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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불자를 위한 우바새계경 강설] 2. 집회품(2)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6.01.11 17:24
  • 수정 2016.01.11 17:25
  • 댓글 0

끝없는 육바라밀 실천이 보살 성품 나투게 하는 마중물

 
동쪽은 단바라밀(보시)입니다. 가장 먼저 지혜의 빛을 내는 인연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동쪽은 중생의 마음에 속하는데 중생이 단바라밀에 공양하면 수명과 재산을 늘릴 수 있습니다. 남쪽은 시바라밀(지계)로 우(右)라고도 하는데 거기에 공양하면 역시 수명과 재물을 늘릴 수 있습니다. 서쪽은 찬제바라밀(인욕)로 후(後)라고도 하는데 모든 나쁜 것을 뒤쪽에 버리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공양하면 수명과 재물을 늘릴 수 있습니다. 북쪽은 비리야바라밀(정진)입니다. 모든 악법을 이기기 때문에 거기에 공양하면 수명과 재물을 늘릴 수 있습니다. 하방은 선바라밀(선정)입니다. 삼악도를 바르게 관찰하기 때문에 거기에 공양을 하면 수명과 재물을 늘릴 수 있습니다. 상방은 반야바라밀(지혜)입니다. 상방이라는 것은 곧 무상으로 그보다 더 위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 공양을 하면 수명과 재물을 늘릴 수 있습니다.

재가자 재물·수명 늘리기 위해서는
육바라밀 실천하라는 명쾌한 가르침
바라밀 실천 공덕에서 명확히 설해
재물·수명 끌어오는 마중물이 보시

내가 잘돼야 남도 잘 도울수 있어
보살의 길 발원하면 행복 시작
발심·실천 따른다면 인생도 변화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세간의 중생들이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하는 목적을 이렇게 명확하고 명료하게 설하셨습니다. 수명과 재산은 바로 중생들의 삶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가치이자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발원입니다. 부처님은 이를 육바라밀 실천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반갑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바새계경’의 핵심입니다.

한국 불자들에게는 사실 수명과 재물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자답지 못하다는 인식이 적지 않죠. 세간과 출세간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재가불자들이 마음을 비우고 다 내려놓고 ‘안빈낙도(安貧樂道)’ ‘무소유(無所有)’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부처님은 본분사를 중시한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안빈낙도는 출가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무소유에 대해서도 흔히들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기곤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시면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소유는 영원하지 않기에,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언젠가 내 손을 떠납니다. 내 것일 때 그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집착의 마음을 내려놓고 복을 짓고 공덕을 짓는 것이 바로 무소유죠. 가진 것에 끄달리는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그것이 무소유입니다.

안심정사에서는 재수불공을 봉행하고 있습니다. 한국 불자들은 ‘재수불공’하면 아마 낯설게 느껴질 겁니다. ‘재수, 즉 요행을 바라는 불공’이라고 오해를 하는 분들도 간혹 있어요. 그러나 재수불공은 이 ‘우바새계경’에 근거한 기도로, 재물과 수명(건강)을 발원하는 것이죠. 명확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기도입니다. 재수불공을 통해 모이는 기도금은 모두 군부대 초코파이 지원 등으로 회향합니다. 이 또한 보시바라밀의 실천이지요? 힘들고 바쁜 현대인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보시와 기도의 공덕을 동시에 일굴 수 있도록 이끄는 방안으로 고안한 특별한 불공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재수불공이라고 하면 “아누다라삼먁삼보리(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서 명심견성을 해야지 재수 갖고 되겠습니까?”라며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처럼 명확한 가르침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육바라밀을 마중물 삼아 수명과 재물을 늘리는 실천 방법들이 ‘우바새계경’ 28품 전체를 아울러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불교에서 자주 언급되는 가르침인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봅시다. 남과 나를 이롭게 한다는 의미죠. 저는 자리이타의 첫 번째는 “본인 앞가림이라도 제대로 해라”라고 말하겠습니다. 형제 간에 세 번만 돈 빌리러 가보세요. 또 간다고 하면 반갑게 만나줄까요? 자리이타의 기본은 내가 잘 사는 것입니다. 내가 건강하고 재물이 있어 이를 통해 남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리이타의 두 번째는 ‘내가 부자가 되었으니 너도 부자가 되도록 해주겠다’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날 부산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께서 재벌 그룹 회장이자 정치인인 한 사람을 대단히 칭찬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했더니, 오랜 세월 함께한 본인의 운전기사를 큰 부자로 만들어줬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어느 날 그 기사에게 5000만원을 가지고 오라고 한 뒤, 본인의 돈을 보태 3억원 상당의 땅을 사 줬답니다. 2억5000만원을 빌려준 것이죠. 그 뒤 땅의 가치는 10배 증가해 30억원이 됐습니다. 2억5000만원을 갚은 후 남은 돈을 활용해 운전기사 또한 큰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작정 돈을 주기보다 돈을 버는 방법과 그 기초가 되는 부분을 도와준 셈입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했다면 욕과 시샘을 받았겠지만 내가 부자가 되고 다른 이도 부자로 만드는 마음부자가 되었으니 나와 타인이 모두 이롭고 세상 또한 밝아진 것이죠.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아버지와 아들이 짚신 장사를 하는데 아버지가 만든 짚신은 금방 다 팔리고, 아들이 만든 짚신은 팔리질 않아요. 아들이 아무리 물어도 아버지는 자신만의 비법을 꽁꽁 숨겨두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욕심 때문이죠. 아들은 아버지 임종 전에 다시 비법을 묻습니다. 이미 기력이 쇠한 아버지는 “털털털”이라는 한마디만 남긴 채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짚신을 만든 후 털 같은 보푸라기들을 매끈하게 정리하고 깔끔하게 정돈하라는 말인데 제대로 알려주지도 못하고 죽은 거죠. 어떻습니까. 두 사례의 차이가 보이십니까?

“나는 성공했어도 다른 사람은 안돼”라고 생각하면 나도 안 좋고 남도 안 좋아요. 그런데 내가 열심히 노력해 부자가 된 후 집착하지 않고 이웃도 잘살게 하고 두루두루 베풀며 살면 나도 이롭고 세상도 이로운 거죠.

자리이타의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 실천을 통해 내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걸림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세상의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나서야 합니다. 중생들에게 깨달음을 전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거죠.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 바로 ‘보살’입니다. 오로지 중생들의 아프고 쓰리고 힘든 부분을 치유해주기 위해 삶을 회향하는 거죠.

다음은 육바라밀 실천 주체인 보살에 대한 부분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육방을 누가 공양할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오직 보살만이 공양할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의미에서 보살이라고 합니까? ‘보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하며 보리의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오직 보살만이 공양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선 보리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보리는 곧 깨달음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Bodhi’를 음역한 것으로, 의역하면 각(覺), 지(智), 지(知), 도(道)라고 합니다. 불교의 이상인 불타정각의 지혜를 의미하며 대승의 길을 걷는 보살과 성문, 연각이 수행하여 얻는 불과(佛果)를 가리키기도 하죠.

이 보리심을 얻기 위해서는 뜻을 바로 세워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고 여래와 성인을 가까이 섬기며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지난 강설에서 언급한 ‘위발대승자설 위발 최승자설’ 기억하시죠? 보살의 보리가 궁극적이자 최고의 것이라는 가르침인데 이것이 바로 ‘아누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대지도론’에서는 보리를 발심보리(發心菩提), 복심보리(伏心菩提), 명심보리(明心菩提), 출도보리(出到菩提), 무상보리(無上菩提)로 구분합니다. 발심보리란 발(發) 보리심 즉 발심했다는 뜻으로, 보살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내는 마음 그 자체가 보리에 이르는 원인이 됩니다.

‘화엄경’에서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발심을 이어가면 무릇 정각을 이룬다는 말이지요. 이렇듯 첫 발심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어 복심보리란 번뇌를 이겨내고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고, 명심보리는 모든 법의 실상을 깨우친 반야바라밀의 모습, 출도보리란 반야바라밀에 사로잡히지 않고 번뇌를 끊어 일체지(一切智)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무상보리란 불타정각의 지혜를 말하는데 보살은 보리살타의 준말로, 곧 무상보리를 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흔히 삼보리라고 하는 것은 실상의 이법을 깨달은 진성보리, 부처님의 깨침인 실지보리, 자유자재로 중생 교화의 방편을 깨치는 방편보리를 칭합니다. 쉽지는 않지요? 괜찮습니다. 가끔 ‘보리’에 대해 완벽하게 깨우치기 전엔 다음으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분들이 있는데 옳지 않습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어요. 오직 믿고 실천해도 부족한데 깨달음에 얽매여 이번 생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이해가 어렵더라도 매달리지 마세요.

다시 ‘우바새계경’으로 돌아갑시다. 이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보리를 얻어야만 보살이 된다고 한다면 아직 육방에 공양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어떻게 보살이라고 하겠습니까. 성품 때문에 보살이라고 한다면 보리의 성품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성품이 있는 자가 공양을 한다면 성품이 없는 자는 공양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래께서는 ‘저 육방이 중생의 마음에 속한다’고 말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남자여, 보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리를 얻은 자는 부처라고 하고 아직 보리를 얻지 못했기에 보살이라고 합니다. (…) 보살은 여러 선업의 인연이 모여 보리심을 내었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모든 중생에게 보살의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업의 인연으로 보리심을 내기 때문에 보살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감동스러울 정도로 확실한 가르침이지요? 보살도를 닦아야 보살이 되는데, 이 보살도로 가는 마중물이 육바라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도는 아무나 닦을 수가 있는 게 아니예요. 성품의 차이 때문이지요.

육바라밀을 공양하지 못하였을 때 어떻게 보살이라 하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는 선업의 인연이 기반이 되어 보리심을 내는 것이 바로 보살의 성품입니다. 좀 어렵게 느껴지시겠지만 이 역시도 부처님은 명료하게 알려주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선업의 인연’에 그 답이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은 수보리 존자에게 육바라밀 실천을 반복할 것을 당부합니다. 실천을 통해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끝없이 구함으로써, 아라한이 보살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간절한 원을 세우세요. 처음부터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건강·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육바라밀을 실천한다.” 이 같은 ‘우바새계경’의 핵심을 발원하세요.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합니까.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선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기반으로 끝없이 육바라밀을 실천할 때 헤아릴 수 없는 선업의 인연이 되어 보살의 성품으로 나툴 것입니다. 이해하기보다 실천하세요.

여러분은 지금 유치원생입니다. 박사논문부터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배우고 실천해 보살도를 가겠다는 발원을 품으세요.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실천하고 정진하세요. 이번 생에 쌓은 선업의 인연이 보살도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물론 열심히 육바라밀 실천하는 데도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수 있어요. 마음이 급하고 답답해도,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말고 끝없이 행하세요. 믿음이 곧 실천의 토대입니다. 걱정 말고 기도하고 행하세요. 육바라밀의 실천은 곧 건강과 재물 뿐 아니라 당신의 삶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보살의 길을 가고자 발심한다면 ‘불행 끝 행복 시작’입니다.

[1327호 / 2016년 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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