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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삼종보리품-하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6.04.12 13:53
  • 수정 2016.04.12 13:58
  • 댓글 0

삼귀의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덕목이자 가르침

▲ 법안 스님은 “삼귀의야말로 불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덕목이자 가르침”이라고 강조했다.

삼종보리품을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부처님은 지혜·그릇 모두 청정
그 말씀엔 그릇됨·허망함 없어
중생 번뇌의 시작과 끝 알기에
이를 없애는 인연 깨닫도록 해

늘 ‘삼귀의’ 부르면 신심도 고취
진실로 믿고 실천하는 계기 돼야
삼귀의는 행복한 삶 이끄는 방안

“선남자여, 토끼와 말과 향기를 내는 큰 코끼리 등 세 짐승이 저 갠지스 강을 건너는데, 토끼는 강바닥에 닿지 않아 물에 떠서 건너가고, 말은 강바닥에 닿기도 하고 닿지 않기도 하며, 코끼리는 강바닥을 밟고 건넙니다. 갠지스 강이란 곧 십이인연의 강입니다. 성문이 건널 때는 마치 저 토끼와 같고, 연각이 건널 때는 저 말과 같으며, 여래가 건널 때는 향기를 내는 큰 코끼리와 같으므로 여래를 부처라고 합니다. 성문이나 연각은 비록 번뇌는 끊었으나 습기(과거로 인한 종자, 습관)는 끊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래는 모든 번뇌와 습기의 뿌리까지 뽑아 없앴으므로 부처라고 합니다.(…)선남자여, 예를 들어 청정한 물건을 청정한 그릇에 두면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합니다. 성문이나 연각은 지혜는 비록 청정하나 그릇이 청정하지 않지만, 여래는 지혜와 그릇이 모두 청정하므로 부처라 합니다.”

불교에서는 성문과 연각을 일반적으로 소승외도라고 표현하는 경우들이 많아요. 자기만 깨달으려고 한다는 인식 때문이지요.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하지만 남방불교가 소승불교는 아닌 것처럼 말이죠.

태국 스님들은 국민을 대상으로 기본교육을 거의 다 가르쳐요. 과거 방콕시장이었던 잠롱 스리무앙이라는 분은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방콕의 절에서 컸고, 마찬가지로 절에서 자라 총리가 되신 분도 있었답니다. 그래서 아이를 절에 보내는 방식이 교육의 일환으로 주목받게 되어, 한때는 절에 수용하기 힘들 정도로 시골 어린이들이 많이 올라왔었다고 합니다. 실제 1900년대 태국에 갔더나 초등학교가 절에 있더라고요. 절에서 국민교육을 전부 담당하는 거죠. 혼자 수행하고 공부만 하겠다고 하는 것이 소승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국민교육을 담당하는 태국 스님들을 소승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당시 태국 사찰에서 참 재미있는 광경도 봤습니다.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대웅전 앞에서 고기를 꼬치로 구워 팔고 있는 거죠. 더 흥미로운 것은 꼬치를 구워 파는 장소가 또 화장장 앞이더라구요. 대웅전 바로 앞에 있는 전기 화로가 화장장에 불이 들어가는 곳이래요. 사람들이 그 앞에서 꼬치를 구워서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것이죠. “아, 여기는 진짜 생사가 둘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화장장이 혐오시설이라, 지으려고 해도 주민들의 반대에 먼저 부딪치잖아요. 반면 태국은 불교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삶 속에 이처럼 깊이 스며있었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생과 사가 둘이 아닌 지혜가 일상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죠. 같은 맥락에서 소승외도는 나를 위해 도를 닦는 것이냐 이웃들을 위해서 하는 것인지의 차이일 뿐, 남방불교가 소승이고 북방불교는 대승이라는 절대적 구분 방식은 아니라는 거죠. 나와 남을 함께 위할 수 있는지 못하는지의 차이일 뿐입니다.

다음을 봅시다.

“선남자여, 여래의 말씀에는 두 말씀이 없고, 그릇 됨이 없으며, 허망함이 없습니다. 지혜에 걸림이 없고 설법하기를 좋아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원인)에 대한 지혜와 때에 대한 지혜와 상(현상)에 대한 지혜를 갖추어, 덮어 감춤이 없고, 수호하는 것도 필요치 않으며, 말씀에 허물이 없습니다. 모든 중생의 번뇌가 일어나고 끝나는 인연과 끝을 없애는 인연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세간의 팔법(이익·손해·칭찬·비난·훼방·명예·괴로움·즐거움)으로 더럽혀지지 않으며, 큰 연민의 마음으로 괴로움과 번뇌를 뿌리 뽑아 구제하고, 십력, 사무소외(四無所畏])와 대비의 삼념을 갖추어 몸과 마음의 두 힘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부처님은 삼념, 즉 십력과 사무소외, 대비를 갖추셨다고 하네요.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똑같은 중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죠? 그렇기에 범천이 권청을 하고 천상계의 모든 신들이 다 불보살님을 찬탄하는 거예요.

대만의 성운대사께서 정말 멋진 말을 하셨습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을수록 하루를 더 살수록 삼보에 귀의함이 더 강해진다.”

어때요? 참 훌륭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을 말로는 하는데 진실로 부처님께 의지를 하는지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듯 합니다. 거기다 나이를 좀 먹으면 본인이 깨달아 부처가 됐다고 착각하는 분들도 있어요. 성운대사의 말씀을 잘 새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부처님께 더 의지하고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고 승가에 의지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고 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것은 곧 우리가 공덕과 복덕을 구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우바새계경’ 22품을 미리 살펴보도록 합시다.

선생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삼귀의를 얻고, 어떤 사람이 삼귀의를 얻지 못하나이까.”

불자들은 삼귀의를 얻었는지 못 얻었는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앞에서 공부하길 오랜 겁 동안에 부처님 말씀을 다 공부하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닦고 계율을 닦아도 안 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 보리 가루 한줌을 베풀고 짧은 시간 부처님 공부해도 얼마든지 성불할 수 있다고 배웠지요? 생사의 괴로움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지에 따른 차이라는 것이죠.
 

얼마 전에 한 불자님이 찾아와 “스님 고맙습니다. 아들을 살려줘 고맙습니다”라고 해요. 이 분은 부산 방생법회 때마다 한 번도 빼먹지 않았대요. 여섯 시간 걸리는 다른 지방에서 와서 방생하고 밤차 타고 또 올라가시는 거예요. 어느 날 아들이 교통사고가 났대요. 차는 완전히 폐차시켜야 할 수준에 머리가 깨지고 찢어지고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심각했대요. 그런데 정작 어디서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집에 와 누워있었다는 거예요. 베개와 요, 이불이 피로 흠뻑 다 젖은 상태에서 발견이 된 거죠. 그런데 안 죽고 살아났습니다. 방생 공덕이 허송하지 않았기에 제게 감사 인사를 하신거죠. 요즘에는 안심정사에 워낙 많은 분들이 오시니까 제가 기억을 다 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일단 ‘전부 강제로라도 기도를 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그렇게 해서 그 불자들이 작은 어려움 하나만 잘 넘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때문에 저도 기도를 소홀할 수가 없어요. 소홀히 하면 안 되죠. 제가 매일 만나는 분들, 그 안타까운 마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이 분들 위해 기도했다면 피할 수 있었는데’하는 마음도 들고요. 얼마나 안타까워요, 그렇죠? 생사의 괴로움, 생사의 위험을 너무나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거예요. 인생이 즐겁고 기쁘고 좋은 일만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잖아요? 그러나 이런 것은 극히 드물고, 외려 흉한 일은 많고 길한 일은 적은 것이 우리 인생이니 고해바다와 다름없지요. 인생이 운명을 한 치도 못 비켜 가는데 다만, 부처님의 위대한 법력으로 기도만 하면 다 넘어가는 거예요. 얼마나 멋져요, 그렇죠? 정작 불자들이 이걸 모르니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삼귀의는 불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은 늘 삼귀의를 부르세요. 저도 괴롭고 힘들 때는 ‘귀의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하거든요. ‘귀의불 나무 붓다야. 나무 달마야, 나무 승가야’ 이것보다 더 좋은 주문은 없어요. 더 좋은 진언도 없습니다. 삼귀의를 하다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이 더 강해져요. 전에는 건성으로 믿었던 것이 진실로 믿어지고, 어렵고 고통 받는 모습들을 보면서 부처님께 더 귀의하게 되지요.

“마음이 지극한 사람은 믿음이 무너질 수 없고, 삼보께 친근하고 좋은 벗의 가르침을 받으면 이와 같은 사람은 곧 삼귀의를 얻습니다.”

여러분들은 늘 부처님께 의지하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심즉시불’ 내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해서 귀의를 무시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인식입니다. 마음이 지극한 사람은 믿음이 무너질 수 없고, 삼보님께 친근하고, 좋은 벗의 가르침을 받으면 이와 같은 사람은 곧 삼귀의를 얻습니다.

어느 분 아들이 7~8년 경찰 시험을 봤는데 계속 떨어졌대요. “어떡하면 되겠냐” 질문하길래 “기도를 하세요”했습니다. “계율을 지키고 자비희사를 실천하면서 ‘지장경’을 읽으면 된다”고 구체적인 기도법도 일러줬습니다. 그랬더니 본인은 낚시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들 시험 포기하면 되죠. 자기 할 건 다하고 하라는 기도는 안하고 잘되기만 바라면 그게 이뤄질 수 있겠어요? 약간의 기도를 했을지라도 낚시의 즐거움을 위해 살생의 업을 짓고도 소원성취 하려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할 필요도 없는거죠.

성운대사의 ‘즐거움을 뿌려라’ 책에 공덕을 짓는 자세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돈을 벌어들이는 한편으로 낭비를 하고, 파종을 하며 짓밟는 사람이 있습니다. 새어나가는 것이 있는 세상과 새어나가는 것이 있는 중생은 공덕과 인연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찻잔에 구멍이 생기면 물이 새어나가는 것처럼 세간의 좋을 일과 공덕은 모두 우리 자신의 삼업(몸과 입과 뜻)에 의해서 새어나갑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항상 말을 삼가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몸을 보양하고 마음을 억제하여 삼업으로 인하여 우리의 복보(복을 지어논 과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공덕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말을 삼가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어때요. 여러분 일단 좋은 일을 했으면, 좋은 인연을 지었으면 이로운 쪽으로 생각을 해야 되는데 혹시 알아주길 바라고 대접받길 바라지는 않습니까? 그런 마음은 진정으로 공덕 짓는 자세가 아니에요. 공덕을 지어놓고 업을 추가하는 마음이죠. 아무리 좋은 음식 만들었다 하더라도 거기다 청산가리를 넣으면 그게 음식일까요, 독일까요? 공덕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돼요.

성운대사는 “만약 남을 돕고서 마음으로 괴로워한다면, 설령 몸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며 마음으로 선의를 생각했겠지만 구멍이 생겼기 때문에 마치 솥과 그릇이 새고 집이 새며 주머니가 새는 것과 같다”고 하셨어요. 새기만 하면 다행이죠. 독으로 오염시키는 거라니까요. 그러면서 어떻게 복보와 공덕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복이 새어나가지 않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바로 삼귀의를 얻는 겁니다. 잠 잘때 마저도 “귀의불” “아미타불”이 나올 정도로 철저하게 말입니다. 이는 평소에 훈련이 되고 연습이 되어야 가능하죠.

불자에겐 삼귀의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바새계경’에 여러분들의 실천에 대한 정확한 지침들이 다 나와 있잖아요. 중생이 끝이 없고 괴로움이 끝이 없으므로 믿음을 얻어야 되고 믿음을 얻고 나면 좋은 벗을 얻어야 되고 좋은 벗을 얻고 나면 자재함 까지 얻어야 되고 여러분들이 그러한 세계로 자꾸 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불가능한 것 같아지만 가능해요. 부처님도 어렵다는 점을 알고 계셨어요.

“선남자여 보살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재가보살이고, 둘째는 출가보살입니다. 출가한 보살은 이와 같은 세 가지 보리를 분별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재가인 이가 분별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재가자는 많은 악연에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차츰차츰 하다보면 삼귀의를 득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이게 힘이 되면 세상이 기뻐지고 즐거워져요. 외부 환경에 관계없이 기쁘고 즐겁고 다 좋아지는 거예요. 삼귀의를 얻음으로써 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첫 숟가락에 배 부를 수 없어요. 하다보니까 되는 거죠. 그때는 여러분들이 아마 아라한이 되어있을 거예요. 아라한이 되어 “금생을 너무 멋지게 잘살았다”며 기뻐하는 거죠. 세세생생 그렇게 살다보면 이제 보살이 되어야 겠지요? 보살은 어떻게 될까요?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워야지요. 부처님께 “선호념, 선부촉 해주십시오”하고 발원해야지요. 아라한이 되어도 불보살님들의 선호념과 선부촉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 정도 되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불보살님들이 훨씬 더 위대하고 그 힘이 크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우바새계경’을 통해 우리가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행복해지고 어떻게 우리 인생을 바꿀 수 있는지 공부하는 것은 그 출발점입니다.

다음 시간 공부할 6품 ‘수삼십이상업품’은 꼭 미리 읽어보세요. 삼십이상은 부처님의 신체적 특징들을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언젠가 이 상호를 닦아야 돼요. 이미 닦아서 잘 생기신 분들도 많이 있지만 32상까지 구족하면 전륜성왕이 되고 여래가 되는 것이니까요. 꼭 그런 불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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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뤄진다

기도로 운명을 바꾼다-상

 
논산 안심정사에는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회주 법안 스님을 친견하고자 하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저마다 안고 있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대다수인만큼 그 고민의 무게도 결코 가볍지 않다. 자식의 대학입시, 취업 문제부터 각종 병고와 경제적인 문제 등 각양각색의 고민들이 불자들의 눈물어린 호소와 함께 스님에게 전달된다.

입시, 취업, 결혼, 경제적 여건 등은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불자들의 고민이지만, 깨달음과 수행을 강조하는 한국불교계 인식에서는 너무나 세속적인 고민이다. 때문에 불자들은 스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기보다 “마음을 편하게 하고 집착을 내려놓기 위해 불교를 공부한다”고 위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면 법안 스님은 “재가자들이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한다. 내가 잘되고 남이 잘되게 돕는 것이 재가불자의 덕목이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내가 행복해져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해법이다. 안심정사에 세상사 각양각색의 고민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수많은 고민에 대한 스님의 처방 역시 간단 명료하다. 바로 ‘기도’다.

법안 스님은 상담 형태로 불자들의 고민을 듣고 현재 처한 상황을 풀이한 뒤 그에 맞는 기도를 권한다. 기도는 불자라면 누구나 접해본 가장 기본적인 신행방법 가운데 하나다. 때문에 적지 않은 불자들이 “기도가 과연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방법이 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모든 세상사 고민들이 기도로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수많은 불자들 중에는 기도의 가피를 경험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이는 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안심정사를 찾는 불자들 역시 상당수가 이미 나름대로 기도를 해본 경험도 있고 기도로 운명을 바꾸는 데 실패한 경험도 있는 이들이다. 그럼에도 왜 이 불자들은 스님을 찾아와 상담하고 스님의 처방을 소중히 받아들여 기도에 매진하는 것일까.

그 이면에는 “기도를 통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스님이 권하는 기도는 우선 목적이 분명하며 방식 또한 명확하다. 여기에 어렵고 난해한 불교의 장막을 걷어낸 쉽고 재미있는 법문이 더해져, 불자들이 기도로서 추구하는 바를 명확히 할 수 있도록 이끈다.

목적이 분명한 기도에는 간절함이 더해지고 간절한 기도는 삶을 변화시킨다. 바로 기도의 영험이다. 안심정사의 기도가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심정사에는 기도로 인한 수많은 영험담이 존재한다. 기도로 운명을 바꾼 수많은 사례들이 신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홈페이지에 가득하다. “기도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은 수많은 사례담을 통해 믿음으로 변하고, 기도에 매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부처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십니다. 기도하세요.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면 바꾸지 못할 운명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중생을 위한 부처님 가피입니다.”

법안 스님은 기도의 기본은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더라도 그 한켠에 자리한 의심은 성취를 막는 장애가 된다. 제대로 된 기도는 믿고 정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설명이다. 또 제대로 된 기도는 행동을 조심하고 말을 조심하고 마음을 잘 다스리는 노력과 함께 해야한다. 이는 나와 타인의 변화를 이끄는 요인이 되며, 업장을 녹여 세상에 충만한 불보살님의 가피 인연과 만나는 매개가 된다. 안심정사에 유독 기도 영험담이 많은 까닭은 무작정 잘되기만 원하는 기도가 아니라 소원이 이뤄질 수 있는 기도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1339호 / 2016년 4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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