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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인연 받아들이기

기자명 하림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6.04.25 13:57
  • 수정 2016.04.25 13:58
  • 댓글 0

문밖에서 봄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빗소리 사이로 아련하게 새벽 목탁소리도 들려옵니다. 용두산 공원 안에 있는 정수사의 새벽 도량석 소리입니다. 매일 1080배 정진을 하는 스님의 심장고동소리처럼 일정하고 여여합니다.

외부인 받아들이는 건
누구에게나 불편한 일
불편도 감내하겠다는
자비심·용기가 필요해

그런데 그 사이로 갑자기 고양이의 짜증스런 소리가 고요와 평화를 깹니다. 이곳에 자리를 차지한 고양이인 듯한 데 뭔가 큰 사단이 난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비가 올 때면 용두산을 떠돌던 다른 고양이가 비를 피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옵니다. 자기 혼자 누리던 평화로운 공간이 방해를 받으니 고양이는 짜증이 나고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상대를 위협합니다. 자기의 권리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시리아 난민들이 어려움을 피해 유럽으로 이주하는 상황과 비슷해 보입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비심도 있어야겠지만 큰 용기도 필요합니다. 흔히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잡지 않는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곧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이 건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에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자리를 양보해야 하고 그의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준비가 되지 않으면 결국 포기하고 맙니다. 예전에는 ‘먹는 밥에 숟가락만 하나 얹으면 되지’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밥상 자리와 내 몫의 반찬이 줄어들고 잠자리에서 이불도 줄었지만, 그래도 ‘그것도 인연이겠지’하고 넉넉히 받아들였습니다.

8살 때 친척집에서 1년 정도 이렇게 산 적이 있었습니다. 삼촌은 1남 4녀의 자녀들과 단칸 월세방에서 생활했는데 제가 그곳에 가게 된 것입니다. 삼촌과 사촌들은 얼굴도 모르는 저를 친척이란 이유하나로 불편을 감수하고 저를 한 이불에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고 고마운 마음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흔히 절에 일찍 들어와서 고생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힘들게 느껴본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다행이 새벽형 체질이라서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들지 않았고, 차비가 없어서 학교를 걸어가는 일도 없었습니다. 또 등록금을 못 내서 선생님에게 불려가서 가정상담을 받는 일도 없었습니다. 염불을 잘해서 칭찬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성장하게 받아들여준 것에 너무나 고마울 뿐입니다.

▲ 하림 스님
미타선원 주지
이제 세월이 지나 이곳 용두산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식구들은 저의 결정을 존중해 줍니다. 그럼에도 가끔 누군가 이 절에 의탁하러 왔을 때 모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인연 따라 살다가 인연 따라 갈 수도 있는데 좋은 인연을 고르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스런 마음입니다. 기존의 식구들과 신도님들이 혹여 불편할까봐서 노숙자들이 오는 것도 반기지 못합니다. 밥 한 끼를 드리더라도 ‘이 분이 자주 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복지활동에는 최대한 동참을 하지만 이곳의 수행분위기를 지켜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저의 부끄러움입니다. 어린 시절 저를 받아준 그 가족의 결정이 얼마나 용기 있는 결정이었는지, 자비롭고 건강한 가족이었는지를 이제야 알게 됩니다.

이제 빗소리만 들리고 고양이의 화난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아마 그 고양이도 불편하지만 찾아온 고양이를 받아들였나 봅니다. 고양이도 절 밑에 있다 보니 부처님의 자비를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새삼 함께하는 모든 인연들에게 자비와 평화가 조화롭기를 기원해 봅니다.

[1341호 / 2016년 4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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