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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아니라 보수적 가치의 위기다

기자명 함돈균

최근 흥사단에서 전국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는 충격을 준다. ‘2015년 청소년 정직지수 조사’ 결과에서 ‘10억이 생긴다면 죄를 짓고 1년 정도 감옥에 가도 괜찮다’라고 응답한 고교생이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6%였다고 한다. 2012년 조사에서도 47%로 적지 않았으나, 3년이 지난 후 그 비율은 10% 이상 늘어났다.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응답은, 2012년에 36%에서 2015년에는 45%로 늘어났다.

결과가 발표된 후 만난 내 선배들 중에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의 윤리적 ‘타락’에 대해 개탄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개탄 이전에 내가 부끄럽고, 우리 세대가 부끄럽고, 나의 선배 세대들이 만든 이 사회가 무척 부끄러웠다. 지난해 한국사회에서 가장 유행했던 ‘헬조선’ ‘죽창’ ‘흙수저’ ‘잉여롭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들이 지금 이 사회에 대해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이곳은 어른들이 만든 사회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 상당수는 더 이상 정상적인 윤리적 삶을 통해서는 삶의 질은 고사하고 자기 생존조차 불가능하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이 조사 결과는 개탄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회의 선배세대로서 어른들이 부끄러워 할 일이다.

협소한 개인 경험을 이야기해 보자면, 대학에서 공부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내가 대학세계에서 느낀 감정 역시 저 아이들의 판단이나 냉소적 태도에서 어쩌면 아주 멀리 있지는 않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지금 한국 대학에서 그 주요 구성원인 교수들의 일반적 모습들을 관찰한 결과, 생활인의 감각에 지나치게 충실한 경우가 많아서 공적 대의에 대한 관심이나 책임감, 실천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전임교수로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선배 교수들 중에서 불균형하고 비합리적인 노동조건에 비명을 지르는 후배 시간강사를 위해 진지하고 발본색원적인 처우개선에 나서는 경우나 국가의 부당한 대학지배 경향에 대해 공정하고 지혜롭게 저항하는 경우도 별로 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지식인으로서 자존감 없이 소규모 이익집단의 구성원처럼 행위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았다. 미래세대를 정의롭게 키워야겠다는 분위기도 대학의 강의실에서는 언제부턴가 많이 사라졌다. 지식인 사회에서 학문 후속세대로서 내가 갖게 된 실망감이 이러하기에 나는 공부와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면서도, 내가 거주하려는 사회가 여기가 아닌 것 같다는 좌절감에 휩싸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전에 한 경제학 원로의 초청강연에서 들은 이야기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다. 그 경제학자는 평생 한국의 재벌 문제의 모순을 지적해왔던 분이었는데, 사람들이 자기 작업을 ‘시장 비판’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생각하고 자꾸 ‘진보’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벌은 ‘시장 독점’ 세력, ‘시장 특혜’ 세력이라는 점에서 반시장 세력이며 반자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자기 작업은 자본주의 비판이 아니라 건강한 자본주의 옹호이며, 매우 친시장적 작업이라는 점에서 보수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것이라고 의미화 했다.

그 즈음 내가 들었던 또 다른 강연에서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연자는 한국의 대표적인 법률단체의 수장을 지낸 변호사였는데, 그 분은 입법, 사법, 행정이 분리된 나라에서 지금 한국의 법원이 얼마나 권력의 눈치를 보고 판결을 하는지 그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진보의 위기가 아니라 헌법적 가치의 위기, 그러므로 보수적 가치의 위기입니다.”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적 가치가 더 이상 지지 받지 못하거나, 후배세대들이 ‘정상적인’ 윤리적 태도를 견지할 때 자신의 생존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회. 거기에서 진정 위기인 것은 진보적 가치가 아니라 보수적 가치이다. 이미 공동체의 붕괴와 몰락이 현실화 되어 있다는 것을 선배 세대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함돈균 문학평론가 husaing@naver.com
 

[1328호 / 2016년 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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