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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전남대 철학과 교수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하"

병 고칠 좋은 약 고민 말고 직접 먹고 병 낫는 일이 중요

▲ 이중표 교수는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자신이 직접 먹지 않으면 병이 나을 수 없고, 아무리 좋은 배가 있어도 자신이 스스로 타고 건너지 않으면 저 언덕에 도달할 수가 없다”며 “그 약이나 배는 누가 만들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먹고, 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금강경’의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은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시고 500년 후에 무아(無我)에 대한 가르침을 사람들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를 염려했습니다. 부처님 입멸 후 500년경은 대승경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금강경’이 불멸 후 500년경에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불멸 후 500년경을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이 쇠멸한 시대라고 인식하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은 무아의 실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아는 관념적 이해가 아닌
실천 통해 반야로 통찰해야
불법은 반야로 통찰한 진실
이를 알면 불교 집착 안 해

자아라는 망상을 통찰한 뒤
허망하다는 깨달음이 무아
무아 아니면 유아라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모순된 생각

그렇다면 왜 이 시기에 대승경전이 만들어지고, 이 경전의 말씀이 진실이라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부처님 말씀은 불멸 직후 제자들에 의해 1차 결집이 이루어졌지만,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암송되어 구전됐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아비달마불교 시기에 논장(論藏)이 형성됨으로써 삼장(三藏)이 성립되었고, 유력한 부파(部派)는 독자적으로 삼장(三藏)을 편찬하여 전승하였는데, 구송(口誦)으로 전해진 부파의 삼장이 처음 문자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대승경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불설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하자, 대승불교운동가들도 문자로 된 대승경전을 만들어 그것이 부처님 말씀이라고 주장한 것이고 이 무렵 ‘금강경’이 출현했다고 생각됩니다.

반야바라밀을 주장하는 대승불교운동가들은 무아의 가르침은 관념적인 이론을 통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계행을 갖추고 수행공덕을 갖추어 지혜를 닦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해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불교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수행을 통해 반야로 통찰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야의 통찰은 모든 관념적인 인식, 즉 상(想)을 배제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조차도 관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맛지마 니까야’ 1.Mūlapariyāya-sutta(근본법문 경)에서 불교의 근본은 관념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체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의 주제는 ‘부처님께서 가르친 모든 가르침의 근본’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이 경에서 “무지한 범부들은 ‘sañjānāti’하고,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자와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과 정각을 성취한 여래는 ‘abhijānāti’한다”고 말씀하십니다. ‘sañjānāti’하지 말고 ‘abhijānāti’하라는 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친 모든 가르침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sañjānāti’는 무엇이고, ‘abhijānāti’는 무엇일까요?

‘sañjānāti’는 ‘하나의, 함께, 같은’의 의미를 지닌 접두어 ‘saṁ’과 ‘알다’라는 의미의 동사 ‘jānāti’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함께 알다, 같은 것으로 알다, 하나로 알다’입니다. 이것은 대상을 개념(槪念)으로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책상’이라는 개념은 세상의 모든 책상을 ‘하나의’ 대상으로, ‘같은’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똑같은 책상이 하나도 없지만, 우리는 모든 책상을 함께 싸잡아서, ‘책상’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개념을 사용해 같은 것으로 인식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대상을 ‘개념’을 가지고 인식하는 것이 ‘sañjānāti’입니다. 저는 이것을 ‘관념적으로 인식하다’로 번역했습니다. 오온(五蘊)의 상, 즉 ‘saññā’는 ‘sañjānāti’의 명사형으로서 ‘관념적으로 인식하는 마음’, 또는 ‘관념이나 개념’을 의미합니다. 이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관념적인 인식을 중생들의 잘못된 인식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abhijānāti’는 ‘∼에 대하여, 향하여, 두루’의 의미를 지닌 접두어 ‘abhi’와 ‘알다’라는 의미의 동사 ‘jānāti’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에 대하여 알다, 두루 알다’입니다. ‘∼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대상을 직접 몸으로 상대하여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안다’라고 할 때, 컴퓨터를 관념적으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앎의 내용이 다릅니다. 눈앞에 있는 컴퓨터를 보고, 그것이 책상이 아니라 컴퓨터라는 것을 아는 것은 컴퓨터를 컴퓨터라는 이름, 즉 개념을 가지고 인식한 것입니다. 이것이 ‘sañjānāti’입니다. 우리가 컴퓨터를 관념적으로 안다고 해서 컴퓨터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 컴퓨터에 대한 진정한 앎입니다.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알기 위해서는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실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직접 컴퓨터를 손으로 만져보고, 사용법에 따라 실습을 함으로써 컴퓨터가 어떤 것인 줄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abhijānāti’입니다. 직접 몸으로 대상을 상대해 체험을 통해 그 대상에 대하여 아는 것이 ‘abhijānāti’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체험적으로 인식하다’로 번역했습니다. ‘신통(神通), 승지(勝智)’로 한역된 ‘abhiññā’는 ‘abhijānāti’의 명사형으로서 ‘체험적으로 인식하는 지혜’나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범부(凡夫)든, 수행자나 아라한이든, 인식의 대상은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인들은 이 세계가 물질적으로는 사대(四大), 즉 땅(地), 물(水), 불(火), 바람(風)이라는 존재로 이루어져 있고, 그곳에 생명을 지닌 유정(有情)들과 여러 천신들이 살고 있으며, 하늘 위에는 범천(梵天)을 비롯하여 수많은 천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존재들에 대하여, 관념적으로 인식하지 말고, 체험적으로 인식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친 것은 이 세계를 초월한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존재들에 대해 바르게 인식할 것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의 근본이라는 것을 이 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상을 포함한 모든 관념은 관념적으로 인식(san~ja-na-ti)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아상을 포함한 모든 관념은 체험적으로 인식하여 통찰하면 소멸합니다. ‘금강경’이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부처님은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윤회하고 해탈하는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윤회하다가 해탈하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우리 주변에 마음이 윤회하고 해탈하는 주인공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찾는 것이 불교공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맛지마 니까야’ 38.Mahātaṇhāsaṅkhaya-sutta(갈망하는 마음의 소멸 큰 경)은 그런 사람에게 무아를 가르치신 경입니다.

이 경에는 인식하고 분별하는 마음(識)을 윤회하고 해탈하는 자아로 생각하는 비구에게 분별하는 마음은 연기할 뿐이며, 윤회하고 해탈하는 자아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관념적인 이론이 아니라 반야로 통찰함으로써 각자가 스스로 깨닫게 되는 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도 그것을 관념적인 이론으로 만들어 집착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아 가르친 12연기는 우리가 고집해야 할 이론이 아니라, 반야로 괴로운 현실을 통찰하여 깨달은 진실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아무리 분명한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괴로움이 없는 곳에서는 의미 없는 진실입니다. 어떤 약이,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할지라도, 병이 나은 후에는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를 이해한 사람은 불교를 집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자신이 직접 먹지 않으면 병이 나을 수 없고, 아무리 좋은 배가 있어도 자신이 스스로 타고 건너지 않으면 저 언덕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약이나 배는 누가 만들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먹고, 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병이 걸린 사람은 자신이 직접 약을 먹어야 하고, 저 언덕에 건너가야 할 사람은 자신이 직접 배를 타고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마지막으로 남긴 가르침은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평소에도 강조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받들겠는가?”

여기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다른 사람’은 ‘부처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부처님을 포함하는 다른 사람’입니다. 선가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말씀은 이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직 스스로에 의지해 스스로를 스승으로 삼아 실천할 일이지 남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무아는 이론이 아니라, 자아라는 망상이 있을 때 그 망상을 통찰하여 그것이 허망한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따라서 무아를 깨달아 자아라는 망상이 사라진 후에도 고집해야 할 이론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아를 관념적인 이론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무아의 가르침에서 혼란을 겪게 됩니다. 무아라면 지금 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나’가 없다면 누가 ‘나’를 죽여도 ‘나를 죽였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내가 다른 사람을 죽여도 ‘그 사람’이 무아라면 실은 ‘그 사람’을 죽였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불교의 무아설을 관념적인 이론으로 이해하면 이런 딜레마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실제로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구가 있었습니다. ‘맛지마 니까야’ 22.Alagaddūpama-sutta(독사의 비유 경)은 그 비구를 위해 설하신 경입니다.

‘독사의 비유’라는 이름의 이 경은 ‘뗏목의 비유 경’으로 널리 알려진 경으로서 독사의 비유와 뗏목의 비유가 함께 설해져있습니다. 이 두 개의 비유는 공과 무아를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입니다. 이 경에서는 무아를 잘못 이해하면 허무주의에 빠져서 독사를 잡으려다 독사에 물리는 격이 되므로 무아를 아집을 버리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무아가 종국에는 버려야 할 방편이라고 해서 부처님이 무아가 아닌 어떤 진아(眞我)를 숨겨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우려하여 “그대들은 뗏목의 비유를 이해하여 마땅히 가르침들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가르침이 아닌 것은 유아론(有我論)입니다. 무아를 버린다고 유아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범부들은 무아가 아니면 유아라는 모순된 생각을 합니다. 이 모순된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중도입니다. 이 법문은 중도를 벗어나서는 바르게 이해될 수 없습니다. 중도에서 연기의 실상, 즉 공을 보아야 무아의 참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경은 반야사상의 모태라고 할 수 있으며, ‘금강경’의 토대가 됩니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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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1월18~22일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에서 열린 ‘이중표 교수의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강좌를 요약한 것입니다.

[1333호 / 2016년 3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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