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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암도 스님과 백양사 아침 죽

쌀뜨물 같은 멀건 죽 나누며 검박과 절제 의미 깨달아

▲ 일러스트=강병호 작가

장성 백양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사찰이다. 특히 가을이면 백양사 쌍계루 단풍이 너무도 아름다워 가던 이들의 발길을 불러 세운다. 조계종 제18교구본사 백양사는 본래 백암사로 불렸다. 백제 무왕 시절 여환 스님이 창건하고, 고려 중연 스님이 중창한 후 한때 정토사라 개칭된 적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1574년(선조7) 환양 스님이 염불을 하자 흰 양들이 몰려들었고, 이후 백양사로 사명이 바뀌었다.

많은 대중 가난한 절 살림
반농반선 정신으로 이겨내

철마다 나는 나물 채집해
다양한 국 끓여 허기 달래

백양사 대표 음식은 두부
비짓국 맛 지금도 안잊혀

곶감과 감말랭이도 별미
시장에 팔아 절살림 보태

조계종 원로의원 암도 스님이 백양사로 출가한 것은 1955년이다. 암도 스님이 출가했을 당시 백양사는 가난했다. 6·25한국전쟁의 참화가 채 가시기 전이라 어느 곳이든 풍족한 절이 드물었지만 그중에서도 백양사는 특히 살림이 어려웠다. 그 어려운 살림에도 백양사에는 수좌스님과 강원스님을 합쳐 70여명에 이르는 대중이 기거했다. 은사 서옹 스님은 대중들에게 참선수행을 강조하며 반농반선(反農反禪)의 정신을 철저히 지키도록 가르쳤다. 이에 대중스님들은 일과의 절반은 수행에 전념하고, 절반은 농사를 짓고 양봉을 하거나 숯을 만들어야 했다.

서옹 스님의 서슬 퍼런 가르침으로 규율이 엄격했던 백양사의 행자생활은 인욕의 시간이었다. 17세에 출가한 암도 스님에게 맡겨진 소임은 공양간 보조였다. 밥하는 가마솥에 불 때는 일이 주어졌고, 그 외 시간은 쉬지 않고 산에 올라 땔감을 마련해야 했다. 농사를 짓고 채전을 가꾸는 일도 행자로서 해야할 당연한 일과였다.

백양사 스님들은 항상 대방에 모여 발우공양을 했다. 백양사는 전통적으로 아침에 죽을 먹었다. 그러나 말이 죽이지 사실은 멀건 쌀뜨물 같은 미음에 다름없었다. 멀건 죽 공양은 어른스님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거칠고 모자란 음식이지만 어른스님들은 불평하지 않았고 대중들과 똑같이 공양했다. 후학들은 이러한 어른스님의 모습을 보며 시나브로 불가의 전통과 정신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해 갔다.

“어른스님들은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며 하루에 한 끼는 그 고통을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공양시간마다 내려주셨습니다. 백양사의 아침 죽 전통은 이런 의미에서 ‘나눔의 실천행’이라 할 것입니다. 당시는 배가 고파 견디기 힘들었지만, 적은 음식을 공평하게 나누는 백양사의 아침 죽 전통은 탐욕으로 괴로워하는 이 시대의 해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점심과 저녁은 적은 양이지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반찬은 대개 제철 나물 한두 가지와 김치가 전부였고, 봄에는 쑥국과 냉잇국, 여름에는 호박국, 가을엔 뭇국, 겨울엔 김칫국을 주로 먹었다. 어쩌다 절집에 행사가 있으면 콩나물국이나 미역국을 맛볼 수 있었고, 일 년에 한두 번 김 한 장을 받을 때면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백양사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두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두부 역시 어른스님 생신이나 행사 때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어요. 두부를 만드는 날이면 스님들이 모두 모여 콩을 삶고 맷돌에 갈아 직접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두부는 어른스님들 몫이었고, 젊은 스님들은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를 먹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고소한 비짓국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백양사의 또 다른 대표 음식은 곶감과 감말랭이다. 백양사 주변은 유독 감나무가 많아 옛날부터 감골이라 불렀다. 백양사 대중스님들은 11월 초 감이 익으면 껍질을 까 줄줄이 엮어 곶감을 만들었다. 알이 너무 잘아 곶감을 만들지 못하는 감은 감말랭이로 만들었다. 그러나 곶감과 감말랭이를 만든 스님들은 정작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이를 시장에 팔아 가난한 살림살이에 보태야했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곶감을 만들면서 침만 흘려야 했다. 그러다 어른스님의 감시가 소홀해질 때면 단내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몰래 맛을 보기도 했다고 암도 스님은 귀띔했다.

백양사는 공양 후 ‘작설차’를 마시는 전통이 있었다. 백양사 주변에는 야생녹차가 많아 절에서는 늘 녹차를 마실 수 있었다. 덕분에 백양사에는 ‘다반사(茶飯事)’ 전통이 있었다. 함께 차를 마신다는 것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중스님들이 모두 모여 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는 자리는 하고 싶은 말들을 기탄없이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대중간에 대화의 시간이 없다면 서로의 감정이 쌓여 더 큰 어려움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다반사는 절집 안에서 반드시 계승해야 할 문화라고 믿습니다. 이른바 모났던 돌이 바로 다반사 속에서 둥글게 다듬어져 참된 스님으로 거듭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정신문화는 식당문화에서 비롯된다’는 게 암도 스님의 지론이다. 행자시절 어른스님들은 항상 “스님이 배부르면 안 된다. 배부르면 정신 차려 수행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배가 고파야 정말 수행이 잘 되나’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른스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절감한다고 전했다.

“사람은 생각과 지각과 감각이 자유로워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영명한 영(靈)에서 올바른 각(覺)이 나오고, 거기에서 바른 관(觀)과 혜(慧)와 명(明)이 발현될 수 있습니다. 음식을 탐하는 마음이 지나치게 많으면 무명(無明)과 치심(痴心)이 왕성해져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려면 가장 먼저 뱃속을 비우고 쉬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찰음식의 보전도 중요하지만 음식에 관한 수행자들의 생각과 정신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정신의 중심은 바로 ‘절제’와 ‘소식’입니다.”

정리=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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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도 스님은

1955년 백양사에서 서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백양사 주지, 중앙승가대 교수, 포교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백양사 운문암, 청량사 등에서 정진했다.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현재 담양 마하무량사에 주석하고 있다.

 

 

 [1330호 / 2016년 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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