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힌두와 무슬림 갈등과 분쟁이 심각한 곳인 뭄바이 태생으로 세계 곳곳에서 ‘다수자가 소수자에 행하는 집단 폭력’의 발생 배경을 추적해온 학자인 아르준 아파두라이에 따르면, 이런 집단 폭력은 다수가 가지는 ‘사회적 불확실성’에서 시작된다. “수적으로 다수인 집단은 자신들이 더렵혀지지 않은 공동체, 즉 흠잡을 데 없이 순수한 ‘민족적 종족 집단’으로서 지위를 확립하는 데 방해되는 존재인 소수 집단에 대해 공격적인 심지어는 살인적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여기 나오는 ‘순수한 민족적 종족 집단’을 ‘순수한 종교 집단’으로 바꾸면, 이번 선거에서 특정 종교계와 정당이 무슬림과 동성애자 척결을 정책으로 내세운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수천 명에서 수십만에 불과한 그 소수자들이 자기들의 ‘안전성’과 ‘완전성’ 그리고 ‘확실성’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고, 그 가능성이 높다고 선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그 특정 정당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가깝게는 1990년대 동유럽과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 일어난 종교·종족 학살이나 나치제국의 유대인 말살도 ‘소수자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에 있었다. 조선시대 천주교도 탄압도 당시 성리학적 세계에 갇혀 있던 지배층들의 ‘소수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됐다.
상식을 가진 이라면 유럽에서 출발하던 시절 천주교에 탄압을 당하고 숱한 교도들이 죽음을 맞은 개신교가 이제 이 땅에서 다수 종교가 되면서 소수자 탄압에 앞장서는 데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들이 무슬림의 테러 가능성을 내세우지만, “일상의 삶 속에 평화 대신 폭력을 뿌리내리게 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테러로 지칭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저자의 지적처럼, 테러 예방과 척결을 내세우는 그 정당이 내세우는 정책과 구호야말로 테러가 분명하다.
“소수자는 꼭 필요하지만 (아니면 적어도 피할 수는 없지만) 환영할 수는 없다”는 것이 무슬림과 외국인 이주 노동자 문제를 비롯한 전 세계의 소수자 탄압과 배척을 가져오는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소수자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소수자들이 폭력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적 차원에서의 폭력이 소수자라는 매개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옳다. 그와 같은 소수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국가는 일부 역사를 과거에서 다시 불러내고, 또 일부는 반대로 묻어버린다.”
저자는 나치가 유대인들을, 그리고 현대 인도에서 시크교도와 무슬림들을 ‘문제 있는 소수자’로 만들어간 과정을 사례로 든다. 그러면 ‘문제 있는 소수자’라는 이미지를 조작해내서 가장 이득을 보는 자들은 실상 소수에 불과한 히틀러 측근들과 힌두주의자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대중들은 이 ‘권력을 가진 소수자’의 선전과 그에 추종하는 일부 언론의 여론 조작에 사로잡혀 ‘힘없는 소수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다.
이병두 전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
[1342호 / 2016년 5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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