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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중국 안휘성 구화산 대원문화원

신라 왕자가 빚은 1000년 지장도량 구화산을 그려보다

▲ 99m의 지장보살 입상은 구화산 자락에 서 있다. 통일신라 왕자였던 점에 착안해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모형을 세웠다. 아울러 지장 스님이 구화산으로 떠날 때 함께 갔던 삽살개 ‘선청’도 조각해 놓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며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794년 7월30일. 신라서 구화산으로 건너가 중국 땅에 지장신앙의 뿌리를 내린 김지장(696~794) 스님은 “열반한 뒤 육신을 다비하지 말고 3년이 지난 뒤 열어보아 썩지 않았으면 그대로 개금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가부좌 한 채 열반에 들었다. 그날, 구화산이 울었다. 산천이 진동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렸고, 범종을 쳤지만 종은 제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 범상치 않은 시적(示寂)임을 무정(無情)도 직감했음이라!

신라 권력투쟁 지켜본 왕자 수충
스스로 지장이라 이름 짓고 입당
구화산에서 정진 끝에 중국 땅에
지장신앙 뿌리 내린 보살 화신 돼

중국 정부가 4천억 들여 구화산
입구에 건립한 불교문화박물관은
사실상 김지장 스님 기린 기념관

폭우 때문에 입산금지 된 아쉬움
99m의 지장보살상 앞에서 달래

3년 후 함 뚜껑을 여니 얼굴은 살아계실 때와 같았고, 안치하려 법체를 이운하니 움직일 때마다 골절에서 쇠사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경전에도 나와 있다고 했다. ‘보살의 몸은 쇠사슬과 같아서 모든 뼈에서 울림이 난다.’ 탑이 서 있는 땅에서는 거룩한 빛이 솟아오르더니 이내 원광을 이뤘다. 구화산 남대에 등신불을 모시고 신광령(神光嶺)에 육신보전을 지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생전의 김지장 스님이 경전 속의 지장보살의 응신이었음을!

▲ 순례단에 합류한 이재성 분단희생자추모사업회 회장과 김효율 한국·스리랑카불교우호협회장, 김태회 분단희생자추모사업회 사무국장이 김지장 스님 일대기를 담은 조각상에 삼배를 올리고 있다.

신라 32대 효소왕이 아들을 두지 못하고 붕어하자 보천 태자와 함께 오대산서 수행정진하던 효명이 형의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신라 제33대 성덕왕이다. 성덕왕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김수충, 김중경, 김승경, 김헌영. 다섯 번째 아들의 이름이 나타난 기록은 아직 없다. 성덕왕은 큰 아들(‘수충’으로 보는 게 학계의 대세)을 당나라 국자감(國子監)에 보내 수학(숙위학생. 宿衛學生)하도록 했다. 당 현종의 부름을 받으며 대감(大監)직을 받을 정도의 뚜렷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중국 최초의 사찰 백마사(白馬寺) 등을 돌아보며 불교에도 심취하기 시작한다.

유학 4년이 지날 무렵 어머니의 부름에 급히 귀국한 그는 궁궐 안 권력투쟁을 지켜보게 된다. 그의 어머니 성정왕후가 폐위되는가 하면 동생인 중경이 태자로 책봉된다. 중경은 717년 생을 달리한다. 태자의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오를 기회를 엿볼 수 있음에도 이미 왕권의 미련을 벗어던진 24살의 수충은 스스로 법명을 ‘지장’이라 짓고는 삽살개 선청(善聽)과 함께 차나무 금지다(金地茶)와 벼종자 황립도(黃粒稻), 소나무 오채송(五釵松)을 갖고 당나라로 들어간다. 중국의 ‘구화산화성사기’는 이렇게 전했다.

“그 때 승려 지장이 있었다. 신라왕자로서 김씨의 근속이었다.…출가하여 바다를 건너 배를 버리고 걷다가 구름에 쌓인 이 산을 보고 걸어서 천리길을 부지런히 나아갔다.”

‘구름 속 산’만을 보고 걸어 온 지장 스님도 구화산 자락이 현묘히 늘어서 있는 풍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이 자리에 서서 숨을 돌렸을 게다.

중국 정부는 1995년 구화산 입구인 이 자리에 1,851,239제곱미터(56만7000여평),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8개를 넣고도 남을만한 터를 잡은 후, 1999년부터 한화 4000억원을 투입해 2012년 9월 대규모 불교문화박물관을 준공했다. 공식 명칭은 구화산대원문화원(九華山大願文化園). 사실상 김지장 스님 기념관이다.

▲ 홍원당에 안치된 지장 스님 좌상.

당초 구화산을 오르려 했다. 화성사를 거쳐 지장 스님이 고행했던 고배경대(古拜經臺)와 법체가 안치되어 있는 신광령의 육신보전도 참배할 계획이었으나 구화산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른 새벽부터 쏟아지는 비는 8시간이 지나도 멈출 줄 모르고 퍼붓고 있었다. 이미 산으로 향하는 길은 끊겼다. 그 아쉬움 달래려 99m의 지장보살 입상을 찾는 길이다.

순례객이 처음으로 마주한 공간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49m인 연화광장이다. 계단과 광장 바닥에 아름다운 연꽃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어 연화세계를 걷는 기분이다. 다섯 개의 다리 오통교도 놓여 있다. 한 번에 다섯 다리 모두 건널 수 없으니 타심통, 천안통, 신족통, 천이통, 숙명통 중 한 다리만 선택한다. 세상 어디든 마음대로 날아가고 싶어 신족통을 통과하니 구자가사광장(九子袈裟廣場)이 펼쳐져 있다. 광장 직경은 99m. 중앙에 서 있는 9개의 바위는 지장보살이 한 가사로 구화산의 99개의 산봉우리를 덮어 가렸다는 의미다. 그 전설은 이렇다.

▲ 물 속에 잠긴 흑석에는 ‘지장보살본원경’이 새겨져 있다.

지장 스님은 구화산에 든 이후 석굴서 쌀과 백토(白土)를 섞어 만든 죽을 먹으며 홀로 용맹정진했다. 촌로이며 구화산 지주였던 민양화(閔諒和)가 지장을 발견하고는 그의 원력과 정진력에 감동받아 절을 짓자며 불사에 필요한 땅을 묻는다. 지장 스님은 가사자락으로 구화산 전체를 덮었고, 민양화는 기꺼이 구화산을 시주하고는 어린 아들(도명 화상)과 함께 출가했다. 이로써 구화산에 첫 절이 780년에 세워지니 화성사다. 그 화성사는 1200여년의 시공을 건너며 이 순간에도 지장 스님의 덕화를 전하고 있다. 

지장 스님 일대기가 오롯이 담겨 있는 홍원당(弘原堂)은 화려함과 숭고함이 공존하는 도량이었다. 물 속에 비친 ‘지장보살본원경’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미세하지만 큰 울림으로 속삭인다. “지옥에 빠진 중생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구제하지 않고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

▲ 구화산과 지장 입상이 빚어 낸 연못 속 풍광도 일품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직후 민간에서는 미륵신앙이 주를 이뤘고, 수나라 때는 관음신앙이 크게 일었다. 당 시대에 접어든 이후 ‘지장십륜경’과 ‘지장보살본원경’이 민간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 파급 속도는 엄청났다.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했으니, 지장보살에 의지해 정진만 하면 윤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역설도 가능하다. 또한 “부모를 고난에서 구원한다”는 효도사상도 녹아 있으니, 불심 갖는다 해서 효심을 잃을 이유도 없다. 불교와 유교의 간극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을 터다. 지장신앙이 고난에 허덕이던 민초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중과 운력하며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지장 스님의 수행덕화 소문이 중국 땅에 삽시간에 퍼지자 수많은 납자들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구화산 찾았던 시인묵객들이 남긴 시를 통해 당시의 구화산을 그려볼 수 있겠다.

“뛰어난 경치 겹겹이 보이고, 높은 승원(僧院)들이 줄지어 있다. 냇가 물고기들은 발우 씻기 기다리고, 원숭이들이 종을 치며 놀고 있다.” “아홉 송이 이어진 구름 힘껏 오르려 하고, 새가 날아도 가장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네. 누가 병풍에 썼는가? 바위 아래 소나무 사이에 모두 스님들이네.” 시선 이태백은 지장 스님을 만난 후 그의 수행에 감탄하며 “보살의 자비로운 힘 끝없는 고통에서 구하나니, 하해와 같은 그 공덕 세세손손 빛나리로다”며 찬탄했다.

▲ 지장 스님의 족적. ‘구화산화성사기’에 따르면 지장 스님은 “목이 솟아 골상이 기이하고 7척에 달하며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지장 스님 입적 후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며 구화산은 더 번창해 갔고, 한창 때는 300여개의 사찰이 저 산에 퍼져 있었다. 90여개의 사찰만 남아 있는 구화산도 장관일 터인데 300여개의 산사를 품고 있던 구화산이라면 목탁소리, 경 읽는 소리 끊이지 않았을 터다.

지장 스님의 일대기와 경전 속 지장보살 이야기를 절묘하게 조각해 놓은 8개의 거대한 조각상은 중국인들의 예술성과 신심을 단박에 엿볼 수 있는 걸작이라 할 만하다. 그 정성에 합장을 한 후 99m의 김지장 보살상으로 향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46m)이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39.6m)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지장보살 입상은 오른손에 석장을, 왼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높이가 99m인 이유가 있다. 지장 스님이 신라를 떠난 때가 24살. 연꽃 좌대가 24m다. 출가 후 사문의 길을 걸은 세월이 75년. 입상 높이만 75m다. 지장 스님은 99세에 입적에 들었다. 좌대와 입상을 합친 총 높이는 그래서 99m다.

지장보살 친견 직전에 만나는 불광지도 직경 99m다. 웬만한 거리에서는 카메라 앵글에도 다 담지 못하는 엄청난 원형 연못이다. 바닥은 황금색의 특수 제작된 물질로 모자이크 돼 있어 노랗게 보인다. 바닥에는 8개의 큰 연등 무늬와 33개의 작은 연등 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저 장대비가 며칠 내내 쏟아져 내려도 불광지를 넘치게 할 순 없어 보인다.

지장보살 앞에 섰다. “어찌 이 먼 길을 왔느냐?” 묻는 듯 했다. 그 물음에 답하려는 순간 억수같이 내리던 비가 갑자기 그쳤다. 이내 구화산 자락에 운해가 일었다. 순례단은 환한 미소와 함께 말없이 삼배를 올렸다.

순간, 한 생각이 스쳐갔다. 지장 스님이 만약 성덕왕을 이은 34대 왕위에 올랐다면? 지장 스님의 구법길이 더욱 더 숭고하게 다가온다. 언젠가 구화산을 꼭 올라보리라! 구화산대원문화원을 떠날 즈음 장대비는 다시 시작됐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340호 / 2016년 4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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