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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두보의 시와 선

기자명 명법 스님

왕유 못지않게 불교에 심취…북종선 선사들과 폭넓은 교류

▲ 명나라 사시신(謝時臣)의 두보시의도(杜甫詩意圖). 두보의 시 ‘여러 귀공자를 모시고 장팔구에서 기녀들과 더불어 더위를 식히다가 저녁이 되어 비를 만나 지은 시 2수(陪諸貴公子丈八溝攜妓納凉晩際遇雨 二首)’ 중 ‘대숲은 깊어 손님을 머물게 하는 곳, 연꽃 깨끗하고 더위를 식히는 때(竹深留客處 荷淨納凉時)’를 화제로 해서 그린 그림.
두보는 왕유보다 11살 어렸지만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무척 달랐다. 왕유가 활동하던 시기는 당나라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그 역시 안사의 난을 겪었지만 태평성세의 관료로서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을 유지했다. 반면, 두보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안사의 난으로 나라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때였다. 곤궁한 시대의 시인은 백성들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평생동안 벼슬 구했으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평생 동안 곤궁하게 살아

신심 깊은 고모 영향으로
불교에 상당한 조예 보여
시에 원각경·능엄경 등장

유가적 인물로 불리지만
곤궁하면서 불우했던 삶
불교적인 체험 통해 관조

두보의 삶 역시 불우했다. 평생 벼슬을 구했으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으며 경제적으로도 곤궁을 면치 못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중국 대륙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그는 예민한 정신으로 시대의 모순을 꿰뚫어보았으며 탁월한 시적 능력으로 시대의 비장함을 형상화했다. 두보의 시에 표출된 강렬한 현실인식과 우국애민의 충절은 그를 유가지식인의 전형으로 기억되게 했다.

일반적으로 왕유를 시불(詩佛)로, 이백을 시선(詩仙)으로, 두보를 시성(詩聖)으로 부르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보여준 인생관과 시의 정신이 불가, 도가, 유가 중 어느 하나와 특별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설과 달리, 이백과 두보도 왕유 못지않게 불교, 특히 선종에 관심이 많았으며 당대의 여러 승려들과 교유했다.

두보는 불교와 인연이 깊었는데, 왕유에게 어머니의 영향이 깊었다면 두보에게는 고모의 영향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 의해 낙양에 있는 고모 집에 맡겨졌으며 경건한 불교도였던 고모의 영향으로 소박하고 경건한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이런 분위기는 두보의 정신세계도 변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두보는 이십 세 이전에 “만권의 서적을 읽었다”고 하는데, 상당한 문화적 소양을 가졌던 고모 덕분에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많은 불교경전도 그의 독서 범위 속에 포함되었다. 그의 시에 ‘원각경’, ‘능엄경’ 등에 등장하는 용어가 자유롭게 인용된 것도 바로 이 시절의 독서 덕분이다.

고모의 집에 머물던 12년의 시간은 당나라가 성세를 구가했던 ‘개원지치(開元之治)’의 시대였으며 불교, 특히 선종이 전에 없는 번영을 구가하던 시대였다. 낙양 주변에 있는 용문석굴과 백마사 등 유명한 사찰을 통해 당시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는데,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관찰하며 정신적 탐구와 모색에 열심이었던 두보가 새롭게 펼쳐지던 선종의 활약에 둔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유가의 경세사상이 두보의 인생에서 아무리 중요한 요소였다고 하더라도, 두보의 내면에서는 선의 영향을 깊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선에 대한 관심은 두보만의 특유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때 사인들의 보편적인 심리적 상태였다. 다시 말해, 초년에는 유가의 출세주의에 의해 경도되어 사회적인 지향성이 강하게 나타난다면, 중년에는 개인적인 관심으로 도교의 신선술이나 방술에 기울어졌다가, 생애 후반에는 불교, 특히 선의 가르침에 마음을 깃들이는 것이 당대 사인들의 일반적인 심리변천의 과정이었다.

안사의 난 이후 사림사회에서는 사환하면서도 선을 익히고 고승과 교유하는 일이 유행이 되었다. 그들은 마음을 닦는 불교의 심학과 경세치용의 유학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유종원 같은 사람은 불학의 내명에는 ‘재물외’의 ‘출세’ 성격을 구비하고 있으므로 사람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역’과 ‘논어’에 합치된다고 생각했다. 유우석 역시 불교의 ‘내명(內明)’이 중생들을 위한 ‘피안’의 귀착점이며 유학은 현존하는 사회의 강상윤리를 확립하기 때문에 유학과 불교는 내외 보완의 관계라고 강조했다.

당 현종 천보 원년(742년) 고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두보는 자립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는 즐겨 절을 찾아 스님들을 방문하고 법을 구하고 선을 닦았다. 전해지는 두보의 시 1400 수 가운데 불교 사찰과 관련된 제목이나 선을 논하고 불법을 이야기한 작품이 약 50편에 달한다.

일찍이 두보는 오대산에서 불법을 닦고 장안의 대운사 주지 찬(讚)상인과 깊이 교류했다. 보응(寶應) 원년(762) 겨울에 재주(梓州)에서 지은 ‘문공의 절을 방문하다(謁文公上方)’는 다음과 같다.

“들의 절은 높은 나무에 숨어 있고, 산승은 높고 낮은 곳에 살고 있네. 석문은 햇빛이 다르고, 붉은 기운이 나뭇가지에 비껴있네. 깊숙이 바람 이는 돌길로 들어가니, 긴 여라 넝쿨이 말렸다 펼쳤다 어지럽네. 뜰 앞 맹호가 누워있는 곳, 마침내 문공의 처소에 이르렀네. 민가의 고을이 내려다보이고, 연기와 먼지는 섬돌을 마주하고 있다네. 법사께서는 꽃비를 내리는 일 외에는 십여 년 세월 산을 내려가지 않으셨다네. 장자가 스스로 금을 깔아도 불당에서 그저 편안하실 뿐, 티를 벗은 큰 구슬이요 허공에 걸린 밝은 달이로다. 나는 남북으로 떠도는 사람, 마음의 거친 풀을 김매지 못하여, 오랫동안 시와 술로 더럽혀진 몸. 무슨 일로 벼슬자리를 더럽혔을까? 왕이나 제후, 땅강아지나 개미, 모두 죽어 산언덕을 좇을 것이라. 원하옵기는 제일의를 듣고, 돌이켜 초심을 향하고 싶어라. 금비로 눈꺼풀을 긁어냄은 일백 거거보다 귀중한 일. 무생(無生)의 불법은 삶을 인도함이 있나니, 아마도 이 이치를 자랑하여야 하리.”

‘도솔사를 바라보며(望兜率寺)’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이 크다는 것 다시 알지 못하고, 부처의 존귀함 보았다는 것만 그저 남았네. 수시로 응당 맑은 물로 손 씻고 나서, 급고독원을 찾아보리.”(不復知天大, 空餘見佛尊, 時應淸盥罷 隨喜給孤園)

‘도솔사를 오르며(上兜率寺)’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신(臾信)처럼 슬퍼함이 비록 오래되었지만, 주옹(周)의 (불법) 좋아함을 잊을 수 없네. 흰 소가 끄는 수레 멀고 가까운 곳 갈 수 있으니, 또한 자애로운 배에 올라타고 싶구나.”(臾信哀雖久, 周顒好不忘, 白牛車遠近, 且欲上慈航) 

대력 3년(768) 가을에 두보는 강 동쪽을 따라 내려가 공안을 경유하면서 ‘공안의 태이 스님과 작별하며(留別公安太易沙門)’란 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멀리 여산으로 가서 은거하고 싶으니, 아름답게 지은 시문 처음엔 탕휴스님(休上人·惠休) 뵙는 듯 했었네. 먼저 향로봉 올라 암자를 차릴테니, 천천히 석장을 날려 풍진세상 벗어나시게.”(隱居欲就廬山遠,麗藻初逢休上人. … 先蹋爐峰置蘭若,徐飛錫杖出風塵)

‘악록산 도림사를 가며(岳麓山道林二寺行)’를 지어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백발이 흩날리는 이 몸 어디로 가나? 이 노을 곁에 모옥을 지을 수 있으리라. … 오랫동안 사객은 그윽한 곳 찾곤 했고, 세밀히 배운 주옹은 쓸쓸함을 면했지.”(飄然斑白身奚適,傍此煙霞茅可誅. … 久爲謝客尋幽慣,細學何顒免興孤)

그의 시는 현실주의적인 정서가 강하지만 곤궁한 세상에 대한 고뇌 속에서도 여생을 세속을 떠나 절에 기탁하려는 심정을 드러내었다. 이는 두보가 유교를 깊이 신봉하던 때에도 불교적 사유를 떠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밤에 허선생이 시를 읊조리는 것을 듣고서 좋아 지은 시가 있다(夜聽許十一誦時而有作)’란 시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허선생은 오대산의 손님으로, 업을 깨끗이 하고 석벽을 나왔구료. 저 또한 승찬(僧粲)과 혜가(慧可)를 스승으로 삼으면서도, 이 몸은 여전히 선적(禪寂)에 매여 있습니다. 어찌하면 그대의 방편을 밟아, 외람되이 이끌려 필적하는 상대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 곁을 떠나 쓸쓸히 살다 늦게서야 그대를 만나, 몽매함을 안아 주시니 즐겁게 깨우침 받았습니다.”(許生五臺賓, 業白出石壁. 余亦師粲可, 身猶縛禪寂. 何階子方便, 謬引爲匹敵. 離索蔓相逢, 包蒙欣有擊)

‘가을날 기주에서 회포를 읊어 정심(鄭審)과 이지방(李之芳)에게 보내며(秋日夔府詠懷奉寄鄭監李賓客一百韻)’란 시 속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을 쌍봉사에 두고, 칠조의 선문을 두드렸네.”(身許雙峰寺, 門求七祖禪)

쌍봉은 선종의 4조인 도신이 머물던 호북성 황매 쌍봉사를 가리키며 ‘7조선’이란 북종 7조인 보적의 선법을 말한다. 이 두 구절은 시인이 북종선을 참학했음을 표현하고 있다.

중당 이후 사인들이 선에 기울어진 것은 시대의 위기가 유가와 도가의 이념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안사의 난 이후 개인이 겪은 극심한 혼란과 내적인 분열은 유가적인 ‘겸제(兼濟)’의 가능성과 ‘독선(獨善)’을 위한 물리적, 내적 거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가적인 세계에 절망한 사인들은 선불교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에 기대어 내적인 화해에 도달하려고 했다. 선불교는 종래 유가의 ‘겸재’와 ‘독선’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가치를 중도와 불이를 통해 하나의 차원으로 통합시켰다.

선적인 안심입명을 통해 두보는 비로소 곤궁한 시대와 불우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기주시기 이후 두보의 시는 모순과 불행을 토로하는 가운데서도 스치듯 자족과 휴식의 순간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시 원(園)에 이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애초엔 강산의 고요함을 구했으나, 마침내 시끄러운 저잣거리 벗어났네. 초가집 둘레엔 이랑 따라 심은 푸성귀, 한 소반 찬밥으로 만족한다네.”(始爲江山靜 終防市井喧 畦蔬繞茅室 自足媚盤飧)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41호 / 2016년 4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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