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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숲의 역사와 가치’-전영우 국민대 교수

신성하게 여겨지던 숲 적극 수용함으로써 한반도에 불교 정착

▲ 전영우 교수는 “우리나라는 숲을 신성시해 왔으며 외래종교인 불교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사찰이 보유한 숲의 규모는 대한민국 산림의 1%를 차지합니다. 국립공원의 8.3%, 도립공원의 15.5%, 군립공원의 13.6%가 사찰숲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큰 불교 종단인 조계종 재산의 97%가 산림이며, 100만평 이상의 산림을 보유한 사찰도 57곳이나 됩니다. 조계종이 보유한 산림의 공익적 가치만 1조8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종단도 사찰도 무관심하기만 합니다.

‘삼국유사’에 천경림·신유림
전불시대의 가람터로 언급
불교 수용과정에 있던 신라
토속신앙과 갈등 해소 목적

신라, 사찰 창건 시 숲 하사
독점적 권한과 활용 보장해

이 같은 현상은 불교계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도 가서 즐기고 누리려고만 할 뿐 숲이 가지는 의미와 앞선 세대가 어떻게 지켜왔고, 후대에 어떻게 물려주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교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0여년 전 제가 사찰숲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사찰숲은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만들어졌고, 지난 수백·수천년 동안 어떻게 이용돼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동안 연구한 내용을 여러분과 이 자리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지난해 법보신문을 통해 관련 내용을 1년간 연재했습니다. 그 결과 그동안 무관심했던 조계종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올해 새로 주지가 되려는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강좌가 개설됐습니다. 사찰숲은 불교가 가진 엄청난 보물이며 무한히 활용 가능한 자산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은 불교와 숲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고려대장경을 보면 불교 또는 부처님과 관련된 나무의 이름이 16종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무우수, 보리수, 사라수와 같이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은 들어봤을 나무도 있고, 부르는 것조차 생소한 다양한 수종들이 한자로 표기돼 있습니다. 부처님은 무우수 아래에서 태어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사라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만큼 불교와 나무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앞선 나무와 관련되어 경전에는 ‘룸비니동산’ ‘기원정사’ ‘죽림정사’ ‘녹야원’ 등의 명칭이 나옵니다. 여기서 ‘동산’ ‘원’ ‘림’은 모두 숲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활동했던 인도의 지역적·기후적 특징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숲은 그늘을 제공하고 비를 피하고 쉴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 주는 공간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의 안거장소는 숲이었습니다. 이에 숲은 곧 절이 됐고, 가람이 됐으며, 수행처인 신성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찰숲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사찰림의 기원에 얽힌 해답의 실마리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천경림(天鏡林)과 신유림(神遊林)으로 풀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천경림과 신유림을 경주에 있던 전불(前佛)시대 7곳의 가람터(七處伽藍之虛) 중 첫 번째와 여섯 번째 절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숲이 사찰’이었음을 나타내는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전불시대 7곳의 가람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학계에서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의 불교 수용과정에 발생했던 토속신앙과 외래종교 간 갈등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불교는 당시 외래종교였습니다. 외래종교가 이 땅에 정착하기 위해선 토속신앙을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가 토속신앙을 수용한 흔적은 신중탱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중탱화에서는 옛 조상들이 숭배했던 산, 물, 바람, 나무, 땅 그리고 다양한 자연물들이 신의 지위를 받아 불교를 수호합니다. 특히 산신각에는 산신과 호랑이 그리고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습니다. 소나무가 가람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호랑이와 같이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전문적으로 설명한다면 석가모니의 탄생 이전부터 신라 땅은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불국토였으며, 석가모니 이전에 존재했던 일곱 부처의 절터도 이미 있었다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토속신앙과의 충돌을 줄이려는 목적입니다. ‘하늘을 비추는 숲’인 천경림과 ‘신들이 노니는 숲’인 신유림은 그 이름처럼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을 상징하는 고대신앙의 성지이자 토속신앙의 성소였을 것입니다. 천신이 내려와 지신과 결합한 장소로서 신성하게 여기던 숲을 전불시대의 가람 터라고 직시한 이유는 외래종교인 불교의 원활한 정착을 도모하기 위한 종교적 목적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의문은 남습니다. 왜 하필이면 숲이었을까요? 그 답은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경주의 계림과 나정숲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계림은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탄강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숲이고, 나정숲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녹아 있는 숲입니다. 한 씨족이나 한 부족의 근원으로 이들 숲을 언급한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이 성지(聖地)나 성소(聖所)로 여겼던 신성한 숲을 언급함으로써 신성도 함께 부여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고대 인류는 나무와 숲을 천지창조의 근원인 ‘우주수’,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세계수’로 숭배했고, 우리 역시 오늘날까지 서낭나무, 당산나무, 솟대와 같은 신수숭배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비롯해 고대 인류에게 나무는 신성 그 자체였습니다. 지구상 살아있는 생명체 가운데 가장 오래 사는 것이 나무입니다. 최대 5000년까지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떠한 생명체보다 덩치가 큽니다. 뿐만 아니라 봄이면 싹을 틔우고, 여름이면 열매를 맺어, 가을이면 결실을 줍니다. 이것은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는 변하지 않는 우주적 리듬의 재현입니다. 여기에 1000년, 2000년이 지나도 종자를 생성해 내고, 가지만 꺾어 꽂아놓아도 재생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구한 수명, 거대한 덩치, 우주적 리듬의 재현, 다산성, 재생성은 다른 생명체에는 없는 나무만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나무는 인류의 생존을 위한 의존의 대상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다시 신성한 신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신성한 수목을 수용했다는 흔적은 절집 지팡이 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승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나무가 됐다는 설화는 우리 조상들이 나무를 얼마나 숭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종류도 이팝나무, 은행나무, 느릅나무, 주목, 소나무, 전나무, 단풍나무 등 다양합니다. 이 같은 내용은 일본, 중국, 이탈리아에서도 발견되는 등 다양한 종교에서 나무의 신성성을 적극 차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토속신앙을 수용한 것은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의 기록을 보면 부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무우수는 인도인들이 숭배했던 나무입니다. 경전에 따르면 마야부인이 산기를 느끼자 무우수가 가지를 내려주었고, 마야부인은 그 가지를 붙잡고 선 채로 싯다르타를 출산했다고 합니다. 상징의 이입입니다. 불교가 오래 전부터 인도인들이 숭배했던 무우수를 차용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유럽 역시 오래된 성당에는 참나무 잎사귀로 된 그린맨들이 부조돼 있고, 성서에도 아담과 이브이야기에 나무가 등장합니다.

다시 천경림과 신유림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천경림과 신유림은 경주라는 도읍에서 시작됐는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사찰숲은 산중에 있습니다. 도읍에 있던 사찰이 언제 산중으로 가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사찰숲은 언제부터 조성된 것일까요? 사찰의 창건 장소는 시대에 따라 삼국시대에는 도읍, 통일신라시대에는 구릉이었고, 산중으로 이동한 것은 나말여초부터입니다. 이는 신라 말 도입된 선종(禪宗)과 풍수지리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찰이 숲을 소유하게 된 근거는 무엇일까? ‘삼국유사’에 ‘효명이 왕이 된 후 진효원(오늘날 상원사)을 개창하고 절에 필요한 논과 땔감숲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 땔감숲, ‘시지(柴地)’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진여원의 기록을 통해 1300여년 전 국가는 사찰을 창건할 때 사찰 운영에 필요한 식량은 물론이고 땔감 조달용 산림도 함께 하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1920년대 작성된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산림부에는 “절을 창건할 때 땅을 나누어받는 것은 신라 때부터 존숭되어 온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한정된 내용이지만 이들 기록을 통해 사찰숲(柴地)도 전답과 마찬가지로 창건과 함께 삼국시대부터 국가에서 하사받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상원사를 말사로 거느리고 있는 월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사찰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5782ha, 1734만평, 여의도의 약 20배, 축구장 7700개의 엄청난 규모입니다. 시지에 대한 기록은 진효원뿐일까요? 신라와 고려는 물론 불교를 핍박했던 조선시대에도 시지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조선의 ‘태종실록’ ‘승정원일기’ 등에서 확인됩니다. 100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는 팔리고, 일부는 농지로 바뀌고, 일부는 길이 되기도 했지만 사찰숲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지켜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찰들이 숲에 대해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전통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실제 사찰숲은 백성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독점적 권한과 배타적 활용이 보장됐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산지 주변의 모든 땅들은 직간접적으로 사찰의 지배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 세월이 흐르고 사세가 커지자 국가가 하사한 시지를 넘어 지금의 규모로 그 영역을 확장시켰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와 관련한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그렇게 추정할 뿐입니다. 조선 ‘명종실록’에는 서울 봉은사 시지와 관련한 기록이 있습니다. 봉은사 시지가 양주에서 현재 서울 월계동에 이르러 일반 백성의 불편이 많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는 내용입니다. 봉은사 시지가 처음부터 그렇게 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한국의 사찰숲은 시지에서 시작됐고, 그 근원은 숲이 곧 사찰이었다는 겁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숲을 신성시해 왔으며, 외래종교인 불교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정리=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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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전영우 교수가 3월22일 서울 북성재에서 열린 허원북스 화요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전 교수는 이날 강의를 시작으로 4월26일, 5월24일, 6월28일, 7월26일, 8월23일 ‘사찰숲’을 주제로 강의합니다.


[1337호 / 2016년 3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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