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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전남대 철학과 교수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상"

대한민국이 고통의 나라 된 건 재물에 대한 탐욕서 비롯

▲ 이중표 교수는 “‘금강경’은 열반이 선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정에서 나와 반야로 통찰함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교의 진리는 사성제(四聖諦)입니다. 고성제(苦聖諦)는 괴로운 현실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하고, 고집성제(苦集聖諦)는 괴로운 현실의 원인을 의미하며, 고멸성제(苦滅聖諦)는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하면 괴로움도 소멸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는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여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괴로움이 없는 곳에는 불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있는 곳에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불교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지혜 완성’보단
‘통찰하는 지혜로 저 언덕 간다’
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옳아

대승은 부처님의 가르침 계승
반야부 초기대승경전 ‘금강경’
‘니까야’로 해석하면 확인 가능

열반은 반야로 통찰해서 성취
선정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아

현대사회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괴로움이 많은 시대입니다. 특히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괴로운 곳입니다.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나라, 청소년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조선에 왔던 외국인들은 우리나라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인근의 여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예(禮)를 숭상하고, 자신을 잘 제어하여 남들과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나라, 이것이 본래 우리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나라가 되었고, 가장 염치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었고, 가장 고통스러운 땅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우리의 근대사는 수난의 역사였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우리의 삶과 전통은 무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여기에 서구의 개인주의 사상과 자본주의 경제가 무분별하게 흘러들어와 경제발전과 부의 성취가 이 나라의 가장 큰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기에 서구 문물을 등에 업고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이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어야 부자가 된다’는 가르침으로 변질되었고, 정화(淨化)라는 명분의 분쟁에 휩쓸려 갈피를 잡지 못하던 불교는 중생의 교화보다는 개인의 성불, 승려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개인 욕망의 성취와 재물 소유가 승속을 막론하고 가장 큰 가치가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으며 재물만 소유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나라로 만든 원인은 가난이 아니라 개인적인 욕망의 추구와 끝없이 재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따라서 이 나라에,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발전이 아니라 불교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종지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이고, 소의경전은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입니다. 조계종은 ‘금강경’과 ‘전등법어’에 의지하여 직지인심하고 견성성불하여 전법도생하는 것을 추구하는 종단인 것입니다. 이 종지에 따라 수많은 사찰에서 수많은 불자들이 ‘금강경’을 독송합니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전등법어’에 의지하여 간화선에 몰입합니다. 그런데 직지인심, 견성성불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법도생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1990년대를 전후하여 답답함을 느낀 수행자들이 다른 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동안 소승불교라고 얕잡아보던 남방불교에 눈을 돌린 것입니다. 그들은 미얀마, 태국 등지에서 남방 상좌부 전통의 위빠사나 수행을 익히고 돌아옵니다. 이들을 통해 소승경전으로 홀대받던 ‘아함경’이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남방불교 소전의 ‘니까야’와 아비달마 논서(論書)들이 번역 소개됩니다. 이들은 대승불교를 비판합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이렇게 새로운 논쟁에 빠져있습니다. 과연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닐까요? 대승 경전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남방불교에서 의지하고 있는 아비달마 논서들도 부처님의 직설이 아닙니다. 남방불교의 수행법은 ‘니까야’에 의거한 수행법이 아니라 붓다고사의 ‘청정도론(淸淨道論)’에 의거한 수행법입니다. 따라서 같은 논리에 따르면 남방불교도 불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불교인가 아닌가는 그 내용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문제인 것이지 부처님의 직설 여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대승불교의 부정은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 전통에 대한 부정입니다. 만약에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아니라면, 아무리 오랜 역사 속에서 신봉되었다 할지라도 동북아시아 불교는 부정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불교가 아니라는 비판은 섣부른 단견입니다. 그 내용을 깊이 살펴보면 아비달마불교가 오히려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진 것이고, 대승불교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초기 대승경전인 ‘금강경’을 ‘니까야’를 통해 해석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소의경전입니다. 따라서 ‘금강경’의 정통성이 확인된다면 조계종의 정통성도 확보될 것입니다. 그리고 ‘금강경’의 바른 이해를 통해 조계종의 종지를 바르게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금강저(金剛杵)와 같은 통찰지(通察智)로 오온(五蘊)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사견(邪見)을 끊어서 열반(涅槃)에 도달한다는 가르침이 ‘금강경’입니다. 대승경전 가운데서 반야부(般若部)는 가장 일찍 성립된 경전인데, ‘금강경’은 반야부에 속하는 초기대승경전입니다. ‘금강경’에는 대승(大乘:Maha-ya-na)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 경이 대승불교가 아비달마불교를 소승(小乘:HI-naya-na)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을 대승이라고 부르기 이전에 성립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금강경’은 반야부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시기에 성립된 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승불교운동의 초기에 형성된 반야부 경전과 ‘금강경’을 통해 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으며, 대승불교는 무엇을 추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반야부 경전이란 반야바라밀(prajn~a-pa-ramita-)을 설하는 경전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야바라밀을 ‘지혜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보다는 ‘통찰하는 지혜로 저 언덕에 간다’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부 경전은 ‘지혜의 완성’을 목표로 설해진 것이 아니라, ‘열반은 반야, 즉 통찰하는 지혜를 통해 성취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반야용선(般若龍船)입니다. 반야는 괴로운 이 언덕에서 행복한 저 언덕으로 건너게 해주는 배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기의 대승불교운동가들은 왜 반야바라밀을 주장했을까요? ‘맛지마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열반을 저 언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반으로 우리를 건네주는 뗏목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부처님은 열반으로 가는 길을 팔정도(八正道)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팔정도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에 포함됩니다. ‘맛지마 니까야’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위싸카 존자여, 세 가지 온(蘊)에 성자(聖者)의 팔정도가 포함됩니다. 위싸카 존자여,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은 계온(戒蘊)에 포함되고, 정정진(正精進)과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은 정온(定蘊)에 포함되고,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는 혜온(慧蘊)에 포함됩니다.’

이와 같이 팔정도가 계, 정, 혜 삼학에 포함된다면, 이 가운데 무엇이 열반으로 가는 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열반은 깊은 삼매를 통해서 성취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맛지마 니까야’는 사리붓다가 위빠싸나를 통해 계, 정, 혜 삼학을 닦아 열반에 도달하는 과정을 구차제정(九次第定)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멀리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멀리하는 것이 계의 실천입니다. 초선(初禪)은 계를 실천하여 도달하는 선정입니다. 이후 제2선에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까지는 정의 수행입니다. 그런데 계와 정의 수행에 항상 반야, 즉 통찰지가 작용합니다. 불교의 계와 정에는 항상 혜가 수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에서 나와 반야, 즉 통찰지로 통찰함으로써 모든 번뇌가 소멸합니다. 이 경은 열반이 선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정에서 나와 반야로 통찰함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야부 경전들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열반은 통찰지로 통찰하여 성취되는 것이지 깊은 선정 속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초기 대승불교운동가들은 이러한 반야바라밀을 주장했을까요? 그것은 당시의 아비달마불교가 선정 속에서 열반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피하여 선정 속에 빠져있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고 지혜로 통찰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이고 열반이라는 것이 초기 대승불교운동가들의 주장이며, ‘금강경’은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성립된 경인 것입니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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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1월18~22일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에서 열린 ‘이중표 교수의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강좌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중표 교수는

전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문학석사·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학연구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전남대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호남불교문화연구소장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아함의 중도체계’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등이 있다.

[1330호 / 2016년 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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