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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삶의 방식

기자명 최원형

봄이 문턱에 서성이는 2월이다. 2월이 시작되자 곧 입춘을 맞이하니 1년 중 가장 짧지만 언제나 꽉 찬 느낌으로 다가오는 달이다. 드디어 봄이 올 거라는 기대감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막냇동생 생일이 입춘이어서 내 어릴 적 기억 속 입춘은 늘 화기애애했다. 집 현관에 ‘立春大吉’이라 적힌 입춘방이 붙으면 동생 생일이 멀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고, 아버지는 동생 생일을 맞아 식구들 모두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입춘의 의미를 해마다 들려주셨다. ‘겨우내 추워 웅크리던 만물이 깨어나는 날이니 얼마나 기쁘냐, 거기다 식구가 태어난 날이니 더욱 기쁘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 날, 우리 집이 아닌 어느 한옥 나무대문 밖에 붙여진 입춘방을 보고 나는 나의 무지를 처음 깨달았다. 그전까지 입춘대길은 입춘에 생일을 맞은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써 주신 글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입춘 무렵이면 한문이 적힌 종이가 집집이 대문간에 나붙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때로 ‘입춘대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양다경’ 역시 밝은 기운을 받아들여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사람들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크게 길하고 밝은 기운이 가득한 날이라니 얼마나 좋은가!

며칠 전 일이 있어 홍성에 있는 홍동밝맑도서관에 갔다가 건너편 풀무학교 생협 매장에 잠시 들렀는데, 그곳에서 나는 아주 재미난 입춘방을 발견했다. 매장 출입문에 여느 입춘방처럼 여덟팔자로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 적힌 글귀가 달랐다. 한글로 써내려간 종이 두 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대자연에 발맞추어 한 해 채비하는 농부
봄의 흙에 귀를 대면 순환이란 말 들리네’

우리말이어서 그 뜻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대자연에 발맞추어’ 하는 부분이 무척이나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대자연의 리듬에 발맞추고 대자연의 순환에 발맞추고…, 이렇게 내 안에서 꼬리를 물며 대자연과 발맞출 것들이 떠올랐다. ‘리듬, 순환, 호흡’, 이런 것들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요새 흔히 하는 말로 ‘지속가능’일 테다.

이 글귀를 읽으며 익숙하던 입춘방을 다시 생각해 본다. 입춘대길은 과연 무엇을 위한 대길일까? 종이 한 장 붙이는 걸로 과연 크게 길함이 가능할까? 만약 아니라면 크게 길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의문이 꼬리를 물며 생겼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길함이라면 그것은 리듬일 수도 순환일 수도 없다. 가족이란 울타리를 뛰어넘어 사회로 지구 전체로 번져나갈 때 비로소 길할 수 있다.

프랑스에는 포장이 전혀 없는 슈퍼마켓이 15개쯤 있다. 그 가운데 유기농 매장으로 먹거리 문화를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하는 행동하는 슈퍼마켓 ‘비오콥 21’이 있다. 식료품뿐만 아니라 빨래, 청소 그리고 설거지용 세제도 판매하는데 포장이 없다. 이게 과연 가능이나 할까?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담아 갈 것을 준비해오면 가능한 일이다.

나는 비닐봉지를 안 쓰려 안간힘을 쓰지만 물건이 상품화되는 단계에서 포장이 된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비닐봉지를 비롯한 플라스틱을 안 쓸 도리가 없고 그래서 결국 쓰레기를 잔뜩 남기는 일을 되풀이 하고 있다.

전 세계 크고 작은 바다들이 비닐봉지와 플라스틱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 비닐봉지를 먹이로 착각한 해양 동물이 먹고 아사하거나 질식하는 일이 빈번하고, 플라스틱 쓰레기는 잘게 쪼개져 물고기의 배로 들어가 결국 최상위 포식자인 우리 인간의 몸속에 남겨진다. 이게 과연 길할 수 있는 일일까?
나무가 수액을 올리기 시작하는 봄, 봄의 흙에 귀를 대본다. 그저 안일하게 ‘건양다경’을 바라고 ‘입춘대길’을 써서 부치는 걸로는 결코 길한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길한 일이 아닐지.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 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331호 / 2016년 2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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