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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은 인간 존엄에 대한 범죄

기자명 이중남

3월21일은 유엔이 정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다. 1960년 3월21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샤프빌이란 곳에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반대하는 집회를 벌이다 경찰의 발포로 희생된 69명을 기리는 뜻이 들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에 이주해 살던 영국과 네덜란드 출신 백인과 그 후손들이 나치의 우생학에 영감을 받아 1940년대에 고안해 낸 악랄한 인종분리 체계였다. 오랜 세월 섞여 살던 사람들을 인종에 따라 백인 대 그 나머지(원주민과 혼혈)로 양분한 뒤, 전체 인구의 4분의 3에 달하는 ‘그 나머지’를 국토 면적 13% 정도의 지역에 몰아 가두고, 인간으로서 누릴 기본권마저 박탈해 버렸다. 백인이 열등한 인종들과 섞여 지내다가 자칫 생물학적 퇴행에 빠지는 것을 방지한다는 취지였다.

대략 20만년 전 지구상에 출현한 우리 인류는 생김새도 다양하고 문화와 기후에 따라 사는 방식도 천차만별이지만 분류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일한 종에 속한다. 그런데 이른바 대항해시대 이후 식민지 획득에 몰두하던 서구인들은 우리 사피엔스를 생물학적으로 구별되는 몇 가지 아종(亞種, 즉 복수의 인종들)으로 나눌 수 있다는 신념을 유포했다. 이 신념은 유용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만인평등의 교리는 서구인에게만 해당되므로 식민지 원주민이나 흑인 노예에게 가하는 만행에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처럼 필요에 의해 탄생한 ‘인종’과 인종주의는 19세기에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체계화되었고, 20세기 전반 이른바 ‘과학적 인종주의’와 나치의 우생학 운동으로 정점에 달했다.

인종주의는 막연한 억측에 터 잡았다. 역사와 문화를 같이하고 생김새가 비슷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유전자도 서로 비슷하리라는 짐작, 피부색은 단순히 멜라닌 색소 유전자만이 아니라 지능과 문화, 사회적 특성을 결정하는 유전자와도 관련되리라는 짐작, 특정한 종교(특히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으리라는 짐작. 지난 세기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룬 유전과학은 세기말 즈음에 이 모든 가정들이 과학적 근거를 결하고 있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인종주의의 무서움은 일단 다른 인종으로 낙인찍힌 집단은 동료 사피엔스가 아닌 것처럼 취급된다는 데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인류 스스로에 대한 범죄로 평가 받고 그 전범들이 오늘날까지도 추적·처벌 받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 자체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인종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특히나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금기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그렇지만 홀로코스트를 통해 알 수 있듯 피부색만이 인종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인종차별금지법이 없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정기심사 때마다 우리 정부에 인종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데, 정부는 우리나라에 인종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런 법이 필요 없다는 답변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외국인 정책 관련한 법규, 특히 영주권·국적 심사나 체류자격 관련한 법집행을 할 때 출신국에 따른 차별은 엄연히 존재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제3세계 출신 단순노동인력이나 결혼이주 여성들이 잠재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국적을 빙자한 인종차별이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우월한 서구 백인 대 열등한 제3세계 유색인종이라는 적나라한 인종주의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한때 모 방송사에서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오래 진행된 프로그램이고 출연진도 많았지만, 그 가운데 ‘멜라닌 색소가 풍부한’ 미녀는 몇 되지 않았다.

이중남 젊은부처들 정책실장 dogak@daum.net

[1338호 / 2016년 4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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