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 우쭐함의 치명적 달콤함

기자명 성원 스님

정의 내세우며 타인에 상처주지 않았을까

▲ 일러스트=강병호

편지글을 보다가 미소 지어봅니다. 추위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금세 기온이 뚝 떨어져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가 되었기에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 추워진 것이 아니라 더위를 좋아하는 불자님에게 심술부리느라 그랬나 봅니다.

진솔한 삶 담은 글 쓰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또 다른 아상

내면 모습도 직시 못하며
세상 향해 쓴소리하며 우쭐

애정 없는 메마른 비판은
그럴듯하게 포장된 칼날

에펠탑 이야기는 저 역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누구의 이야기였는지 모르겠기에 누가 지어낸 것은 아일까.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늘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 주인공이 모파상이라는 것을 이제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계절에 대한 명상을 하면서 알았습니다. 가을을 풍요롭게 만드는 곡식과 과일 대부분은 여름의 뜨거운 햇살로 살찌워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고귀하고 지순한 풍요는 여름이 만들어 내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겨울의 혹한을 땅속에서 견디어내고 섣부른 봄기운에 치솟아 오르다가도 아직 얼어있는 땅을 꾹꾹 눌러 밟아주는 발길에 기어코 한차례 밟힌 후에야 제대로 싹이 되어 오월의 보리가 익어간다는 것을. 이 추위를 좋아하는 저는 아마도 역경계에 처하는 어려움 속에서만이 겨우 자신을 가다듬어가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추위를 탐닉하는 사람들은 맞아야 더 잘 도는 팽이처럼, 언 땅에서 밟혀야 싹이 되는 보리처럼 살아가는 사람인가봅니다.

한때,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담아보려고 무지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내가 쓴 글이 처음의 민낯보다 훨씬 미려하게 꾸며져 나와서 낯선 타인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 힘들어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글을 쓰지 않기도 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아상만 높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결국 글을 쓴다는 게 자신에 대한 집착만 키우고 나 잘난 듯 뽐내는 수단이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월에 잊혀 미화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훗날 보다 직시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글로 부끄러운 삶의 이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의 후회가 그대로 남아있어 더욱 부끄러워집니다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은 그토록 글에 담아 보고자 해도 잘 담기지 않던 자신의 모습이 나 자신이 쓴 편린의 글 구석구석 모든 곳에 너무나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러운 자화상이 말입니다.

내면의 모습과 삶 언저리에서도 이토록 다양한 갈등과 아픔이 맴돌고 있는데 우리들은 늘 정치와 사회의 일들까지 내 속에 끌어넣고는 마음의 번뇌를 증장시키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세상의 모순을 이야기하면서 내면의 갈등과 모순은 없는 듯, 잠시 잊은 듯 살아가는 것만 같습니다. 달콤함으로 시간을 잃고 허비한다는 가르침을 접했을 때 저는 그 말씀에서 ‘나는 오히려 우쭐해하는 제멋에 겨워 인생을 더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익히 잘 알고 계시는 이야기이지만 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들판 길을 가던 나그네가 갑자기 사나운 코끼리 한 마리를 만나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치다가 다행히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마침 한 줄기 넝쿨이 우물 속으로 뻗어 있어 급한 나그네는 나무넝쿨을 타고 우물 속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쥐와 흰 쥐가 넝쿨의 윗부분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매달린 발아래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고 우물 바닥에는 무서운 독룡이 입을 벌린 채 나그네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나그네가 다시 위를 쳐다보니 들불이 나서 연기가 자욱한데, 마침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꿀방울이 떨어져 입으로 들오는 것이었습니다. 입에 떨어진 한 방울의 꿀맛에 순간 취한 나그네는 위험과 괴로움을 잊고 자꾸 떨어지는 꿀을 쳐다보며 기다린다는 ‘비유경(醫輸經)’의 가르침을 접했을 때 놀라고 황당했던 생각이 자꾸 떠오릅니다.

경의 해설은 이렇습니다. 나그네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며, 들판은 무명에 허덕이는 인생을,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우물은 생사, 넝쿨은 생명줄, 검은 쥐 흰 쥐는 낮과 밤, 네 마리 독사는 사대(四大; 흙, 물, 불, 바람)로 구성된 우리들의 몸, 꿀은 오욕(五慾), 벌은 삿된 생각, 들불은 늙고 병듦, 독룡은 죽음을 각각 비유한 것이라고 명쾌하게 적혀 있습니다.

저는 이 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들에게 삶의 고통을 깜박 잊게 하는 것이 달콤한 한 방울의 꿀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달콤함보다 우쭐함에 취해 더 많은 인생을 허비하며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금강경’을 읽다보면 수보리존자는 모든 편에서 부처님으로부터 잘못을 지적당하고, 부정당하면서 애처러울 정도로 부처님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내 부처님의 한없는 자비심과 심오한 공(空)의 도리를 깨우치고는 수보리뿐만 아니라 모든 대중들이 기쁨에 차서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감격에 겨워 눈물 흘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나 우리들을 감동시킬 성자가 없어 우리는 감동의 눈물을 잊은 걸까요? 아니면 우리들의 마음이 나이 들고 낡아서 감동조차 느끼지 못하면서도 사회를 이야기하고 정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스스로는 정의롭게 한 마디 한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쭐함의 달콤함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모순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애정 없는 메마른 비판은 아무리 그럴 듯하게 포장하더라도 타인에게는 그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또 다른 상처를 줄 뿐이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주말에는 날씨가 더욱 차가워진다고 합니다. 차가운 날씨에 쫓기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평과 비판의 날카로운 칼날보다 따스한 이해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감동으로 울지 못하는 늙은 내 마음에 부처님의 자비를 담고 싶습니다. 내가 추위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즐거워하는 것은 그만 두고, 추위로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잠시나마 따스함을 전할 방법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나의 차디찬 이성적 우월감이 달콤함보다 더 내 인생을 낭비하게 하듯이 자꾸만 내가 좋아하는 추위가 나를 아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금강경’의 수보리처럼 감동으로 함께 눈물 흘린 이야기를 나누며 메마른 우리들을 정화해보고 싶습니다.

영상의 날씨뿐인 국토 최남단에서 추워서 행복한 사문 성원 드림.

성원 스님 sw0808@yahoo.com
 

[1330호 / 2016년 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