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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법문 ⑤ - 동사섭 행복마을 이사장 용타 스님

사실에 대한 앎과 이치에 대한 이해가 바로 깨달음

▲ 용타 스님은 “돈법을 깨달으면 완벽하게 마음이 열려서 자유로움이 넘치게 되고, 그 자유로움으로 인품을 닦아나갈 수 있다”며 “걸림 없는 자유가 확실해지면 자연스럽게 중생들을 향한 연민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여러분들이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데 있어 유념할 게 있습니다. ‘육조단경’에 방점을 두지 말고 해탈에 방점을 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은 목적이 아닌 방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이뤄야할 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걸림 없는 자유입니다. 지금 여기서 내 마음이 무엇인가에 걸려들면 갈등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면 괴롭게 됩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걸려들지 않으면 내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그 평화로움을 해탈이라고 말합니다. ‘육조단경’을 방편 삼아 공부하는 것은 해탈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상구보리하화중생’은 삶 목적
구류중생 행복 서원 어렵다면
말 반복해 무의식 전환시켜야

제대로 발심하면 인품이 변화
인간관계 모든 문제도 해결돼

인품 요소 중 행복 가장 중요
행복해지기 위해선 깨달아야
자유로 수렴되는 앎·이해가
깨달음을 얻는 두 가지 요인

여러분들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인생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인생의 북극성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북극성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입니다. 무한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완벽한 상품상생(上品上生)의 극락이 되는 것, 이게 바로 우리들의 북극성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향해 가야 하고, 실제로 가고 있습니다. ‘금강경’ 정종분에서는 무한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게 하리라는 서원을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서원이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 가족만 행복하면 됐지, 구류중생의 행복을 내가 왜 서원하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 속에서 살고 있기에 무한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내가 다 제도하겠다는 서원이 들어서지 않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류중생을 내가 다 제도해서 무여열반에 들게 하리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해보세요. 반복하다 보면 잠들어 있던 무의식이 그 소리를 듣게 됩니다. 처음에는 무의식 또한 공감하지 못해 다시 잠들어버리지만, 어느 순간에는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적응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게 맞지 않은 옷을 걸치려고 하는 것과 같았지만, 말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내 몸이 커져 옷이 맞게 됩니다.

발심을 제대로 하면, 그 발심에 상응하는 인품으로 변합니다. 저는 늘 ‘무한우주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유정무정 모든 존재들의 행복해탈과 맑고 밝은 상생기운을 위하여 전 에너지를 일으켜서 바치오니 무량한 복덕이 향상되소서’라는 기도를 하루에 몇 차례씩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되진 않았습니다. 한참 하다 보니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상태가 되니, 그 자체가 참으로 떳떳하고 당당하고 좋았습니다. 이 기도가 기준이 되면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도 해결됩니다. 우주 모든 존재를 제도하겠다고 서원을 했는데, 미운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발원하는 자체로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금강경’은 이러한 발원이 해탈의 조건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류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것은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이자 북극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원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서원을 하면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인품을 지고한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인품이 저속한 상태로 있으면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면 누가 호응을 해주겠습니까. 인품은 수많은 덕목이 합일된 것입니다. 여러 부품들이 합쳐져 하나의 인품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품은 행복입니다. 우선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아야 할 게 참으로 많지만, 최고의 깨달음은 단연 돈법입니다. 돈법을 깨달으면 완벽하게 마음이 열려서 자유로움이 넘치게 되고, 그 자유로움으로 인품을 닦아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바로 앞에 놓인 것들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이토록 넓은데 그 모퉁이에 먼지만도 못한 우리가 먼지만도 못한 것들에 집착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꼴입니다.

삶과 인품과 돈법은 단계적으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삶을 논하기에 앞서 인품을 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품은 복합적인 요소가 합해진 것입니다. 인품을 동심원으로 그려놓으면 정중앙에는 무엇이 올까요. 정중앙 다음 부분에는 무엇이 올까요.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인품론이 생성됩니다. 가치관과 취향에 맞춰 인품론을 만들고 다시 바꿔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틀이 잡힙니다. 제 경우는 책을 읽으며 어제까지 세워놨던 인생관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리는 등 수없이 많은 가치관의 변혁을 경험해왔습니다. 지금은 거의 고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품론의 정중앙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걸림 없는 자유가 인품의 1순위입니다. 자유보다 자비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유가 부재한 자비에는 상이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꼴 보기 싫은 자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라지고, 네가 사라져 걸림 없는 자유가 될 때 뿜어져 나오는 자비가 상 없는 자비입니다.

걸림 없는 자유가 확실해지면 자연스럽게 중생들을 향한 연민이 생깁니다. 그 중생들에게 내 에너지를 공급해줘서 질곡에서 벗어나게 만들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걸림 없는 자유에서 자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가 되면 자비가 넘쳐흐르지만, 어떤 사람은 자유가 됐어도 자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비관 같은 관행을 닦아 자비심을 증장시켜야 할 것입니다.

자유와 자비에서 끝나는 것일까요. 자유와 자비가 됐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행동하려면 밖으로 나가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재입니다. 자유와 자비, 자재가 체(體)라면 행동으로 드러나는 현실이 용(用)입니다. 용인 삶이 좋으려면 자유, 자비, 자재가 좋아야 합니다. 삶이 바람직하게 되려면 자유, 자비, 자재가 튼실하게 밑받침으로 있어야 합니다. ‘금강경’으로 비유하자면 자유, 자비, 자재는 응무소주(應無所住)이고 현실은 이생기심(而生其心)입니다.

이처럼 인품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이고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이야기하면 많은 불자들은 겁부터 먹습니다. 깨달음의 관점에 대해 안타까운 방향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산 속에서 10년, 20년 수행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보통의 사람들은 평생 깨달음과는 무관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여깁니다. 저도 한때, 삼명육통(三明六通)을 깨달음의 목적으로 삼았었습니다. 삼명육통을 얻기 위해 삼매하며 멸진정에까지 이르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단순하고 평이했습니다. 앎이 깨달음이었고, 이해가 깨달음이었습니다. 깨달음은 넓은 의미로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이치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로는 걸림 없는 자유감, 해탈감으로 수렴되는 앎이나 이해입니다. 깨달음은 이러한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10년, 20년 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선을 해야 한다, 위빠사나를 해야 한다, 이런 식의 깨달음관을 가지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깨달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조건 때문입니다. 내 시각구조가 전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각구조라는 게 얼마나 불안정한 것입니까. 이 불안정함을 완벽에 가까운 쪽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마이크를 확대경으로 본다고 합시다. 확대경으로 보이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참모습에 가까울 것입니다. 더 확대하면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물질인 소립자가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눈으로 보면 걸려들 ‘거리’가 있었는데, 확대하면 ‘거리’가 다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거리’ 때문에 고통이 오는데 ‘거리’가 사라져버리는 관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돈법은 내가 걸릴 게 하나도 없는 상태의 관점입니다. 돈법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걸림 없는 자유로 안내할 수 있는 장치라면 다 포함됩니다. 심리적인 것뿐 아니라 외형적 장치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모든 장치가 돈법이 됩니다. 돈법은 신비가 아닙니다.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걸림 없는 자유로 수렴되는 앎이나 이해가 돈법입니다. 색성향미촉법 등 육경 중의 법경(法境), 법경 중의 무위법경(無爲法境)이 돈법인 것입니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이 내용은 3월2일~4월20일 서울 조계사에서 진행된 ‘용타 스님 육조단경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1342호 / 2016년 5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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