데 모였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승가정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장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가능성을 보이는 상서(祥瑞)이기도 합니다. (…) 해인총림은 해인사만의 총림일 수 없습니다. 어떤 특정인의 도량도 아닙니다. 그곳은 우리 종단의 염원이던 도량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수행해야 할 불제자의 사명인 동시에 우리들의 공동운명체입니다. 종회의원 여러 스님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원력 아래 거(擧)종단적인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을 호소하는 바이며, 우선적으로 제12교구에 한해서 본말사 중앙분금회 및 3대사업비 전부를 해인총림운영비 일부로 공제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물론 성철이 직접 작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안을 보내도록 한 것은 성철이 얼마나 승려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는지, 또 총림의 재정 확보가 얼마나 절박한 문제였는지 알 수 있다. 승려교육이 곧 불교개혁의 길이었다. 

성철은 이와 더불어 ‘승가대학 설치 계획안’도 함께 보냈다. 계획안을 보면 재단은 ‘학교법인 해인총림’이며 정원은 100명(매 학년 25명)으로 4년제 대학을 세우려 했다. 이수해야할 필수교양과목으로 국어, 논리학, 법학통론, 심리학, 체육, 문화사, 문학개론, 정치학, 윤리학, 음악, 자연과학개론, 사회학, 경제원론, 생물학, 영어 등이 들어있다. 일반대학과 다름이 없으며 교직과목을 이수케 하여 졸업자는 정교사 자격증을 받도록 했다. 승가대학 설립은 ‘대한불교’ 사장 이한상(덕산) 씨가 앞장섰다. 덕산은 성철의 뜻을 받들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승가대학 인가는 나오지 않았다. 정부는 왜 승가대학 설립을 거부했을까. 이를 둘러싼 여러 설이 떠돌고 있다.  

결국 승가대학은 종단도 정부도 외면했다. 성철의 ‘교육을 통한 불교개혁’의 구상이 깨지고 말았다. 성철은 가야산에서 젊은이들이 포효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청정 도량에서 청정 승려를 배출하려는 원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26호 / 2016년 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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