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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왕유의 시와 선 ①

기자명 명법 스님

교화 수단이었던 시, 선종의 영향에 내면세계로 침잠

▲ 명나라 후기 항성모, 왕유시의도(王維詩意圖)-12(책), 상해박물관 소장.

중국문화에서 시(詩)는 삼경(三經) 또는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는 중국문명의 근본을 제시하는 동시에 독서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며, 나아가 ‘다스림’, 곧 왕의 교화(敎化)를 실현하는 가장 탁월한 수단으로서 간주되어 왔다. 공자 역시 뜰을 거닐다가 만난 아들에게 시를 읽지 않으면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고 꾸지람을 할 정도로 시를 소중하게 여겼다. 시에 대한 이런 태도는 다른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화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로서, 예술이 인간의 삶과 사고에 미치는 영향력을 일찌감치 간파했던 중국인의 지혜를 보여준다.

시는 범인이 성인되는 수단
선종 영향으로 극적인 변화

이백과 두보 선종 영향받아
왕유, 선적 사유로 시불추앙

출사와 은거 자재했던 삶
후대 문인사대부에 큰 영향

내면 탐구 왕유의 시와 그림
새로운 차원 문화사조 열어

그러나 심성론의 측면에서 본다면 ‘시교(詩敎)’, 즉 시에 의한 교화는 인간의 본성이 여전히 불완전하며 시와 예악(禮樂) 등의 외적인 규제에 의해서 다스려짐으로써 완성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유가사상에서 시는 선한 마음을 확충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든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든 인간은 부단히 선의 네 가지 단초(四端)를 확충하고 넓힘으로써 범인으로부터 성인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던 점에서는 시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불교, 특히 선종의 등장은 이러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전복시켰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청정하다는 생각은 중국인들이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선종의 관점은 범인이 성인이 되기 위해 필요했던 일체의 외적인 규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주희가 “불교는 인륜을 이미 무너뜨렸고, 선불교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허다한 의리(義理)를 소멸시켜 남김이 없다”고 거세게 비판했을 정도로 선불교의 입장은 중국고대사상의 체계를 뒤엎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변화는 심성론에만 그치지 않고 시의 창작에도 미쳤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선하든 그렇지 않든 그 본성을 다스리고 선을 완성하는데 시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던 유가에서 시는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지향했다. 이제 인간의 본성이 원래부터 청정하다면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시가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선종과 더불어 교화의 수단이었던 시 역시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원이 희곡의 시대이고 명이 소설의 시대라면 당은 단연코 시의 시대이다. 당대에 왕유, 맹호연, 이백, 두보, 유종원, 백거이, 한유 등 수많은 시인들이 출현하여 오언과 칠언의 절구와 율시, 그리고 근체시 등 중국 시의 형식을 완성했다. 초당, 성당, 중당, 만당에 걸쳐 이 시대는 시가 가장 활발하게 창작되었던 시대였다.

또한 당은 선의 황금시대였다. ‘동산법문’이 일어나고 육조의 남종선이 출현했으며 신회의 ‘육조선양운동’이 중앙정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의 변화에 가장 앞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인들은 선종의 출현에 적극적으로 반응했으며 수많은 시인들이 개인적인 신앙이나 또는 불행 때문에 선사들을 만나고 그들의 가르침을 경청했다. 그 중 일부는 직접 선을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당시(唐詩)의 번영은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전통적인 시론이 주장하는 바대로 “시가 뜻을 표현하는 것(詩言志)”이든 “시가 정을 일으키는 것(詩緣情)”이든 시가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언어인 이상 선불교가 가져온 심성론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와 선은 암암리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중국문화 전반에 큰 반향을 남겼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시선(詩仙)인 이백도, 시성(詩聖)인 두보도 선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선이 그들의 시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이번 연재에서는 왕유의 시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선적 사유, 즉 인간의 본성이 청정하며 본래 깨달아 있다는 사유가 시에 준 영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은 역시 왕유이다. 시불(詩佛)로 불리는 왕유(王維, 699~759)는 선으로 시를 쓴(以禪諭詩) 시인으로 유명하다. 왕유의 소년기는 동산법문이 널리 퍼지던 시기였으며 그는 어머니의 영향 아래에서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불자로 자랐으며 일생 내내 선종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왕유는 당시 서로 세력을 다투었던 북종과 남종의 선을 모두 접촉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년에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북종선의 선사들과 교유했는데, 왕유의 어머니 최씨가 귀의했던 대조보적 선사는 신수의 제자로서 신룡 2년(706년) 신수가 입적한 후 북종선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 때 왕유의 나이가 7세였다.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새로운 시대적 조류와 접촉했다고 할 수 있다. 왕유의 동생 왕진 역시 대조보적 선사의 제자인 광덕 선사와 교유했으며 염불을 익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벼슬에 나아간 후 사귀었던 주변 인물들 역시 당시 유행했던 동산법문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왕유는 개원3년(15세)에 장안으로 와서, 개원9년(21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개원16년(28세)에 기상(淇上)에서 관직을 버리고 은퇴하여 약 7년간 기상(淇上)·장안(長安)·숭산(崇山)에서 보냈다. 개원23년(35세)에 재상 장구령(張九齡)의 추천으로 우습유에 배수되어 관직에 나아갔으나, 이임보가 득세하게 됨에 따라 장구령이 폄적되고 왕유 역시 정치에 대한 실의로 개원29년(41세)에 종남산에서 약 1년 간 은거했다. 왕유는 개원 연간에 많은 문인들과 접촉했던 신수 문인 의복·혜복과도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보원년(742)에 좌보궐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재개하나 천보3년(744)부터 남전 망천에 별장을 짓고 반관반은(半官半隱)생활을 한다. 이러한 생활은 천보15년(756) 안록산의 난으로 장안(長安)이 점령될 때까지 계속된다.

왕유와 선사의 교류 중 특별히 주목할 것은 신회와의 만남이다. 왕유와 신화는 정기적으로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회는 개원 연간 남양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전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신회록’에는 왕유가 남양에서 신회에게 법을 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왕유는 시어사라는 관직에 있었으며 남양을 지나는 도중에 신회를 우연히 만난 것은 신회의 행적과 일치한다. 왕유는 그 후 신회의 부탁으로 ‘능선사비’를 지었으며 신회와의 만남을 통해 남종선에 심취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유는 안록산(安祿山)의 난 동안에 반군이 내려준 벼슬을 받았다는 죄로 중벌을 받게 되었으나 사면되고 사망할 때까지 관직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예전과 같이 편안한 마음으로 산수 간에 노닐며 자연미와 은일의 정취를 읊을 수 있는 심리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산수시의 창작은 드물어진다.

그가 취했던 중은(中隱)의 삶은 후대의 문인 사대부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는데, 왕유의 생애 중 은거 시기는 20여년이나 되지만 산수시를 왕성하게 창작한 기간은 기상(淇上)·숭산(崇山) 은거시기(728~735)와 종남산 은거시기(741~742), 망천 은거시기(750~756)의 약 14년 동안이다. 송대의 장계(張戒)가 “왕유는 심정이 담박하고, 본래 불학(佛學)을 비우고 또 그림을 잘 그려서, 세상에 나와서는 기왕(岐王) 설왕(薛王) 등 여러 왕이나 귀족들과 놀고, 산림으로 돌아가서는 망천의 경치를 실컷 즐겼으니, 그의 시는 부귀와 산림에 있어서 모두 그 흥취를 얻었다(歲寒堂詩話 권 上)라고 하여 세속생활과 산림생활 모두 흡족하게 지낸 것을 말하고 있다.

왕유는 “일생 동안 여러 차례 상심하는 일이 있었지만, 불교가 있어 어린 시절을 잘 보낼 수 있었다”고 고백했듯이 그의 일생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불교로부터 위안을 얻었으며 40세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참선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안록산의 난을 겪은 후, 그의 세상에 대한 관심은 더욱 담박해졌고 불교에 철저하게 귀의해 생활했다. ‘구당서’ 본전에 따르면 죽기 전 3~4년 간 “경사(京師)에서 날마다 십수 명 승려들을 공양하며 현담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서재 중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차 솥, 약 절구, 불경 책상, 새끼로 얽은 침상뿐이었다. 퇴조(退朝)한 후에 분향하고 홀로 앉아 참선과 독경을 일삼았다”라고 한다.

소식은 왕유가 은거와 참선을 통해 내면으로 침잠했던 세월에 대해 “왕유의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는 시가 있다”고 평가했다. 소식이 찬탄했던 것처럼 왕유는 산수시와 산수화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37호 / 2016년 3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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