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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게 시신 내준 조선의 스님

조선 침굉 스님 유언 남겨
“모든 생명이 부처” 역설
현대는 ‘동물 아우슈비츠’

조선시대 선사이면서 염불수행에도 지극했던 침굉 스님은 숙종 10년(1684) 4월12일 순천 징광사에서 입적했다. 세수로 69살이었던 스님은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세연을 마쳤다. 생전에 누구를 만나든 염불을 권했던 스님은 소나 돼지의 귀에 대고 염불하는 등 생명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사대부들의 흠모를 받을 정도로 시(詩)와 문(文)에도 뛰어났던 스님은 입적을 앞두고 그동안 썼던 글들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뒷사람들이 자신의 글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공부를 해나가기를 바라서였다.

정작 곤혹스러운 것은 제자들이었다. 비록 글을 태웠더라도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시문을 모으면 유고집 만드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침굉 스님은 제자들이 이행하기 어려운 유언을 남겼다. 자신을 다비하지 말고 반드시 날짐승들의 먹이로 주라고 당부한 것이다.

‘만약 내가 죽은 뒤에 내 몸을 태우려는 자가 있다면 나와 백대의 원수가 되리라. 바라건대 나의 이 작은 소망을 가엾게 여겨 물가나 숲속에 놓아두어 까마귀나 매가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하라. 부디 괴이하게 여기지 말고 나의 심정을 잘 살펴서 다비를 하지 말라.’

제자들이 어떤 결정을 했는지는 당대 선비 박사형(1635~1706)이 쓴 침굉 스님 행장에 언급돼 있다. 제자들은 스승의 육신을 다비하지 않았지만 들판에 버리지도 않았다. 인근 금화산 둘째 산봉우리 바위틈에 육신을 모시고 돌로 단단히 봉했다. 스승의 간곡한 유언을 등질 수도, 그렇다고 들판에 버릴 수도 없었던 제자들의 고충이 읽혀진다.

자기 육신을 짐승에게 보시하는 일이 티베트불교만은 아니다. 신체의 훼손을 극히 꺼리는 동아시아불교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속고승전’에는 나눔과 평등사상으로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삼계교의 창시자 신행(540~594) 스님과 그의 제자 승옹(543~631) 스님도 자신의 시신을 새와 짐승들에게 보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수많은 생을 윤회하는 동안 가족 아닌 이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최근 전북 김제에서 구제역이 발생해 농장에서 키운 돼지 670마리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또 고창 지역 농장에서 키우던 9800마리의 돼지를 비롯해 자칫 수많은 동물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부처님은 다른 생명을 빼앗느니 차라리 내 생명을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대지도론’에는 살생의 과보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10가지로 나눠 일일이 설명하고 있으며, ‘능가경’에는 ‘살생은 돌이킬 수 없는 악업을 낳아 윤회를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족쇄가 된다’고도 했다.

서양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 흑인이나 인디언이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들은 노예로 사냥하고 사고팔 수 있었던 ‘인간을 닮은 동물’에 불과했다. 앞으로 수백 년 후 생명 존중의 시대가 온다면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으로 수백만 마리의 동물이 생매장당하고 매년 200억이 넘는 동물들이 인간의 입맛을 위해 죽어가는 오늘날을 ‘동물들의 아우슈비츠 시대’로 규정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 이재형 국장
이번 생에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 지적했듯 아무런 자각 없이 살육에 동참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살생의 문화를 끊는 단초는 조선의 침굉 스님이 그랬듯 모든 생명의 무게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데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재형 mitra@beopbo.com

 


 

[1328호 / 2016년 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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