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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전남대 철학과 교수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중"

생사윤회는 자아라는 망상을 고집할 때 나타나는 착각

▲ 이중표 교수는 “무아를 깨달아 아상을 없앤 보살은 아상을 버리지 못해 생사윤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외면하지 않고 이들을 모두 아상을 버려 열반을 성취하도록 하겠다는 원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강경’의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는 핵심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대승정종이란 대승의 근본취지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답변 형식으로 드러나는 ‘금강경’의 취지는 두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보살은 일체중생을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모두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구마라집 삼장이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應如是降伏其心)’로 번역한 부분의 산스크리트어는 ‘evaṁ cittaṁ upādayitavyam’입니다. 이것을 번역하면 ‘이와 같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입니다. ‘마음을 항복받는다’라는 번역보다는 ‘마음을 일으킨다’라는 번역이 더 명쾌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부처님 가르침의 취지가 개인적인 성취가 아닌 모두 함께 깨우쳐서 일체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삶, 즉 보살승(菩薩乘)에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보살이 중생 제도한다는 건
꿈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것
제도할 중생 실재하지 않아

중도는 모순대립이 떠난 입장
실체론은 언어를 진실로 판단
언어 떠나 중도서 실상 봐야

둘째,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여도, 사실은 어떤 중생도 무여열반에 들어간 중생은 없다. 왜냐하면 보살에게 아상(我想), 인상(人想), 중생상(衆生想), 수자상(壽者想)이 생긴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구마라집 삼장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으로 번역한 단어의 산스크리트어는 ‘ātma-saṁjñā sattva-saṁjñā jīva-saṁjñā pudgala-saṁjñā’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잡아함경’에는 인간을 의미하는 다양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금강경’과 비교하면 ‘인상(人相)’은 ‘복가라(福伽羅):pudgala(사람)’를 의미하고, 중생상(衆生相)은 ‘중생(중생):sattva’를 의미하고, 수자상(壽者相)은 ‘기파(耆婆):jīva(수명)’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금강경’의 네 가지 상이 ‘잡아함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잡아함경’은 우리가 인간이나 자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각활동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 오온(五蘊)인데, 오온은 관념이며 기억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열반(涅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이런 관념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금강경’에서 이야기하는 보살은 대승불교 특유의 존재가 아니라, 근본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열반을 진정으로 성취한 사람이며 열반을 성취한 보살은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만, 나와 남을 분별하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신이 제도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상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불교수행은 아상을 버리는 일입니다. ‘잡아함경’은 괴로움의 뿌리인 자아라는 망상이 의욕(思)과 소원(願)을 인연으로 생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의욕과 소원을 가지고 중생을 제도한 후에,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상이 커진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보살의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잡아함경’과 ‘금강경’ 사이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잡아함경’에서는 아상이 의욕과 소원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금강경’에서는 모든 중생을 제도할 원을 세우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아상이 있어서는 안 되고, 아상을 생기지 않게 하려면 원을 세워서는 안 되는데, 원을 세우지 않고서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면, 보살은 그 자체로 자가당착이며 모순입니다.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일까요? 여기서 모순된 견해를 취하지 않는 부처님의 위대한 침묵, 무기(無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 즉 자아가 공간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몸을 받아서 태어나 늙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할까, 무한할까?’ ‘세계는 시간적으로 유한할까, 무한할까?’ ‘생사를 극복한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까?’하는 문제들은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태어나서 죽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태어나서 죽어갈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상입니다. ‘맛지마 니까야’ 63.Cūḷa-Māluṅkya-sutta(말룽꺄에게 설하신 작은 경)에서는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 독화살과 같은 사견(邪見)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연료에 의지하여 타고 있는 불과 같이 우리의 몸은 섭취한 음식(團食)에 의지하여 36.5℃로 타고 있는 불꽃이고, 우리의 마음은 경험이라는 음식(觸食)과 의지와 생각이라는 음식(意思食)과 분별이라는 음식(識食)에 의지하여 타고 있는 불꽃입니다.

우리는 연기하는 존재일 뿐, 자아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윤회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고, 이러한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중생입니다. 본래 태어나서 늙어 죽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무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네 가지 음식을 취하여 자아라는 망상을 만들어 키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사는 중생들이 자아라는 망상을 고집할 때 나타나는 착각입니다. 따라서 아상을 버리면 생사윤회는 사라집니다. 보살이 중생을 생사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으로 제도한다고 하지만, 본래 생사가 없기 때문에 제도할 중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본래 자신이 생사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아의 망상에 사로잡혀서 꿈꾸듯이 생사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실제로 제도할 중생이 있어서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제도할 것이 없는 중생을 꿈에서 깨어나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지만 실제로 구제를 받은 중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보살의 서원은 무원(無願)의 서원이며, 이것이 무원삼매(無願三昧)입니다.

이것이 육조 혜능이 말하는 돈법(頓法)입니다. ‘육조단경’의 가르침의 근본은 정혜일체(定慧一體), 정혜즉등(定慧卽等)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보리반야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선정과 지혜를 수행해야 하는데, 그 선정과 지혜를 일체로 보고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혜능이 이야기한 ‘누구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보리반야의 지혜’를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본래 생사가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육조는 ‘누구나 본래 생사가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누구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보리반야의 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조단경’에서는 왜 정혜일체, 정혜즉등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정혜를 둘로 보는 것은 실체론에 근거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선정을 닦아 지혜를 얻어 성불하게 된다는 생각은 실체론적인 것으로서, 수행자와 그 수행자가 행해야 할 수행(定慧)과 그 수행을 통해 얻을 결과(菩提般若)를 별개의 것으로 분리합니다. 여기에서 선정과 지혜는 보리(菩提)를 얻는 수단으로 간주되며 이 수단의 선후관계가 문제됩니다. 선정을 통해 지혜가 나오는가, 지혜를 통해 선정에 들게 되는가? 즉 깨달음(菩提)이라는 결과는 지혜라는 수단에 의해 성취되는가, 선정이라는 수단에 의해 성취되는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육조단경’은 이러한 논쟁을 어리석은 사람들이 승부심을 끊지 못해 생기는 것으로서 법집(法執)과 아집(我執), 즉 실체론을 떠나지 못한 결과라고 비판합니다. 즉 자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수행하기 때문에 나타난 논쟁이라는 것입니다.

실체론은 언어를 진실한 것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언어는 그 언어에 상응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체론은 허망한 언어를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어를 놓고 모순 대립합니다. 모든 사상적 대립은 언어를 진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생깁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모순 대립에 대하여 허망한 언어의 유희, 즉 희론(戱論)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허망한 언어를 떠나 중도(中道)에서 실상을 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중도는 언어에 의해 야기된 모든 모순 대립을 떠난 입장입니다. 즉 언어도단의 입장이 중도입니다. 선가에서 이야기하는 불립문자는 바로 이러한 중도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이 당시의 사상적 대립에 대하여 침묵한 것은 이러한 중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반야는 말장난을 쉬고, 허망한 개념화작용을 그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야가 곧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중도에서 우리에게 연기법이라고 하는 진실을 가르쳤습니다.

‘대승정종분’의 “모든 부류의 중생들을 내가 모두 무여열반에 들도록 하여 그들을 제도하겠다.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여도, 사실은 어떤 중생도 무여열반에 들어간 중생은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에 보살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생긴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무아를 깨달아 아상을 없앤 보살은 아상을 버리지 못하고 생사윤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모두 아상을 버려 열반을 성취하도록 하겠다는 원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중생들이 아상을 버리고 열반을 성취하지만, 실제로 열반에 들어간 중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생사를 겪고 있는 중생도 없고, 얻어야 할 열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이란 우리의 마음이 무상하게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통찰하는 것을 의미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마음의 본성이 공이며 무아라는 사실을 깨달아 부처의 삶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처의 삶은 아상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라는 것을 가르쳐 중생으로 하여금 아상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법도생(傳法度生)입니다. 이러한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은 점차의 순서 없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육조 혜능의 돈법입니다.

이와 같이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에 육조의 돈법을 계승하고,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조계종의 종지가 함축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자아로 취하고 있는 오온에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반야로 통찰하는 것이 직지인심이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진 것이 견성입니다. 아상을 버리고 일체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는 것이 부처의 삶을 이루는 성불이며, 본래 생사가 없기 때문에 실로 열반에 들어갈 중생도 없고, 중생이 들어갈 열반의 세계도 없다는 진리를 전하는 것이 전법도생입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에 선후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직지인심하여 견성성불한 후에 전법도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지인심하면 전법도생하지 않을 수 없고, 전법도생하는 삶이 곧 성불한 사람의 삶입니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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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1월18~22일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에서 열린 ‘이중표 교수의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강좌를 요약한 것입니다.

[1331호 / 2016년 2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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