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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랑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br]"불교명상에서 도덕적 원리의 의미-상"

계율 지키지 않는 명상수행으로는 자기 변화 이끌어내지 못해

▲ 이자랑 교수는 “선법을 습관화해 신구의 3업을 정화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야말로 계율의 본질이자, 계율이 수행의 기반으로서 제시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불교명상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명상센터가 많이 생기고 명상프로그램도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명상수행에 있어 도덕적 원리, 즉 계율(mor al restraints and rules of discipline)이 지니는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전반적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심신의 자유로운 경지를 추구하는 명상수행에 있어 심신을 옭아매는 계율은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 불도 수행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계율의 실천을 무시한 명상수행은 바퀴 하나가 빠진 채 달리는 삼륜차와 같습니다.

계는 자율적 성격 강하지만
율은 어길 경우 처벌 받아
계 정신 바탕으로 율 실천

계율 통해 생각·행동 교정
심신 습관 먼저 정비한다면
명상 효과 극대화 가능해져

계율은 자기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 등을 돌아보며 적극적으로 교정해가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을 거치지 않는다면 올바른 법에 근거한 실질적인 자기 변화는 이끌어내기 힘듭니다. 명상이 단순한 정신집중 놀이가 아닌, 심신의 치유와 긍정적인 자기 변화를 위한 정신 통일 및 지혜 계발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의 심신에 붙어 있는 습관을 먼저 체크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정비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계율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거나 혹은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형태로 명상 지도가 이루어지고, 또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면 명상 참여자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명상의 효과 역시 극대화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수행을 하는 데 있어 계(sīla)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명상 중에 놀라운 경험을 하고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여러 가지 다른 게임을 즐기는 것처럼, 위빠사나라는 게임을 즐겼기 때문에 여전히 동요하고 불행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패배자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진정으로 담마(dhamma, 法)를 사용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계율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현대를 대표하는 위빠사나 수행법 중 하나를 제시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인도 출신의 재가 명상 지도자 사트야 나라얀 고엔카(Satya Narayan Goenka, 1924~2013)의 말입니다. 고엔카는 철저한 계를 바탕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마지막으로 자애수행을 할 것을 강조합니다. 즉, 계정혜 삼학의 충실한 수행을 통해 자비의 마음을 기르는 것이 고엔카 수행의 핵심인 것입니다. 처음 수행에 참가하는 초보자는 10일 코스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들은 오계(五戒)를 실천하며 마음을 안정시킵니다. 경험자는 팔관재계(八關齋戒)를 실천하며 수행의 효과를 경험하게 합니다. 즉, 이 기간을 거치며 심신을 안정시킨 뒤 이를 기반으로 다음 집중 명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엔카가 지적하고 있듯이, 명상수행에서 계율이 지니는 의미에 무심한 사람들은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명상을 실행할 수 있는 올바른 심신의 여건을 갖추려는 노력 없이 이루어진 명상은, 고엔카의 말처럼 하나의 게임에 불과합니다. 명상수행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현재 자기가 느끼고 있는 여러 가지 심신의 문제를 해결하여 지금보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명상을 실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선행 혹은 병행해야 합니다. 즉, 계율의 실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결핍된 명상은 근본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나와 내 주변의 사람을 동시에 행복하게 만드는 명상수행이 아닌, 자기만족에서 그치는 그야말로 명상이라는 게임에서 이긴 ‘게임의 승리자’에 불과한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계를 기반으로 정과 혜를 닦는, 삼학을 중심으로 한 고엔카 수행법은 사실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율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 인해, 계율과 명상의 관계가 제대로 인식되어 오지 못한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팔리어 문헌을 중심으로 계율의 의의 및 계율과 명상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불교에 귀의한 출·재가자가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을 일반적으로 ‘계’ 혹은 ‘계율’이라고 말합니다. 이 중 계는 산스크리트어 실라(śīla, 팔리어로는 sīla)의 한역어입니다. ‘명상하다’ ‘실천하다’ ‘행동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동사어근에서 파생한 명사로, 원래 ‘성질’ ‘특징’ ‘습관’ ‘행위’등을 의미하는 말인데, 불교 용어로 사용될 때는 특히 ‘좋은 습관’ ‘좋은 특징’ ‘선한 행위’ ‘도덕적 행위’ 등을 의미합니다. 일반사회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도덕, 윤리에 해당합니다. 한편, 계율이란 계에 ‘율’이라는 말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용어입니다. 율은 ‘이끌다’ ‘제거하다’ ‘훈련하다’ ‘교육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어근에서 파생한 명사인 위나야(vinaya)의 한역입니다. 위나야는 ‘규칙’ ‘조복(調伏)’ ‘멸(滅)’의 의미를 지니는데, 세속의 법률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이른바 승가공동체의 규칙입니다. 따라서 계는 자율적인 성격이 강하며 어겨도 징벌 등을 받는 일은 없지만, 율은 어길 경우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명확한 차이를 갖는 계와 율이지만, 출가자의 경우에는 계와 율의 내용이 서로 겹치는 경우가 있는 등 양자가 혼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중국 등으로 불교가 전래된 후에는 ‘계율’이라는 용어로 불교도의 생활 규범을 총칭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은 아닐까 추정되고 있습니다.

계와 율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명확하지만, 율 역시 계의 정신을 바탕으로 할 때 실천 가능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즉, 규범을 지키고자 하는 자율적인 의지인 계 없이, 오로지 타율적으로만 율을 지킨다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에 들어오면서 계와 율이라는 용어의 차이가 희미해지고 계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계율이라고 하면 왠지 출가자에게만 해당되는 승가의 타율적인 규칙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율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분명 자율적인 계의 정신입니다.

같은 불교도라 해도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계율의 내용은 다릅니다. 먼저 재가자의 경우에는 오계와 팔관재계를 수지해야 하며, 출가자의 경우에는 비구 250개, 비구니 348개의 구족계가 포함됩니다. 한편 예비수행승으로 분류되는 사미·사미니는 10계, 식차마나는 6계를 수지해야 합니다. 각자의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계율의 내용은 다르지만, 이들이 도덕적·윤리적이고 자발적인 성격을 지니는 계에 근거해 실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계 혹은 계율은 수행에 있어 어떤 의의를 지니는 것일까요. 이 점과 관련해 ‘청정도론’ 제1장 ‘계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습관적으로 행한다(sīlana, 戒行)는 의미에서 계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습관적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집중이다. 신업(身業) 등이 계를 잘 지킴으로써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혹은 지탱이다. 제 선법(善法)의 확립에 의해 토대가 되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습관적으로 행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실라나(sīlana)라는 말을 계의 동의어로 제시한 후, 이어 실라나를 ‘집중’과 ‘지탱’이라는 두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중은 신구의(身口意) 3업이 계를 잘 지켜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를, 지탱은 계를 실천함으로써 모든 선법을 확립하여 수행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몸이나 입, 마음으로 올바른 행동·말·생각을 습관화함으로써 모든 선법을 확립하고 수행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 곧 계행이자 계인 것입니다.

계를 ‘습관적으로 행한다’는 의미의 실라나와 동의어로 보고, 이를 ‘집중’과 ‘지탱’이라는 두 가지 용어로 이해하는 태도는 12세기경에 비구 아난다(Ānanda)가 지은 ‘우빠사까자나랑까라(Upāsakajanālaṅkāra)’에서도 확인됩니다. 여기서는 재가불자의 신행도를 윤리적 생활의 확립과 종교적 실천이라는 두 가지 큰 주제 하에 다루고 있습니다. 즉, 삼귀의를 통해 올바른 믿음을 확립한 후 오계나 올바른 생활을 통해 윤리적 삶을 실현하고, 나아가 10복업사(福業事)를 짓고, 장애법을 제거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세간과 출세간의 행복을 초래하는 종교적 실천을 실행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오계 등을 수지하는 윤리적 삶은 본격적인 종교적 실천을 위한 기반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즉, 계율이란 몸과 입, 마음을 올바르게 단속하여 습관적으로 선법을 실행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수행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습관적으로 선법을 실행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계율의 실천이 지니는 또 하나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청정도론’에서는 ‘빠띠삼비다막가(Paṭisambhidamagga, 無礙解道)’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계란 무엇인가? 의지가 계이다. 부수적인 마음작용이 계이다. 율의(律儀)가 계이다. 범하지 않음이 계이다.’

계를 의지(cetanā), 부수적인 마음작용(cetasika), 율의(saṃvara), 범하지 않음(avītikkama)이라는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중 의지란 자발적으로 악을 떠나려는 강한 정신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살생 등의 악행으로부터 떠나려는 의지를 갖거나, 자신이 맡은 소임을 충실하게 잘 이행하려고 하는 의지 등을 말합니다. 한편, 부수적인 마음작용이란 살생 등을 떠나고자 하는 자의 절제입니다. 십선업도(十善業道) 가운데 의지는 살생 등을 버리고자 하는 3종의 신업과 4종의 구업, 즉 7가지 업도를 가리키는 한편 부수적인 마음작용은 ‘탐욕을 버리고 탐욕을 떠난 마음으로 머문다’고 하는 등의 방법으로 설해진 3종의 의업(意業), 즉 탐욕 없음[不貪], 성내지 않음[不瞋], 올바른 견해[正見]를 말한다고도 합니다. 한편, 율의는 율의 학처에 의해 자신의 행위가 규제되는 점을 말하며, 범하지 않음은 수지한 계를 몸으로나 입으로나 범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중에서 계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의지’, 즉 심리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행을 저질렀을 때 심리적으로 느끼게 되는 불안감은 악을 떠나거나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결심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이 ‘자발적인 의지’ 내지 ‘결심’이 곧 계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디가 니까야’에서 붓다는 ‘계를 갖추었다’는 말의 의미를 묻는 아자따삿뚜왕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왕이여, 여기에 비구는 살생을 버리고, 살생을 떠나 있다. 몽둥이를 버리고, 칼을 버리고, 안으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고, 자애가 있으며, 일체 생류유정에 대해 동정과 연민을 갖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계는 자발적으로 살생을 멈추고 살생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강제적이고 타율적인 외부의 조건에 의해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 스스로 살생을 멈추고자 하는 의지 하에 악행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악행을 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나아가 생물에 대한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심리적인 변화 내지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계율의 지속적인 실천은 불가능합니다. 선법을 습관화해 신구의 3업을 정화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야말로 계율의 본질이자, 계율이 수행의 기반으로서 제시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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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불교와사상의학연구회가 2월27일 동국대에서 개최한 ‘심신치유 프로토콜 구축을 위하여’ 주제 세미나에서 이자랑 교수의 발제를 요약한 것입니다.

[1334호 / 2016년 3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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