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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의상 석장

흔한 돌에 새겨진 결 따라 흐르는 천년 풍화 견딜 무영탑 쌓다

▲ 이의상 석장은 ‘돌쟁이’로서 만 50년을 살았다.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리는 석가탑 인생이다. 그는 천년 풍화를 견디며 서 있는 탑을 복원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자처한다.

“기가 막히네.”

흔해 빠졌다. 지천에 널린 게 돌이다. 돌 다듬고 올려 탑을 조성하고 성곽을 쌓았다. 지혜는 모진 비바람 따가운 햇살 견디며 천년을 영글었다. 오랜 담장이나 성곽, 축대를 손바닥으로 쓸어보는 이의상(75) 석장의 감탄사는 매번 같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지정
석구조물 분야 국내 1호 장인

대장간에서 석공 연장 벼리다
17세에 스승 이재만 인연 닿아
3년 무보수 숙식하며 일 배워
연장 한 벌 받고 만 50년 외길
돈화문 시작으로 문화재 복원

문화재 생명 잇는 숨은 노력
탑 그림자처럼 함께해온 역사
전수관 조성해 기능 명맥 계승

“이야~, 이런 지혜가 어디서 나왔을까.”

감탄사에는 경외심이 짙게 배었다. 반세기를 ‘돌쟁이’로 살아왔지만 아직 부족함을 느낄 뿐이다. 50년 동안 쉬지 않고 돌만 보고 걸었다. 세계문화유산부터 국보 1호까지 그의 손길을 거쳤다. 하지만 지금이 더 어렵다.

“선조들 지혜를 엿보면서 겸손해지더라고. 젊은 혈기로 일했던 과거와 달라. 항상 조심스러워.”

운명은 재료와 씨앗을 제공해줄 뿐이다. 열매는 스스로의 몫이었다. 1942년 일본 나라현에서 태어난 아이는 광복 이듬해 귀국, 전주에서 살다 처음 돈벌이를 시작했다. 먹고 살아갈 일이 드물었던 때였다. 한국전쟁은 피바람을 몰고 왔다. 나라는 반으로 갈렸고 국토와 살아남은 사람들 마음엔 폐허만 남았다. 목구멍에 밥 한 술 넘기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배고픔이 잠을 쫓아내면 밤하늘 달빛이 서러웠다. 볼이 움푹 파인 밥 그릇 같은 달도 저녁을 굶었을까. 배고픈 달은 밤새 달그락거렸다. 가세도 기울어 초등학교 3학년 무렵 학교를 관둬야 했다. 동네 어른 소개로 열다섯 소년은 대장간에 몸을 의탁했다. 당시 대동공업사 직영 대장간에서 풀무질하는 허드레꾼으로 취직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저수지 공사를 하는 회사였고 직영 대장간은 자연 석공들 연장을 다뤘다.

물가에 있으니 발은 저절로 젖었다. 전주 부근에 큰 저수지 공사가 있었다.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석공들이 직접 돌 깨고 쌓다보니 연장은 쉽게 무뎌졌고 대장간에서 연장을 벼렸다. 대장간을 찾던 석공들 중 공사 석공책임자로 있던 이재만(훗날 스승)은 소년을 눈여겨봤다. 어린 것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으리라. 석공 일을 권했다.

“배가 고팠어. 그래서 배운 일이야. 그저 묵묵히 이 길을 걷다 보니 기술도 지혜도 쌓이면서 석장이 됐어. 대장간에서 석공들이 연장 고치러 오면 잘 봐뒀지. 대장간에서 일을 가르치는 스승이 밥 먹으러 가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연장들을 벼려봤어. 혼자 연장도 직접 만들기도 했다니까. 나중에 석공들이 오면 연장 고쳐주곤 했어. 연장을 벼리고 만드는 기술이 있으니 석공 일이 남들보단 빨리 늘었던 거지.”

1년6개월이 걸렸다. 그는 이재만 선생을 따라 나서기로 결심했다. 석조건축현장이 삶의 터전이 되는 순간이었다. 1958년, ‘돌쟁이 이의상’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스승 따라 서울로 상경해 홍제동 채석장에서 기술들을 익혔다. 주로 하수도 맨홀뚜껑이나 길가 경계석 등을 만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장인들 지혜와 기술 전수는 같았다. 옆에서 알아서 터득해야 했다. 돌을 구해서 자르고 가공했다. 다들 그렇듯 청년도 스승 아래서 밥 먹고 자면서 3년을 보수 없이 배웠다. 따로 정해진 가르침은 없었다. 그저 스승이나 선배가 하는 석공 일을 보며 따라했다. 대장간 경험이 그에게 속도를 선물했다. 연장 다루는 법을 빨리 터득했고 일 배우는 속도도 남달랐다. 일은 고됐다. 자신의 몸무게보다 곱절은 더 나가는 돌을 들어 옮겨야 했고 무거운 스승의 공구까지 메고 다니며 채석장의 돌을 골랐다. 울고 싶었지만 차츰 돌 일에 재미가 생겼다.

“겨우 지 밥벌이 한 거지. 선배들 일하는 모습 눈으로 보면서 기능을 연마하는 거야. 일은 힘들고 돈도 없었지. 양말도 한 번 신으면 빨지 않고 며칠씩 신었어. 살 돈이 없잖아. 바닥이 닳아 해지면 뚜껑만 남았어. 우스갯소리로 ‘뚜껑양말’이라고 불렀지. 그렇게 배웠어.”

3년이 채 안됐을 때, 스승은 전북 부안 현장소장으로 서울을 떠나게 됐다. 그는 따라나서지 않았다. 스승은 연장 한 벌을 남겼다. 연장 대신 손목시계를 받거나 양복 한 벌 받는 제자도 있었다. ‘돌쟁이’로서 홀로서기였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서울 내 모든 채석장이 문을 닫았다. 별 수가 없었다. 남원으로 순천과 고흥으로 떠돌며 석축 쌓으며 생계와 기능을 이어갔고, 얼마 뒤 입대했다. 1966년 3월 군에서 제대하고 두 달 뒤, 왕십리 무학 채석장에서 석재(石材; 돌) 제작을 하다 처음 문화재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창덕궁 돈화문 바닥돌 가공과 시공이었다.

 
 
 
▲ 석재는 큰 돌을 각종 연장으로 치석(불필요한 부분을 떼어내는 일)하고 할석(割席, 돌 자르기)해 다듬어야 한다. 1. 쐐기구멍을 뚫어 결에 따라 나누고 쐐기를 박아 균열시키고 2. 틈을 벌려 할석한다. 3. 마름질 재단선을 잡고 4. 도드라져 튀어나온 부분이나 모서리의 불필요한 부분을 떼어내고 끝이 뾰족한 정으로 표면을 쪼아 평평하게 다듬질하고, 도드락망치로 세밀하게 다듬어야 비로소 쓸 만한 석재가 탄생한다.

여기서부터였다. 만 50년을 돌과 씨름했다. 이름만 대면 아는 석축문화재는 그가 매만졌다. 숭례문을 비롯해 북한산성,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낙안읍성, 해미읍성 등 국내 유명 성곽은 그가 해체했거나 보수하고 돌을 쌓았다. 석축이나 석단으로는 회암사지, 경국사, 청풍 문화재단지, 태백산 천제단, 영주 부석사가 있다. 연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덕수궁 돌담길도 그의 솜씨다.

그는 2007년 석조물을 제작하는 장인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석장(石匠, 석구조물 분야)으로 지정됐다. 석구조물에서는 그만한 인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돌쟁이’ 40년 외길 인생에 주어진 사명이기도 했다.

“국보나 탑 보수가 중요해. 우리도 선조들에게 훌륭한 문화를 물려받았잖아. 우리가 튼튼하게 복원해서 후대에 물려줄 의무와 책임이 있는 거지. 그래야 후손들이 다시 해체하고 복원하면서 ‘몇 백년 전에 이렇게 잘해놨구나’ 해. 이런 말 들어야 저승에 가서도 눈 감을 수 있어. 돈 밝히지 말고 해야 돼.”

그는 석조문화재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았다. 돌 일은 녹록지 않다. 큰 돌을 망치, 메, 털이개, 정, 도드락망치로 치석(불필요한 부분을 떼어내는 일)하고 할석(割席, 돌 자르기)해 다듬어 적재적소에 넣어 쌓아야 한다. 돌의 결, 절리를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할석이 제대로 된다. 절리를 꿰뚫어보지 못하면 석재가 스스로 쪼개진다. 쐐기구멍을 뚫어 결에 따라 나누고 쐐기를 박아 균열시킨 뒤 틈을 벌려 석재를 할석해야 한다. 이후 도드라져 튀어나온 부분이나 모서리의 불필요한 부분을 떼어내고 끝이 뾰족한 정으로 표면을 쪼아 평평하게 다듬질하고, 도드락망치로 세밀하게 다듬어야 비로소 쓸 만한 석재가 탄생한다.

“나무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돌에도 결이 있어. 3년 이상 배워야 그 절리를 알아.”

탑은 심혈을 기울였다. 균열이 생긴 이유부터 수차례 분석하고 해체와 조립을 수없이 머리속에 그려보면서 선조들의 정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복원해야 했다. 최근 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 해체복원에 자문을 맡았다. ‘돌쟁이’로서 살아온 만 50년 인생의 기념비적인 석공 일이라고 했다. 아사달과 아사녀 전설이 서린,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리는 석가탑 아닌가. 석가탑 뒤로 옛 것 그대로 복원하려는 정성이 길게 늘어섰다. 그는 새 돌보다 탑이나 성곽에 쓰인 옛 돌을 찾아 쓰기를 고집한다. 현장을 누비는 그의 차에는 연장과 전국 각지에서 채취한 돌이 실려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장인 고집만 내세우지 않는다. 현장에서 직접 돌 들고 나르는 전문가들을 치켜세운다. 현대식 공부를 한 이들 아이디어가 합리적이면 채택해 실천에 옮긴다.

“이제 나는 늙었어. 비록 현장에 있지만 자문할 뿐이지. 현장서 돌 갈고 들고 나르는 사람들을 잊어선 안 돼.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연구실장, 사무관, 학예사 등 모두 마음 모아 복원하고 있어.”

석장은 국보급 그림자를 전수하고 싶다. 장인 명맥 끊기면 문화재 수명도 짧아질까 우려한다. 천년 넘게 이어져온 국보와 국보급 그림자는 불이(不二) 아니던가. 전수관 세워 전통공구도 전시하고 한쪽에는 대장간도 마련해 손수 전통공구를 벼리는 방법도 전하려고 한다.

“문화재 생명을 잇는 장인들이나 사람들 정성은 그림자야. 탑이 국보면 그림자도 국보급이야 국보급….”

탑 쌓은 석공들은 사라졌다. 탑은 천년 풍화 견뎠다. 석공도 탑도 쓸쓸하지 않으리라. 밤이면 달빛에 아스라이 일렁이고 낮이면 햇볕에 짙게 뿌리내린다.

이의상 석장, 그가 일렁이고 뿌리내릴 탑도 예 있었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국보나 보물 탑 보수·해체복원 전문가

장인 손길 닿은 문화재

미륵사지석탑부터 석가탑까지
국보 1호 숭례문 성곽 복원도


▲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보물 제410호).

▲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

▲ 영양 오층모전석탑(국보 제187호).

대한민국 보물급 이상 탑들은 이의상 석장이 해체하고 보수해 복원했다. 세계문화유산과 국보 1호에 쓰인 돌도 석장이 다듬고 쌓았다.

자장율사가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을 그가 다시 쌓았다. 모전(模塼, 돌을 벽돌모양으로 새긴 것) 석탑인 수마노탑을 쌓아올린 돌 찾기가 어려웠다. 기존에 있던 구재(舊材, 옛 돌)와 최대한 비슷한 돌을 구하고자 지질학 교수와 강원도 산비탈을 몇날 며칠 돌아다니며 어렵게 구한 돌로 회향한 복원이라 가장 애착이 가는 탑이다.

석장 인생에 기념비적인 탑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즉 석가탑이다. ‘돌쟁이’로 살아온 만 50년 여정을 맞는 시기가 해체복원 마무리 시점과 우연하게 맞물리기 때문이다. 

▲ 국보 1호 숭례문(국보 제1호).

▲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도 그가 참여하고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 최대(最大) 석탑이다. 2009년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면서 건립시기(639년)와 미륵사 창건 성격과 발원자가 밝혀진 탑이다. 일제가 석조문화재를 복원하다는 명목 아래 동쪽 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시멘트로 복원된 아픔이 서린 문화재다.

80년대에 작업했지만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어 남다른 감회를 주는 탑은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이다.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은 물론 국보 제1호 숭례문 성곽도 그가 보수했다.

   


[1339호 / 2016년 4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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