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대승불교의 결과물
15. 대승불교의 결과물
  • 김정빈
  • 승인 2016.04.1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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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롭게 발전하나 집중력 잃어

지난주까지 대승불교가 발흥하게 된 배경과 대승불교의 성격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출발한 대승불교는 어떤 결과물을 내놓았던 것일까?

상반된 사상들 공존하게 돼
교판상석으로 새로운 접근도
칠성 등 문화 요소 수용하며
사상의 일목요연함은 희석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대승불교라는 이름 안에 다양한 사상이 포함된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다양한 사상들은 지금까지 논의한 배경과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대승불교’라 부르게 된 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승불교 사상들 간에는 상반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상이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상이 미타(彌陀) 사상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자력(自力) 위에 세워 놓으셨다. 이는 불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 중의 하나인 ‘법구경’이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 어떻게 남을 자신의 의지처로 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설하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승불교의 한 갈래인 미타 사상은 자력이 아닌 타력(他力)에 기초하고 있다. 대체로 보면 미타 사상을 제외한 거의 모든 대승불교 사상은 자력을 기초로 타력을 부정하거나 일부 수용하고 있는 데 비해 미타 사상은 타력을 기초로 삼고 자력을 그 보조적인 힘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미타 사상은 불교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기초 삼은 법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요점이다. 사실 미타 사상에 그런 점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긴 하지만 미타 사상은 그 사상을 설하는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이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형식을 취하고 있고, 불교의 근본인 연기법, 인과법, 수행법, 깨달음(성불)의 법을 설하고 있는데, 이는 미타 사상이 외도 사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또는 이 또한 불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미타 사상 정도는 아닐지라도, 대승불교의 여러 사상 간에도 나름의 상이점이 있다. 제법(諸法)의 공성(空性)을 설파하는 반야(般若) 사상과 제법의 실상(實相)을 설파하는 법화(法華) 사상, 우주의 외적인 전개를 장엄하게 펼치는 화엄(華嚴) 사상과 인간의 내적인 전개를 미세하게 파고드는 유식(唯識) 사상 또한 자력 대(對) 타력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큰 상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다양성은 대승불교의 발흥지인 인도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승불교가 중국에 유입되어 정착되기까지는 ① 격의불교(格義佛敎) 시기 : 중국인이 이미 갖고 있던 개념을 빌려 대승불교를 소개하던 시기 ② 경전 번역 시기 : 구법승들이 인도를 방문하여 경전을 유입시키고, 인도어에 능통한 승려들에 의해 경전이 번역되던 시기를 거쳤다.

그다음 시기에 이르러 앞에서 말한 경전 간의 상이점이 문제가 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③ 교상판석(敎相判釋) 시기가 시작되었다. 교상판석(교판)은 각각의 경전이 전체 경전군(經典群) 가운데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경전들 상호 간에는 어떤 사상적 관계가 있는지를 판별, 결정하는 작업을 일컫는 용어이다.
교판의 내용은 종파마다 달랐다. 화엄종은 ‘화엄경’을 정점(頂點)에 놓는 교판을, 천태종은 ‘법화경’을 정점에 놓은 교판을, 정토종은 정토계 경전군을 정점에 놓은 교판을 제시하는 식으로 종파마다 불교 해석이 저마다 다르게 전개되었다.

더 나아가, 외재적인 변화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출발한 대승불교는 중국적이거나 한국적인 사상(문화)까지 수용했다. 칠성, 산신, 용왕 등이 불교 안으로 들어와 존숭된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흐름은 한편으로는 불교의 다채로운 발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사상이 일목요연함을 잃었다는 것, 따라서 신자가 마음을 오롯하게 한 사상에 집중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해 다음 주에 이어서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김정빈 밝은불교신행원장 jeongbin22@hanmail.net
 

[1339호 / 2016년 4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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