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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카슈미르-⑥ 체납 강변의 암바란 불교승원터

기자명 권오민

체납 강변에 자리한 2000년 전 고대 사찰엔 작은 스투파 뿐

▲ 아크누르 인근 암바란 불교승원터. 지리상 아크누르는 간다라에서 탁실라를 거쳐 인도중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계획된 일정이 있으니 아쉬움이 있어도 이제 카슈미르를 떠나야 한다. 우라샤(오늘날 파키스탄 동부 하자르 지방)에서 피르판잘 산맥을 넘는 서쪽 관문(바라물라)을 통해 카슈미르에 들어온 현장법사의 다음 행선지는 탁카국의 샤카라(오늘날 파키스탄의 시알코트)로, 그는 파르노차(푼치)와 라자오리(라자푸라)를 거쳐 그곳에 이르고 있다.

아크누르 암바란 불교유적지는
영국미술사학자에 의해 알려져
1999∼2001년 사이 두 차례 발굴
쿠샨 이전부터 굽타 이후 시대에
걸친 네 시기의 유물과 유구 확인

중현이 세친과 대론 펼치기 위해
가는 길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

그러나 오늘날 스리나가르에서 푼치로는 직접 갈 수도 없을뿐더러 그곳은 파키스탄과의 최 접경도시로 외국인이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한 달 후 거기서 양국 사이에 일주일 동안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우리가 샤카라로 가기 위해서는 오늘날 지도상으로 일단 잠무를 거쳐 암리차르로 가 거기서 인도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라호르로 가야 한다.

▲ 승원 앞을 흘러가는 체납(혹은 찬드라바가) 강.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법사는 카슈미르에서 파르노차(지금의 푼치)와 라자오리(라자푸라)를 거쳐 찬드라바가 강을 건너 샤카라(오늘날 파키스탄의 시알코트)로 들어간다.

스리나가르에서 잠무로 가는 길은 여전히 험난하였다. 아침 7시30분, 승객이 다 차기를 기다려 출발한 버스는 엊그제 갔던 아반티포라의 두 곳 힌두사원을 지나 아난타그 근처 길가 휴게소에서 잠시 쉰 다음 피르판잘의 해발 2500m 산자락을 타고 올라 한 때 아시아에서 제일 높고 긴 터널이었다는 자와하르 터널을 지나고, 다시 또 오르내리기를 수십 번, 천 길 낭떠러지 체납 강의 깊은 골짝을 돌고 돈 끝에 비로소 잠무에 도착하였다. 출발할 때는 스리나가르의 매일 아침이 그러하였듯 부슬비가 내리려하였지만, 이내 따가운 땡볕이 내리쬐었고, 그러다 문득 깊은 골짝에서 찬바람을 타고 올라온 구름안개에 길이 막히기도 하였고, 칠흑 같은 먹구름이 몰고 온 장대비가 강 건너편 산자락에 천길 폭포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잠무 역전에 도착하였을 때는 다시 폭염의 여름이었다. 잠무&카슈미르 주 정부에서 운영하는 직통버스였음에도 260㎞, 11시간이 걸렸다.

잠무는 ‘사원의 도시’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터미널도 거리도 호텔도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럼에도 인도여행 가이드북에서는 이곳의 볼거리를 거의 소개하지 않으며, 여행객 또한 다만 스리나가르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 정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잠무는 식민지 시절(1947년 이전)에는 불과 40㎞ 떨어진 시알코트를 거쳐 라호르나 페샤와르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관문 역할을 하였던 곳임을 이번 답사여행을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다.

잠무 근교에는 카슈미르와 판잡을 이어주는 매우 오래된 고대도시 아크누르가 있다. 이 도시는 하랍파(인더스) 문명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잠무 북서쪽 28㎞, 체납 강변에 위치한다. 이 강은 50㎞를 더 흘러 그 옛날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의 메난드로스(인도이름은 밀린다) 왕이 불교장로 나가세나와 대론하였던 샤카라, 시알코트에 이르고, 여기서 마침내 판잡(panj-ab, 五河) 즉 젤룸(Jhelum), 체납(Chenab), 라비(Ravi), 수트레즈(Sutlej) 그리고 베아스(Beas)의 하나가 된다. (판잡의 다섯 강은 판잡 남부 미탄코트라는 곳에서 다시 인더스 강과 합류하여 아라비아 해로 흘러 들어간다.)

▲ 스리나가르에서 잠무에 이르는 공로변의 한 마을.

아크누르 인근의 작은 마을인 암바란에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6세기에 걸쳐 존속하였던 불교승원터가 있다. 현장에 따르면 세친은 ‘구사론’을 저술한 후 샤카라에 머물고 있었고, 세친과의 대론을 위해 그곳으로 가던 중현은 마티푸르(오늘날 하르드와르)에서 분사(憤死)하였다고 하였으니(6회 참조), 갔다면 필경 이 지역을 거쳐 갔으리라.

일단 아크누르로 가야했다. 그곳으로 가는 교통편을 전혀 알지 못하였기에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잠무 버스터미널로 가 타고 간 오토릭샤 운전수에서 아크누르 행 버스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수많은 버스가 뒤엉켜 있고, 행선지가 현지어(우르두어)로만 쓰여 있을 때는 이 방법이 제일 유효하다.

버스는 터미널 입구에 서 있었다. 막 출발하려는 것 같았다. 짐 보관소에 배낭을 맡기고 길가 노점에서 파는 오믈렛을 신문지에 싸들고 숨 가쁘게 차에 올랐다. 거의 빈 차로 출발하였지만, 잠무를 벗어날 즈음 버스는 만원이 되었다. 등교 길이나 출근길의 승객 같아 보였다. 창밖에 스쳐 지나는 구릉과 평원의 들녘을 바라보며 신문지가 묻어나는 오믈렛을 먹었다. 산악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문득 길가 미루나무 가로수 사이에 박혀있는 ‘푼치 140㎞’라고 쓰인 작은 시멘트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아! 이 길이 푼치로 이어지는구나.

지도상으로 아크누르는 잠무에서 라자오리를 거쳐 푼치에 이르는 국도 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푼치의 바플리즈(Bafliz)―쇼피안(Shopian)을 통해 스리나가르(카슈미르)에 이르는, 무갈로드(Mughal road)로 일컬어지는 이 길은 세상에서 가장 험준한 길 중의 하나이자 역사적으로도 매우 오래된 길로, 현재의 길은 무굴 제국의 자항기르 황제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황제는 그가 지상의 낙원이라 여겼던 카슈미르의 샬리마르 별궁으로 갈 때면 이 길을 이용하였고, 그로부터 대략 1000년 전의 현장도, 그리고 다시 300여년 전의 세친도 이 길을 지났으리라. 언젠가 이 길을 통해 카슈미르로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지상의 낙원에 이르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도 험준한 길이 어쩌다 증오의 땅이 되었을까?

체납 강이 보일 즈음 입석의 승객은 거의 다 내렸고, 버스가 다리를 건넌 순간 암바란 불교유적지를 가리키는 낡은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스톱!’ 굳이 시내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아크누르에서 1.5㎞ 못 미친 지점이었다. 철교를 지키는 군인에게 물었다. 암바란 승원터까지는 얼마나 걸리느냐고. 1㎞에 10분이 걸린다고 하였다. 체납 강은 아침 안개가 두텁게 덮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마무시하다고 느낄 정도의 굉음만을 내고 있었다. 안개 밑에서 요동치며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더위에 지칠 만큼 걸었을 때 갈림길이 나타났고 다시 표지판이 서 있었다. 강 쪽으로 조금 내려가 커브를 돌자 저 멀리 유적지가 보였다. 바로 강에 인접해 있었다.

200∼300여 평 남짓 부지에 철망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문이 잠겨 있었다. 철망 사이로 보인 유적지는 매우 협소해 보였다. 여섯 구의 작은 스투파와 좀 더 큰 스투파가 전부였다. 아마도 작은 스투파가 모여 있던 승원의 일부분일 것이다. 간다라의 탁티바히나 자말가리 승원에도 저렇듯 작은 스투파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철망 사이를 기웃거리다 지나가는 마을사람에게 들어가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가 알렸던지 얼마 후 관리인인 듯한 이가 열쇠를 갖고 와 열어 주었다.

이 유적지는 1999∼2000년, 2000∼2001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다고 한다. 발굴 결과 쿠샨 이전 시기(대략 기원전 2∼1세기), 쿠샨 시기(대략 1∼3세기), 굽타 시기(대략 4∼5세기), 굽타 이후 시기(대략 6∼7세기)에 걸친 네 시기의 유물이나 유구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경내 가건물에는 발굴당시의 사진과 중앙 스투파의 미니어처, 동전, 생활용구, 테라코타 파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달라이라마 방문 사진도 걸려 있었다. 다람살라는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그렇지만 이곳과 티베트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거리가 있다. 그분은 이 고대의 불교승원 터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 암바란 출토 테라코타 두상(왼쪽 3구 라호르박물관, 오른쪽 1구 잠무박물관 소장)

암바란의 불교 유적지는 이미 1930년대 찰즈 파브리(Charles Louis Fabri, 1899∼1968)라는 영국의 미술사학자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당시 라호르 박물관 큐레이터였던 그는 박물관 한쪽 구석에 방치된 부처 두상(頭像)과 여인 흉상의 테라코타가 담긴 바구니를 발견하였다. 그는 이것의 출처를 찾기로 마음먹고 카슈미르의 바라물라, 스리나가르, 하르완, 잠무의 아크누르 등 여러 지역을 여행 조사하여 마침내 체납 강의 평원이 펼쳐지는 암바란 마을 아래 팜바르완에서 그것의 기원을 확인하였다. 거기서 발견한 부처와 여인의 테라코타 두상의 양식이 박물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후 전 세계 박물관에 전시된 이러한 양식의 불두 등을 ‘아크누르 테라코타’라는 이름으로 호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안개가 점차 걷히고 있었다. 강물은 매우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히말라야 고원으로부터 수백 ㎞를 숨 가쁘게 흘러내려 왔으니 어찌 한가로울 수 있을 것인가. 체납(혹은 찬드라바가) 강은 마날리에서 라다크의 레(Leh)로 가는 공로(公路) 상의 바라-라차 고개(Baralacha La)에서 발원한다.

체납 강의 한 지류인 바가(Bhaga) 강은 수라스탈 호수에서 발원하고 다른 한 지류인 찬드라(Chandra) 강 역시 이 지역 빙하에서 발원한다. 전설에 의하면 달의 딸인 찬드라와 태양의 아들인 바가는 영원한 결혼을 하기 위해 해발 4892m의 바라-라차 고개에 올라 서로 반대편으로 내 달린다. 그러다 탄디(Tandi)에서 만나 영원히 결혼하고, 거기서 히말라야를 서쪽으로 관통하여 키슈트와르를 거쳐 아크누르에 이르러 비로소 평지를 만나게 되었지만, 아직은 히말라야의 기운이 남았으니 한가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강은 조만간 판잡의 대평원에 이르면 바다처럼 펼쳐져 유유히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곳에 고대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의 수도 샤카라, 시알코트가 있다.

그 옛날 2000년 전, 이 승원에 머물던 이들도 스투파 사이를 거닐며 안개에 덮힌 저 강을 보고 요동치며 흘러가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문득 헤르만 헷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 유적지 내 가건물에 전시된 스투파 미니어처.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진실’로의 구도 여정을 걸었던 주인공 싯다르타는 마침내 강가에 이르러 깨달음으로의 열망과 세속의 환락에서 다시 깨어난다. 그는 과거 깨달음의 숲에서 그 강을 건너 세속으로 들어왔고 세속에 환멸하며 다시 그 강을 건넌다. 그는 이제 그의 구도의 여행을 늙은 뱃사공 바수데바와 함께 강가에서 마무리 짓기로 한다. 그는 거기서 숲과 마을에서 보고 들었던 온갖 형상과 소리를 보고 듣는다.
“싯다르타는 귀를 기울였다. 그도 뱃사공 바수데바처럼 이제는 완전히 듣는 사람이 되었으며, 듣는 일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무아의 경지에서 그 무엇인가를 빨아들이며, 듣는 일에 심취하였다. 그리하여 자신도 듣는 일을 완전히 체득하였다고 느꼈다.

그 때까지 그 모든 소리, 강물이 내는 수많은 소리를 들어왔으나 그 울림은 전혀 달랐다. 그는 이미 그 많은 소리들을 하나하나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기쁨의 소리와 통곡의 소리, 어린이의 소리와 어른의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혼합되었으며, 그리움의 비탄과 지자(智者)의 웃음소리, 분노의 울부짖음과 임종의 신음소리, 그 모든 소리가 하나가 되어 서로 얽히고 설켜 수천 가지로 짜여졌다. 그 모든 것이 합쳐지고 일체의 소리, 일체의 목표,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괴로움,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것이 생성의 강물이며, 생의 음악이었다. 그리고 싯다르타가 그 강물 소리를 주의 깊게 들을 때, 고통의 소리와 웃음의 소리를 구분하여 듣지 않을 때, 그의 영혼이 그 어느 한 소리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아를 어느 한 소리에 몰입함이 없이 그 모든 소리를, 그 전체를, 그 통일체를 들을 때 비로소 천만가지 소리의 그 위대한 노래가 단 한마디 ‘오옴’, 완성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홍경우 옮김 범우사)

이곳이 그곳이었을까? 그 옛날 이곳 암바란의 승원에 머물던 이들도 요동치며 흘러가는 저 체납 강에서 세상의 온갖 형상과 소리를 보고 들었을까?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37호 / 2016년 3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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