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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다연니자의 ‘발지론’ 작론처 치나야리

“천불이 천인에 심심묘법 설한 암림사가 ‘발지론’ 제작처”

▲ 시크교 최대성전인 암리차르의 하르만디르 사히브(신의 집), 일명 황금사원. 불사/감로(amrit)의 호수 가운데 위치한다. 5대 구루 아르 준에 의해 건축되었다. 여기에는 시크교 초대 구루 나나크의 상징인 그들의 성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가 안치되어 있다.

불사 혹은 감로(amrit)의 도시, 암리차르. 오늘 날 이곳 암리차르는 황금사원으로 유명한 시크교 최대 성지이기도 하고, 가까이는 1919년 4월 영국군에 의해 10여 분 동안 1500여 명이 살상된 비극의 땅이기도 하다.(그곳에 추모공원 잘리안왈라바그가 있다.) 터번에 수염을 기르고 칼을 찬 모습으로 표상되는 시크교는 구루(스승) 나나크(Nānak, 1469∼1539)를 개조로 하는, 말하자면 유일신교적 힌두교라고 할 수 있다.(‘시크’는 제자의 뜻)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진실은 인간의 해탈이 아니라 유일 절대의 신이며, 구루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이다.

현장이 머물던 사찰 관련 서술
200척 스투파·과거 4불 유적
혜초 스님도 불타 제도설 언급

암리차르 북쪽 30㎞에 위치한
치미야리가 옛 치나야리 증언
현지인들은 전혀 모른다 전언

산에 둘러 쌓여 있었단 암림사
그 어디에도 흔적 없이 평원 뿐

흔히 황금사원으로 일컬어지는 하르만디르 사히브(Harmandir Sahib, 신의 집)는 바로 구루의 상징인 그들의 최고성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Guru Granth Sahib)’의 예배당(廟堂)을 일컫는 말이다. 예배당은 사원의 중앙 ‘불사/감로의 연못’(amrit sarovar) 안에 위치하는데―암리차르라는 도시이름은 바로 이 연못이름에서 유래한다―, 예배하려는 행렬이 아침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저토록 뜨거운 뙤약볕을 참아내며 행렬을 짓는 것일까? 어느 시기 일어난 불교의 경전신앙이나 불탑숭배도 같은 모습이었을까? 저들 시크교도들은 우상과 제사의식을 배척하며 오로지 ‘진리’라는 이름의 유일신만을 믿는 이들인데.

▲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가다연니자 존자가 ‘발지론’을 저술하였다고 전한 치나북티로 비정된 치나야리. 현지에서는 치미야리, 참야리로 호칭하였다.

아무튼 말하기 좋아하는 어떤 이가 암리차르의 황금사원을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할 곳으로 선정하였다지만, 필자가 정작 암리차르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750㎏의 황금이 들어갔다는 구루의 예배당도, 위대한 제국의 야만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불교학의 초석, 지혜를 낳는 몸통(發智身論)이라는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Kātyāyanīputra)의 ‘아비달마발지론’이, 현장법사에 의하면 이 지역 어디쯤에서 쓰여 졌다는 것이다.

현장은 카슈미르로부터 탁카국의 샤카라(현재 시알코트)로, 여기서 다시 동쪽 500리 치나북티(Cinabhukti)를 거쳐 잘란다라(현재 잘란다르: 인도 독립 당시 판잡의 주도)에 이른다. 그에 따르면 쿠샨제국의 카니시카 왕(128∼153 재위) 치하 하서(황하 서쪽)의 외국인들은 그의 위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다투어 볼모를 보냈는데, 치나북티가 그들의 겨울 주처였기 때문에 한봉(漢封)이라는 뜻의 그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장은 계속하여 이 나라 불적에 대해 이같이 서술하고 있다.

▲ 더위를 피해 저녁 무렵 황금사원 주위에 모여 예배하는 시크교도들.

“대성에서 동남쪽으로 50여리 가면 타마사바나(Tamasāvana, 答末蘇伐那: 闇林)라는 승가람이 있다. 승도는 300여명,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있다. 사람들의 위의는 신중하고 안온하며, 덕행도 고결하다. 소승의 학문을 특히 널리 연구한다. 현겁(賢劫: 현재의 住劫)의 천불(千佛)이 모두 이곳에서 천인(天人)들께 심심의 묘법을 설하였다. 석가여래가 열반에 들고 300년 째 가다연니자(迦多衍那) 논사께서 여기서 ‘발지론’을 제작하였다.

암림가람(타마사바나) 중앙에 아쇼카 왕이 세운 높이 200여척의 스투파가 있다. 그 옆에서 과거 4불이 앉고 경행하였던 유적이 있으며, 작은 스투파와 큰 석실이 물고기 비늘처럼 이어져 있는데 그 수를 알 수 없다. 이는 다 겁초(劫初) 이래 아라한과를 증득한 성인들의 것으로, 여기서 입멸한 이들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치아나 뼈는 지금도 있다. 산을 둘러싸고 있는 가람은 주위둘레가 20리나 되고, 부처의 사리탑도 수 백 천 군데로 그 모퉁이가 그림자로 서로 이어질 지경이었다.”

혜초 스님 역시 북천축(잘란다라)으로부터 타카국(吒社, Ṭakkadeśa)에 이르러 불타께서 직접 오셔서 인천(人天)을 제도하였다는 이 절(多摩三磨娜)에 대해 언급한다. 샤카라와 잘란다라 사이에 있었다는 치나북티는 어디쯤일까? 오늘날 지도상으로 시알코트와 잘란다르 사이의 큰 도시는 암리차르이다. 초기의 ‘서역기’ 연구가들은 치나북티를 암리차르 서남쪽의 파티(Patti)나 페르즈포르(Ferozpor)로 비정하였으나 지금은 암리차르에서 시알코트에 이르는 공로상의 치니야리(Chiniyari)로 비정한다. 이곳은 또 어디인가? 구글 지도에서 검색되지 않았다. 대신 암리차르 북쪽 인근에 친나 샤바즈푸르(Chinna Shabhazpur)와 친나 비츠라킬라(Chinna Vichlakila), 하르세 친나(Harse Chinna)라는 세 마을이 나란히 검색되었다. 막연하지만 현지에 가서 알아보고, 혹 알 수 없다면 기차 편으로 암리차르에서 동남쪽으로 80㎞ 떨어진 잘란다르로 내려갔다가 버스 편으로 다시 올라와 보는 것으로 치나북티의 답사를 대신하려고 하였다. 어쨌거나 현장도 혜초도 그 근처의 길을 지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 불사/감로(amrit)의 연못을 사방으로 감싸고 있는 시크교 성전. 순례자들은 연못 주위 끊임없이 돌고 있다.

문제는 숙소로 잡은 황금사원 근처 호텔(헤리티지 인) 후론트에서 간단히 해결되었다. 호텔 매니저는 바로 대답해 주었다. 암리차르 북쪽 30㎞에 위치한 아즈날라(Ajnala) 근처 마을인 치미야리 혹은 참야리가 치나야리라고. 그는 그 동네를 잘 알고 있는 듯하였다. 물론 치나북티는 알지 못하였다. 일단 거길 가보기로 하였다.

밤새 비가 내렸다. 아침이 되자 암리차르 곳곳에 개울과 늪과 호수가 생겨났다. 호텔 앞에 오토가 아닌 사이클릭샤가 대기하고 있었다. 대도시에는 오토릭샤도 없어졌는데. 50루피에 흥정하였다. 빗물이 들이닥쳤지만, 릭샤왈라가 개울을 지날 때 힘겹게 페달을 밟고 늪을 건널 때에는 아예 내려서 자전거를 끄는 것을 보고 오토릭샤를 타지 않기를 잘했다고 자위하였는데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일인당 50루피라는 어거지에 위안도 동정심도 싹 사라져버렸다. 늪지에 내려주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겼다.

버스는 빗속을 뚫고 잘 닦여진 고속도로를 달렸다. ‘암리차르 국제공항’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길이 좋은 이유를 알만 하였다. 공항 조금 못미처 ‘친나 샤바즈푸르, 하르세 친나’를 가리키는 작은 이정표도 보였다. 그렇다면 이 지역이 바로 치나북티였던가? 아즈날라는 우리네 읍 소재지와 같은 한적한 동네였다. 터미널은 텅 비어 있었다. 가두의 매표원을 비롯해 보는 사람마다 우리가 치미야리에 간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얼마 후 버스가 한 대 들어오자 바로 일러주었다. 버스는 우리만을 태우고 시내 시장 통으로 들어갔다. 검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운전기사는 폼 새에 어울리지 않게 밥 먹는 흉내를 내었다.

30분 쯤 지나자 버스가 출발하였다. 버스기사도, 차장도 승객도 남자는 모두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른 시크교도 차림이었다. 우리는 완전한 이방인 차림이었다. 아즈날라에서 치미야리까지는 정확히 5.6㎞,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치미야리는 우리네 면 소재지만한 동네였다. 어디로 가지? 딱히 갈 곳도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가게들이 들어선 큰 길을 500미터 쯤 걸어가니 동네가 끝나고 들판이 펼쳐졌다. 다시 동네로 들어와 사거리 주변을 서성일 수밖에 없었고, 금방 마을사람들 이목의 표적이 되었다. 두어 명, 서너 명, 대여섯 명의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차이(茶)를 파는 노점에 걸터앉았다. 안쪽은 곡물 가게였다. 산타크로스와 같은 흰 수염에 황색도포를 걸친 도인(시크교도) 풍모의 가게 주인이 안쪽 자리를 권하였다. 차도 권하였지만 사양하였다. 이웃가게 도인들도 모여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게 밖에서 장사진을 쳤다. 그들 중 검은 수염의 젊은 청년이 나서 우리와 도인 사이를 통역하였다.

“이 마을에는 왜 왔느냐?”
“어디서 왔느냐?”
“뭣 하는 사람이냐?”
“이름이 뭐냐?”

우리도 물었다. 이 마을의 명칭이 왜 ‘치미야리’인지, ‘치나야리’나 ‘치나북티’라는 말을 들어보았는지, 이전에 혹 중국과의 관계를 묻는 외지인이 찾아 온 적이 없는지, 혹 이 근처에 불교유적지가 있는지?

도인들은 합창하듯 모른다고 말하였다. 이 동네서 40년을 살았지만 치나북티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하였다. 치나야리, 치미야리에 와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였다. 가다연니자가 ‘발지론’을 썼다는 타마수바나(암림사)는 산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지만, 산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판잡의 대평원지대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현장의 전승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하나?

▲ 황금사원 밖을 에워싸고 있는 도로. 순례자들로 항상 붐볐다.

사실 가다연니자가 ‘발지론’을 지은 곳을 추정할만한 또 다른 단서가 있다. 즉 그는 ‘발지론’ 제1장 제1절 세제일법납식(世第一法納息)에서 “세제일법(유루혜 중 제일 마지막 단계)에서 진리(4성제)의 통찰(現觀)에 이르는 것은 남섬부주의 다섯 대하 즉 강가(갠지스)·야무나·사라유·아이라바티·마히 강이 대해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논의하였는데, 이에 대해 ‘대비바사론’의 편자는 “존자께서 ‘발지론’을 지을 때 동방(東方)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동방에서 다 같이 관찰할 수 있는 다섯 강을 비유로 삼았던 것이지만, 남섬부주에는 실제 강가·신두(즉 인더스)·박추·쉬타의 네 대하가 있고, 각각에 네 개의 큰 강(지류)이 있다”고 하면서 가다연니자가 언급한 다섯 대하는 갠지스 강과 이것의 큰 지류인 네 강이라고 해설하였다.

이로 본다면 가다연니자는 ‘발지론’을 ‘동방’, 즉 야무나 등의 4대 지류가 본류와 합류하여 그 모두를 관찰할 수 있는 갠지스 강 중류지역에서 저술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장이 전한 치나북티의 암림사는 무엇인가? 사실 타마사바나(암림사)는 이미 초기불전에도 언급되는 상당히 유명한 절이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에서 세존은 불멸 100년 북천축의 카슈미르에 사마타를 배우는 이들의 첫 번째 가는 처소로 타마사바나(多摩娑林, 暗林)가 지어질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으며, ‘잡아함’ 제604경을 비롯한 일련의 아쇼카 아바다나(Aśokāvadana)에서는 왕이 파탈리푸트라에서 개최된 그의 법회에 카슈미르(罽賓)의 타마사바나(暗林)의 아라한들을 초청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진제(眞諦)의 ‘바수반두(세친)법사전’에서는 가다연니자가 ‘발지론(發慧論)’을 카슈미르에서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제 전승간의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서역기’에서의 논설을 현장이 지어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치나북티를 지나며 그 같은 말을 얻어 들었을 것이다.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은 치나북티의 토샤사나(突舍薩那寺)라는 절에서 14개월 동안 ‘아비달마(對法)론’과 중현의 ‘현종론’ 등을 학습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가다연니자’의 위대함과 ‘발지론(혹은 팔건도론)’의 중요성이 빚어낸 전설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옛날 신라인들은 현생의 부처는 몰라도 과거불인 가섭불이 신라에서 설법하였다고 믿었고, ‘삼국유사’에서는 실제 월성 용궁 남쪽 지금 황룡사 자리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데, 필경 이러한 믿음이 신라의 불교를 이룩하였을 것이다. 과거 페샤와르 사람들 역시 과거 현겁의 4불(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가섭불·석가모니불)이 그곳 핍팔라 나무(보리수) 아래 앉았고 이후 996불 역시 그곳에 앉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이 간다라불교를 이룩하였을 것이다.

암리차르는 시크교의 황금사원으로 유명하지만, 그것은 5대 구루 아르준(1563∼1606년) 이후의 일, 길게 잡아도 나나크가 바바 붓다(Baba Buddha)가 된 A.D. 1500년 이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전의 그곳은? 혹여 그곳을 방문하거든 불멸 300년(BC. 2∼1세기) 무렵 출세한 불교의 위대한 논사, 불교학의 정초자 가다연니자도 기억해주시길. 그이가 없었다면 ‘아비달마대비바사론’도 없었을 것이고, 비바사가 없었다면 중관도 유식도 여래장도 없었을 것이며, 불교는 역사 너머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39호 / 2016년 4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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