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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구미 금오산 해운사-마애석불-약사암

암자, 1600년의 ‘시퍼런 선기·곧은 소리’ 서리게 하다

▲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약사암은 벼랑 끝에 서 있다.

슈우욱!

설산의 찬 공기 가르는 소리가 시리게 들려온다. 숨죽인 채 귀 세워보니 끊김 없이 연이어 나는 소리다. 산짐승의 울부짖음? 아니다. 인시에 접어든 지금 깨어 있을 짐승 없지 않겠나. 지금 이 산길 걷는 이 오직 한 사람뿐일 터! 소리의 정체를 모르니 공포감은 점점 커져만 간다.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내딛는다. 슈우욱! 슈우욱! 명징하게 울려오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폭포다!

‘삼족오’는 고구려 문화 코드
이 사실 잘 아는 아도화상이
해질 무렵 날아든 까마귀 보며
명산 예언하고 지은 ‘금오산’

선조들이 숭상했던 길조를
고려말 이후로 혐오새 취급
흉조라는 통념 깨지 않으면
길조는 ‘일본 것’ 되고 말아

언뜻 보아도 아파트 10층 높이에 선 물줄기는 태초부터 자신이 가야할 길 알았다는 듯 시린 달빛 한껏 머금은 채, 하얀 눈밭 가로질러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수직하강 하고 있었다.  김수영의 ‘폭포’처럼,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폭포가 안고 있는 저 옹골찬 기개 우리가 뿜어내야 하는데!

▲ 대구 팔공산 옆으로 떠오른 해가 금오산에 빛을 뿌리려 하고 있다. 금오산도 해를 상징하니 하늘 아래 두 해가 솟아 있는 셈이다.

산행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듯 하늘로 향한 계단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다. 중국유학서 돌아 온 의상대사도 이 산에 들어와 수행했는데, 각고의 정진 끝에 깨달은 바 있어 앉은 자리에 암자 하나 짓고 하산했다. 그 암자가 바로 금오산 약사암이다. 그 암자서 바라보는  일출이 절경이라는 소문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길이다.

눌지왕(417~458)이 신라 땅을 다스릴 무렵 고구려서 넘어 온 아도화상이 구미에 이르렀다. 동해서 떠오른 해가 서산으로 질 무렵 까마귀 한 마리 이 산으로 날아든다. 가만 보니 황금색 띤 까마귀. 아도화상은 명산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이 산을 ‘금 까마귀 산’ 금오산(金烏山)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석양의 노을 빛 머금은 새는 다 금빛 새로 보이지 않나? 범상치 않은 까마귀였을 것이다. 보통의 까마귀가 아닌 세 발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가 석양의 금빛을 머금으며 이 산으로 들어섰기에 금오산이라 했을 것이다.

▲ 약사암 종각은 주변 산세와도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세 발 달린 까마귀는 해를 상징하고 토끼와 두꺼비는 달을 상징한다. 옛 문헌에 나타나는 ‘까마귀 날아간 길 따라 토끼가 걸어간다’ 식의 표현은 해와 달의 운행을 뜻하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도 삼족오가 등장한다. ‘갑인 7년(기원전 1987년)에 세발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다. 날개는 석자나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대부분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동물이 삼족오다. 1941년 평양 진파리 고분서 발굴된 금관 장식에도 삼족오가 조성돼 있다. 일부 학계서는 삼족오를 숭상한 민족은 다름 아닌 동이족이라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고구려 시대 문화를 관통하는 코드 ‘삼족오’를 모를 리 없었을 아도화상. 그가 본 건 분명 저녁노을에 물든 삼족오이었을 게다.

▲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갖추고 있는 마애불 높이는 4.2m. 묘하게도 바위 면이 아닌 모서리에 조각해 놓았는데,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해돋이 빛을 온 몸으로 받아 낸다.

계단 길 끝나니 험준한 산길이다. 헤드 랜턴 빛에만 의지해 길 찾는 것도 버거운데 지난 밤 내린 눈은 그 길마저 끊어 놓았다. 낭떠러지 옆 폭 30㎝길. 약사암으로 이어지는 길일까? 확신이 서지 않으니 의심만 커진다. 걸어온 길 다시 내려가 이정표 확인한 후 다시 길 위에 올라선다. 눈바람마저 매섭게 몰아친다. 이 매서운 바람 뚫고 의상대사의 뒤를 이어 이 산에 들어 와 가부좌를 튼 대사가 있다.

고려 문종은 재위 37년 동안 불교진흥에 앞장선 왕이었다. 성종 때 폐지된 팔관회와 연등회를 30년 만에 부활시킨 장본인이 문종이다. 그가 어느 날 아들들을 불러놓고 일렀다. “누가 스님이 되어 복전의 이익을 얻겠는가?” 침묵의 시간도 잠깐. 이제 막 11세가 된 왕자가 나섰다. “출가의 뜻을 굳힌 지 오래입니다. 부왕의 분부만 기다릴 뿐입니다!” 어린 나이에 출가한 그 왕자는 개경 영통사에 머물며 화엄을 공부했다. 그가 국청사에 머물며 화엄법석을 펴자 고승 1000여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고 한다. 천태종 종사로 추앙받는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다.

▲ 약사암 인근에 약 40여기의 돌탑이 산재해 있다. 누군가, 아비보다 먼저 하늘 길에 오른 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쌓은 탑이다. 금오산 오른 사람 무사히 내려가라는 기원도 담겨 있다.

의천은 국왕으로부터 가사를 선물 받았는데 한국서 가장 오래된 자수자품이라 평가 받는 ‘삼보명자수가사(三寶名刺繡袈裟)’다. 현재 순천 선암사가 소장하고 있다. 그 가사에도 해와 달이 수놓아져 있다. 해 속에는 삼족오가, 달 속에는 떡방아 찧는 두 마리 토끼가 새겨져 있다.

놀라운 사실 하나. 일본왕 즉위식 때 입는 곤룡의에도 의천의 가사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거의 그대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왼쪽 어깨에 해와 삼족오, 오른쪽 어깨에 달과 토끼가 수놓아져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언제부터 저 삼족오를 인식하기 시작했을까?

▲ 대혜폭포 닿기 직전 해운사를 만난다. 해운사 대웅전 뒤 암봉에 도선굴이 자리하고 있다.

백제 때 바다를 건너 가 일본 땅을 다스렸다는 연오랑 세오녀(일연 ‘삼국유사’)가 그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 부부의 ‘오’도 까마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백제 불교로부터 전수 받은 삼족오를 지금까지도 길조로 여기고 있다. 일본축구협회 엠블럼도 삼족오다.

고조선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만 해도 길조로 여겨지던 삼족오는 고려말 조선으로 접어들며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식으로 ‘푸대접’을 받는다. 월북작가 이태준의 ‘가마귀’처럼 근현대 문학작품을 통해서는 흉조로 취급되기도 한다. 어느 새 우리도 까맣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재수 없는 새’라 여기고 있다. 우리 스스로 이 통념을 깨지 않는다면 백제 땅서 건너 간 삼족오는 일본의 상징을 넘어 ‘일본 것’으로 굳혀질 게 분명하다. 동이족과 고구려의 기상을 담은 삼족오를 한반도 하늘에 날려야 한다.

 ▲ ‘해’를 상징하는 금까마귀(갏烏)가 새벽녘의 하늘과 땅, 그리고 산사(약사암)를 품었다. 동해서 떠오른 붉은 빛살 내려앉으면 뭇 생명도 깨어나 법음에 귀 기울이리라!

끊긴 길에 돌아서지 않고 애써 길 이어가며 오르다 보니 벼랑 끝 암자 약사암에 닿았다. 일주문 앞 설송도 세차게 흔들어 대던 눈바람도 도량에는 감히 들어서지 않는다. 바람 한 점 허투루 날지 않으니 암자 앉을 만한 천혜의 터라 하겠다. 의상대사가 이곳에 머무른 연유를 알 법하다.

저 멀리 팔공산을 도반 삼아 떠오른 해가 하룻밤 동안 간직해 온 붉은 햇살을 금오산에 뿌린다. 아, 해를 상징하는 금오산이 해를 안았으니 해가 해를 품은 셈이다. 따듯하다! 저 멀리 바다로 길을 내고 있는 낙동강 줄기도 아침 햇살에 제 속살 드러낸다.

3·1운동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용성 스님도 분명 이 산에 올랐을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낙동강 건너는 뱃전서 금오산을 배경으로 한 오도송을 어찌 읊었겠는가!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 꽃에서 자도다.”

구미시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금오산은 기개 넘치는 산이다. 그러나 그 기개 1600년 동안 굳건히 서리게 한 건 벼랑 끝에 서 있는 약사암이다. 금오산에 올라 보시라! 그리고 그 기운 받아 가 이 땅에 전해 주시라! 가실 때 대혜폭포 지나면 김수영의 폭포수도 담아 가시라!

‘…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김수영 ‘폭포’)

우리, 용성의 시퍼런 선기와 김수영의 곧은 소리 가슴에 새겼다면 적어도 굴욕적인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목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금오산 주차장. 관리소서 대혜폭포까지의 1.9Km 구간은 평탄한 길. 이윽고 나오는 계단부터 금오산 정상·성안 분기점까지는 오로지 오르막길이다. 마애석불 분기점서 약사암으로 가는 길은 두 길. 초행이면서 새벽산행이라면 반드시 마애석불 길 보다는 정상·성안 분기점으로 오르기를 권한다. 마애석불 길은 미끄럽고 길이 좁아 눈이 많이 내렸을 경우 길을 잃기 쉽다. 법성사서 약사암으로 이어지는 등하산 길 역시 안내인이 없다면 지양하는 게 좋다. 마애불상은 약사암서 약 600m 거리 암벽에 새겨져 있는데 큰 바위들을 유심히 살펴야 친견할 수 있다. 새로운 볼거리로 떠오른 오형돌탑군은 마애석불서 100여미터 거리에 있다. 관리소서 약사암까지 소요(편도)되는 시간은 통상 2시간30분. 겨울철인 점을 감안 해 3시간 20분 일정으로 등산 하는 게 좋다.


이것만은 꼭!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물 제296호. 직지사 약사전 석불과 함께 3형제라 하는데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이 재채기 한다는 전설이 있다.

 

 

 

 
대혜폭포: 금오산 정상 근처 산성 안에는 일곱 개의 못[七澤]이 있다. 거기서 비롯된 큰 계곡을 대혜계곡이라 하고, 그 계곡을 시원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대혜폭포라 한다. 금오산 저수지의 수원이 되어 금오천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한다. 폭포 높이는 28m.

 

 

 

 

 
도선굴: 해발고도 약 480m의 사면에 위치한 자연동굴. 신라 말 도선 대사가 수도한 후 득도한 곳이라 해서 도선굴이라 불린다. 임진왜란 당시 인동(仁同)·개령(開寧)의 수령과 향민 500~600명이 피난했을 정도로 큰 굴이다.

 

 
법성사: 1962년 7월 지우(智愚)스님이 현 절터에 토굴을 짓고 수행하면서부터 산문이 열렸다. 법성사서 바라보는 금오산 정상 풍광도 일품이다. 지역 사회복지와 라오스 교육불사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산사다.

 
 

[1328호 / 2016년 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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