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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광복 도편수

“목수는 나무의 백년 기다림 헤아려 새 숨결 불어넣는 장인”

▲ 천상 목수인 이광복 도편수에게 집은 편안하고 즐거운 곳이다. 해서 집을 만들기 위해 세밀하게 매만진 나무 하나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적재적소에 배치해 집을 완성한다.

춤이었다.

1963년 국보 1호 숭례문 중건 공사 책임을 맡았던 신영훈 선생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40대 새끼목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전북 임실 대도대한 천지원 팔각원당을 짓고 나니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팔각원당은 현존 목조건축물 가운데 유일하게 귀접이 법식을 사용해 축조했기 때문이다. 신영훈 선생의 아이디어를 눈앞에 실물로 만들어내서다. 새끼목수는 팔각원당 기둥을 없앴다. 원당 한가운데 기둥을 세워야 추녀도 늘이고 지붕 하중을 견딜 수 있다는 주변 우려를 귀접이 법식으로 단박에 불식시켰다. 귀접이 법식이란 팔각지붕 아래 나무를 ‘ㅅ’자로 덧댄 것으로, 새끼목수는 이 방법을 사용해 지붕 무게를 효율적으로 분산했다.

팔각원당에 귀접이천장 올려
기둥 없이 지붕 세우는데 성공
승보종찰 송광사 불사 지휘한
신영훈 선생이 “도편수답다” 평
‘나무의 문리 텄다’는 호 받아

조선 고종 때 경복궁 중건한
조원재·이광규 뒤 이은 대목
1999년 스승 조희환에 사사

목수 부친 닮은 재주·눈썰미
고 1때부터 나무 다듬고 조각
“후대 전통문화 될 자긍심에
전통목조건축 작품 남기고파”

말은 쉬웠다. 여덟 개 각 하나에 나무 두 개를 대야 하니 1mm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정교함과 세밀함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1mm만 어긋나면 16mm가 벌어져 엄청난 틈 탓에 기둥이 버티기 힘들다. 이를 새끼목수가 해냈다. 대개 추녀 4개를 걸려고 해도 이틀이 소요되는데 8개 추녀를 한나절에 해결해 관계자를 놀라게 했다. 새끼목수에게 ‘목운(杢雲)’이라는 호가 주어졌다. ‘나무 문리를 틔었다’는 평가였다. 신영훈 선생은 “이제 도편수답다”며 웃었다.

 
2003년 일이었다. 새끼목수가 목운 이광복(57, 대목 제2236호) 도편수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훗날 삶의 터전인 전통목조 한옥건축을 총지휘하는 예술감독 탄생이었다.

도편수(都片手)는 조선후기 궁궐이나 사찰건축 공사 책임자 호칭이다. ‘목수들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진다. 고려말 조선초 대목(大木)이 우월한 신분에서 공사를 이끌었던 반면 도편수는 낮은 사회적 대우를 받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궁궐과 사찰전각을 짓는 공사에 대목은 사라지고 도편수가 정착한다. 현재 대목장(大木匠)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를 일컫는 말로 굳어졌다.

도편수는 흔히 대목장으로도 불리는데 집짓는 일에서부터 기술, 설계, 감리를 조율하는 종합예술가다. 창호(문짝), 공예, 난간 등 소규모 목공을 전문으로 하는 소목장과 달리 분야별 장인을 이끄는 총감독이 도편수다. 집터 높낮이, 풍수지리, 방향, 건축물 구조와 예술적 기능 등을 관장하고 역량을 총동원해 최상의 보금자리를 창작하는 ‘목수들의 우두머리’다.

아버지도 목수였다. 1960년 전남 진도 출생인 그는 어려서부터 골목대장이었다. 목수 연장 덕이었다. 쌀 두 가마를 팔아야 톱 한 자루 살 수 있던 시절이었다. 피는 진했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남달랐다. 연장과 나무만 있으면 손수 장난감을 만들었다. 공부도 곧잘 해 중동 건설 붐이 일던 1970년대에 넘기 어렵다는 목포공고 건축학과 문턱을 밟았다. 수업이 끝나면 자정까지 대패질을 했다. 1000개씩 부재를 만들곤 했다. ‘목수 DNA’는 운명이었다. 도면을 보면 머릿속에 제작 과정이 입체적으로 그려질 정도였다. 고등학교에서 건축목공 분야 학생기능경기대회 금상과 지방기능올림픽대회 은상을 수상하며 기능장에 올랐다. 졸업 후 안정된 직장도 보장됐다. 한국직업관리공단 산하 직업훈련원에서 학생도 가르쳤다. 직장 사정상 행정직으로 보직을 옮겨 결혼도 하고 자녀 둘을 키우며 부족함 없이 살았다. 그러나 왠지 모를 허전함은 간혹 진한 나무냄새를 피워 올리곤 했다. 설악산 등산길에 우연히 목수들이 봉정암 전각을 짓는 모습에 넋을 잃기도 했다. IMF가 터지자 관리차장이던 그는 스스로를 구조조정했다.

목수는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김왕직 명지대 교수 추천으로 1999년 당대 거장 조희환(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문하로 입문했다. 스승은 1860년대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 최원식, 조원재, 이광규로 이어지는 대목장 맥을 잇는 최고 도편수였다. 1984년 송광사 대웅보전 7차 중창불사는 물론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진천 보탑사 3층 목탑불사에 참여했고 평소 불심이 돈독한 스승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광규 문하에서 전통목조건축 기법을 이어 받은 분이었다. 보탑사 처마곡선을 살린 장본인이 바로 스승 조희환 선생이었다. 그래서였다. 처음 두 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스승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40대 늦깎이 새끼목수였기에 배움을 청하기 바빴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달랐다. 스승은 6개월 만에 건축 마무리 작업을 그에게 맡겼다. 초(문양 도면) 그리는 법을 전수받았고 기문(技門)의 맥도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흘렀다.

배움은 4년에 불과했다. 스승은 2002년 12월26일 향년 58세 일기로 별세했다. 생과 멸은 함께했다. 스승에게 사사 받은 그에게 ‘이광복 도편수 기문’이라는 줄기가 이어졌다. 그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안동 봉정사 극락전 해체수리 작업에 자원하는 등 자신을 더 매섭게 몰아붙였다. 스승에게 배운 지혜와 선조들의 지혜 그리고 자신이 습득한 전통건축에 대한 이해를 조화시켜 진일보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치열함은 훗날 ‘맛있다’고 말하는 입모양이 떠오르는 초를 진관사 사찰음식관에 넣고, 어린이들이 뛰어놀 공간에는 한 쪽 다리 들고 개구지게 서 있는 아이를 형상화한 초를 새기는 등 지혜로 무르익었다.

▲ 임실 팔각원당 귀접이천장.

스승이 돌아가시고 1년 뒤 또 하나의 숙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영훈 선생이었다. 스승과 신영훈 선생 모두 이광규 도편수 제자였다. 그리고 신영훈 선생은 귀접이 법식으로 전북 임실 대도대한 천지원 팔각원당을 완성한 그를 ‘도편수’라고 인정했다.

“도편수는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옮겨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장인이자 예술가입니다. 전통목조건축 기법은 물론 땅의 기운이 어디로 흐르는지,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해가 뜨고 지는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전각이나 집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현실로 만들어내야 비로소 도편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것 답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법을 창조하는 것도 도편수 몫이지요.”

이 도편수가 평소 인용하는 루이비통 5대손 파트릭 루이비통의 명언과 맥락이 같다. 파트릭은 “장인은 보통의 기술자가 아닌 머리와 손이 만나 협응을 하는 사람으로 디자이너가 보여준 창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것이 장인이기 때문에 장인이야말로 아티스트와 동일하다”고 정의했다. 이 도편수는 이 문장을 요약한 문구 ‘장인이란 머리와 손이 만나 협응하는 사람’을 강원도 홍천 지용한옥학교 작업실 창문에 써놓고 늘 되새긴다.

“돌이켜보면 최고의 장인들에게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고 이 도편수는 회고했다. 진한 나무냄새에 중독돼 산사를 떠날 수 없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사찰 불사 대가’로 일컬어지는 현고 스님과 인연도 필연이었으리라.

현고 스님은 승보종찰 송광사 현 모습과 사격을 완성시킨 장본인이다. 경내에 펼쳐진 60여개 전각과 요사채 중 스님의 시선과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빠르다. 수선사, 설법전, 도성당 정도다. 20대 초반인 1971년 출가해 1998년 송광사 주지소임을 놓을 때까지 27년 동안 산사를 떠나지 않고 일군 역작이다. 스님은 이광규, 신영훈, 조희환 대목과 함께 불사를 진두지휘한 인물이었다.

“사실 제일 대단한 분은 현고 스님일지 모릅니다. 그 거장들과 호흡하며 불사를 진행한 인물이니 말이죠.”

이 도편수는 현고 스님이 먼저 알아봤다. 새끼목수였을 때 스승과 인사를 드렸지만 몰라봤을 터다. 북한산 금선사 삼성각과 양평 용문사 심검당을 눈여겨 본 현고 스님이 목수 한 사람 솜씨라는 점을 단박에 알아챘다. ‘저 놈 잘 키우면 쓸만한 놈이 되겠구나.’ 현고 스님은 신영훈 선생과 낙산사 복원불사를 총괄하면서 도편수로 그를 천거했다. 2005년 화마로 전소된 낙산사가 18세기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 화폭에 담긴 원형 그대로 복원될 수 있었던 인연이었다. 이 만남은 당시 주지였던 정념 스님 원력과 만나 원통보전 주변으로 누각과 전각들이 배치된 기도와 수행이 중심 되는 ‘관음도량’ 낙산사 모습을 재현했다. 원통보전 중심으로 새롭게 자리 잡은 빈일루, 설선당, 정취전, 응향각 등은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 등이 그린 낙산사 전경에도 등장한 전각들이다. 빈일루는 오롯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나무를 ‘기다림’이라고 했다. 이 이치를 알아야 목수라고 단언했다. 쓰임새 없는 나무는 ‘죽은 나무’라고 했다. 잘라진 나무들은 기약 없이 기다린다고 했다. 목수는 그 나무들의 기다림을 헤아려 1000년 새 생명을 잇도록 숨결을 불어넣는 장인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이 시대 최고 목조건축물을 산고 끝에 탄생시킨다. 훗날 수백년 지나서도 전통문화유산이 고색창연하게 빛을 발하길 바라는 마음도 담겼다. 나무를 잘라 죽인다고 오해를 사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래서일까. 기이한 일이 그의 일을 돕곤 했다.

“낙산사 빈일루 무지개보에 쓰인 나무가 있었습니다. 제 품에서 5년 전부터 쓰임을 기다리던 석자 정도 휜 나무였습니다. 한데 막상 쓰려고 보니 나무 한 개의 속이 부족하더군요. 그러면 두 개다 못 쓰지요. 그날 밤 강풍이 불었고 다음 날 소나무 두 그루가 넘어져있었는데 똑같이 굽어있었습니다. 환희심이 일었습니다.”

▲ 봉정암 적멸보궁.

그 역시 쓰임새가 많아졌다. 조계종 군종교구장 정우 스님은 공동경비구역 신축법당 의뢰 전 통도사 해외지원인 뉴욕 원각사 불사도 그에게 맡겼다. 미국 역사상 유래 없는 1500년 전통공법으로 조성되고 있는 한국불교 전통사찰이었다. 2017년까지 무량수전과 적멸보궁, 종각, 일주문, 천왕문을 단계적으로 세워 불보종찰 통도사의 직계 사찰로 사격을 갖출 예정이다. 그는 뉴욕과 봉정암 적멸보궁을 오가는 와중에도 현재 대웅전 상량식까지 마쳤다. 기둥만 18개, 서까래가 총 509개가 소요되는 대웅전 목재는 수령이 900년에 달하는 나무를 사용했다. 그는 원각사 대웅전에도 새로운 기법을 썼다. 길이 15m에 이르는 바닥기틀을 기둥에 결구하는 방법을 달리했다. 보통 기둥에 기틀을 꽂는 방식이 아니라 붙였다. 400명에 이르는 대중이 움직이면서 만드는 진동이 기둥으로 전해지는 길을 차단한 지혜였다.

이광복 도편수는 전통목조건축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나무의 ‘기다림’을 헤아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적재적소에 쓰임을 만들어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나무는 그 자리에서 춤을 춘다고 일렀다.

굽은 나무는 굽은 대로 곧은 나무는 곧은 대로. 신명나게.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3대 관음도량 낙산사 복원 진두지휘

장인 손길 닿은 목조건축

서울 잠실 불광사 대웅전부터
신륵사·원각사까지 보수·신축

▲ 서울 잠실 불광사 대웅전.

전통한옥건축 전문가인 이광복 도편수가 사찰 불사에 참여한 시기는 스승 조희환 도편수에게 사사 받은 뒤부터다. 진천 보탑사 적조전 신축공사 참여를 시작으로 남양주 화개선원 인법당, 화순 개천사 대웅전, 조치원 신광사 일주문, 무안 원갑사 요사채, 나주 미륵사 삼성전, 남양주 화개선원 요사채 등 신축에 동참했다.

사찰 불사에 ‘도편수’로 중용된 계기는 2003년 전북 임실 운암저수지 호숫가에 있는 대도대한 팔각원당 창건부터다. 이 도편수는 귀접이 방식으로 건물 안 기둥을 없애 목수로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목운(雲)’이라는 호 역시 여기서 받았다.

▲ 뉴욕 원각사 대웅전.

이후 그가 ‘목수 우두머리’로서 공사현장을 진두지휘한 사찰 불사로 서울 금선사 삼성각, 양평 사나사 진영각, 양평 용문사 요사채, 가평 대원사 대웅전 신축이 주목받는다.

무엇보다 그는 2005년 4월 화마로 소실된 한국 3대 관음기도도량 낙산사 복원의 중심에 섰다. 7층 석탑 주변을 정비하고 빈일루 등 4채를 중건했다. 3000일간 진행된 낙산사 복원이라는 기적에 그가 다듬고 손질한 나무가 적재적소에 쓰였다. 맞배지붕과 팔작지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빈일루는 당시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직접 편액을 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낙산사 빈일루.

▲ 전북 임실 천지원 팔각원당.

낙산사 복원불사 후 그를 찾는 사찰이 많아졌다. 서울 화계사 동종각을 신축하고 진도 청룡사 대웅전도 그가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었다.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도 해체보수했다. 그리고 고 광덕 스님의 ‘제2 불광운동 허브’가 될 서울 잠실 불광사 대웅전도 그의 지혜가 배인 불사다. 서울 진관사 템플스테이관 신축, 신륵사 봉황각 해체수리 역시 그의 솜씨다.

▲ 강화도 학사제.

최근 미국에 한국전통유산이 간직한 미를 대대손손 남길 뉴욕 원각사 대작불사도 진행 중이다. 조계종 군종특별교구가 공동경비구역(JSA)에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건립할 고려 전통목조 건축물 양삭 신축법당도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스승에게서부터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강화도 학사제 전통한옥 공사도 그가 담당하고 있다.

   

 

[1329호 / 2016년 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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