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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중생의 업장 ‘내 허물!’ 진실한 참회가 정토 일궈

  • 특별기획
  • 입력 2016.05.09 14:15
  • 수정 2016.05.10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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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만난 큰 스님 합천 용흥사 회주 묘관 스님

▲ 묘관 스님은 “자아상실의 발단은 상대와의 비교에서 비롯된다”며 “참회기도로 업장을 소멸해가다 보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1

절에 한 번 살아볼래?
어머니 한 마디에
12살 소녀 ‘예!’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보았다 하는 건
착각일 뿐!

동국대 장학금 권선 10년
사람 키워야 불교 진흥!

5월이다. 땅과 비, 그리고 해와 달이 빚어낸 기적들이 가야산 기슭에도 일어났다. 진달래와 철쭉이 겨우내 품었던 향기를 일시에 발산하고 있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꽃이 피었으니 봄이다! 오늘은 특별한 스님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 날이다. 인연 닿는 비구니 스님들께 부탁드렸었다. 선교를 통해 내외가 명철하신 스님 한 분 귀띔해 주십사 하고. 한 분을 추천 받았고 수소문 끝에 친견을 허락 받았다.

“먼 길 오셨습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칼칼함이 배여있다. 선기를 다스린 고승의 내공이 느껴진다. 다관에 찻잎 넣는 순간 푸릇한 녹향이 방안을 채워간다. 언론에 노출되는 걸 워낙 꺼려하시기에 스님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동국대에 장학금을 기부한다는 사실과 일본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것, 그리고 해인사 동진출가승이라는 게 전부다. 무엇보다 출가인연이 궁금했다.

해방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한 후 김천 청암사 부근에 터를 잡고 살던 무렵. 어머니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친동생이 머물고 있는 절로 향했다. 엄마와 걷던 계곡길이 가야산 홍류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일게다. 해인사 국일암에 머물고 있던 속가 이모 정인 스님을 처음 마주한 것도 그 때다. 다소 급한 성격에 매사를 허투루 보지 않는 엄격했던 이모였다. 서너 번 암자를 찾아갔을 즈음. 정인 스님 아래에 상좌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챈 어머니가 뭔가 골똘히 생각고는 소녀에게 물었다.

“너, 이 절에서 살아볼래?”
“예!”

소녀의 간결한 대답에 어머니와 정인 스님도 깜짝 놀랐다. 12살의 풋풋한 소녀는 정인 스님을 은사로 이렇게 산문에 들었다. 먼저 와 있던 동자승들과도 잘 어울려 별다른 탈은 없었지만 아주 가끔씩 엄마가 찾아 온 날은 달랐다.

“엄마가 절에 오신 날이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정인 스님과 담소를 나누면서도 자주 제 손을 잡으셨지요. ‘잘 있그레이. 시님 말씀 잘 듣고.’ 그리 말씀 하시는 엄마 목소리에도 슬픔이 배어 있었습니다.”

찰나의 만남이요 만겁의 이별처럼 느껴졌다. 막힌 둑 터지듯 엄청난 눈물이 흘렀다. “그리 울려면 엄마 따라 지금 가라!”는 정인 스님의 호령도 아랑곳 않고 펑펑 울었다. 엄마는 가려던 길 멈추고 다시 돌아 와 소녀를 안았다. “지금, 엄마랑 집으로 갈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울음을 그쳐갔다. 엄마는 다시 해인사를 나섰고, 소녀는 이내 또래의 동자승들과 어울려 놀다가 가야산 품에 안겨 잠들었다.

길고도 깊은 숙연(宿緣)이다. ‘절에서 한 번 살아 보겠냐?’는 말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예’라 답하고, 자신과 멀어지는 엄마를 보고도 울지언정 결코 산을 떠나지 않았으니 전생의 전생부터 부처님과 이어져 온 인연이리라. 15살 되 던 해인 1950년 2월15일. 소녀는 해인사서 인곡 스님을 전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이후 학봉, 운허, 지관 스님 등 당대 내로라하는 강주 스님들로부터 ‘초발심자경문’과 ‘화엄경’, ‘전등록’을 배웠다. 사미니계 수지부터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기까지 12년이 걸렸고, 그로부터 강원 수의과를 졸업하는데 3년이 더 소요됐다. 6·25한국 전쟁과 정화불사라는 격동의 세월을 헤쳐 가며 공부해야 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더욱이 절 살림도 여의치 않았던 시대 아닌가. 묘관 스님은 절 밖으로 나가 처음 탁발했던 그 순간을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때, 해인사서 공부하려면 쌀 다섯 말과 보리 다섯 말을 쌀독에 부어 놓아야 했습니다. 탁발 이외의 별다른 방책이 없었습니다.”

▲ 합천 용흥사 극락전과 삼성각.

10리 산길을 걸어 나와 마을에 이르렀다. 어찌해야 하나! 문 앞에 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 누군가의 집 앞에 서서 목탁을 쳤다. 한 청년이 나왔다. 얼핏 보아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동무. “시주 해 달라!”는 말을 끝내 못 하고 고개를 돌린 체 다른 집으로 향했다. 할머님이 나오셨다. 그냥 반가웠다. “할머니! 시주 좀 해 주이소.” “와? 뭐에다 쓸긴데?” “공부 할라코 예!” 난생 처음 탁발로 받은 시주물은 한 줌의 보리쌀. “부처님 공부 잘 하그레이!”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동국대 인재불사에 써 달라며 형편 닿는 데로 100만원, 500만원을 기부한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10여년 동안 보낸 장학금이 1억원을 넘는다. 사중 돈이 아니다. 어찌어찌 해서 얻게 된 ‘개인 살림살이’다. 사제와 상좌들을 만나면 늘 이른다. “부처님 법 누가 전하나? 사람 키워야 한다. 개인이 써야 할 거 조금만 더 아껴 쓰고 동국대에 장학금 좀 보내 주거라.” 묘관 스님의 원력과 정성에 감동한 동국대는 스님의 법명을 이름으로 한 ‘묘관장학회’를 2015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장학회 설립에 묘관 스님은 반대 했지만 “이렇게 해야 장학불사가 더 잘 된다”는 말에 결국 승낙했다.

묘관스님이 처음 용흥사 주지를 맡았을 때만도 허름한 대웅전과 비새는 요사채 한 채가 전부였다. 폭포수도 그릇이 있어야 담을 수 있는 법. “불보살님께서 머무실 전각을 짓겠습니다.” 거마비라도 받게 되면 불사금으로 돌려놓고는 형편 닿는 대로 기와를 사고 기둥을 세워갔다. 불사금 내달라 한 적 없지만, 스님의 행보를 지켜 본 신도들은 작은 힘이라도 보탰다. 도심사찰에 걸 맞는 사격이 갖춰진 건 발원 10년 만이다. 용흥사는 절에 오는 사람의 숫자로 포교의 기준을 삼지 않지 않는다. 진정한 불자가 몇 명인지를 본다.

“불자가 꼭 알아야 할 교리가 있고 새겨야 할 경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켜야 할 계가 있지요. 공부하지 않고 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불자가 아닙니다. 건실한 불자가 곧 포교사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묘관 스님은 대교를 마친 후 3000배를 올리고는 곧장 성철 스님을 찾아 뵈었다. 스님이 받은 화두는 “마삼근!” 이후 결제철이면 선방에 가부좌를 틀었다. 2014년까지만 해도 해인사 약수암 선덕 소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지난해부터 선방으로 향한 발길을 거두었다.

“나뭇잎에 떨어진 빗소리도 잘 받아 내던 귀가 세월 따라 어두워졌습니다. 저와 담소라도 나누려면 후학들은 목소리를 좀 높여야 합니다. 그래, 이제 선방도 자주 오면 안 되겠구나!”

선방은 대중이 정진하는 공간이다. 자신 때문에 선방서 큰 목소리가 새어 나는 것에도 마음 쓰는 건 아마도 후학을 위한 세심한 배려일 것이다. 선객이 주석하고 있는 도량이지만 용흥사는 신도들을 위한 ‘참선’보다 ‘기도정진’에 더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자비도량참법’에 따른 참회정진이 이색적이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는 게 중요하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인정한 잘못만 참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연기법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남의 잘못도 내 허물로 삼아 참회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든 중생의 죄와 업장을 내 허물로 삼아 참회할 때 이 세상은 정토로 빛날 것입니다.”

용흥사에 피어 난 5월의 봄을 품은 묘관 스님의 눈이 참 초롱하다.

이 세상서 행복하고 싶다면 오계를 수지하세요

#2

일곱 걸음 걸으신 이유?
육도윤회 끊으라는 뜻

자비·복덕·청정·진실·지혜
불자라면 오계 종자 틔워야

늘 즐겁고 싶다면
내가 틀렸고, 감사하다 해야

▲ 해인사 약수암 죽림선원서 11년 동안 선덕을 역임한 묘관 스님은 지금도 경전을 가까이하며 부처님 말씀을 새기곤 한다. 선교를 겸비한 조계종 전국비구니 원로의원이다.

세납 81년, 법납 66년.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제1대 원로회의 의원이며, 해인사 약수암 선덕이요 합천 용흥사 회주인 묘관 스님께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여쭈어 보았다.
 

▲부처님께서는 탄생 직후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셨습니다.
“생명 있는 그 모든 것은 윤회합니다. 극심한 고통을 받는 지옥도(地獄道)부터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그리고 천신이 산다는 천상까지 여섯 갈래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가지요. 이를 일러 육도윤회(六道輪廻)라 합니다. 육도 중 인간계를 하늘 아래의 세계 즉 ‘천하’라 할 수 있고, 그 이외의 다섯 세계를 하늘의 세계, 즉 ‘천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보면 온 우주를 이르는 것이고, 그 보다 작게 보면 육도윤회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홀로 존귀하다’ 하셨을까요.
“인도문화와 연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계실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하늘의 세계 중에서도 천인들이 사는 세계에 태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면 최소한 ‘인간계’에 다시 오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천인들이 사는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라 보셨습니다. 천상계가 복을 많이 지은 중생이 가는 멋진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 복이 다하면 다시 다른 갈래의 세계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도윤회를 끊고 ‘천상의 세계도 넘어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라!’ 하신 겁니다. 지옥에 있는 생명도, 인간계서 살고 있는 사람도, 극락계에 머문 천인도 끊지 못한 윤회를 부처님께서는 단박에 끊으셨습니다. ‘홀로 존귀하다’할 만하지 않습니까? ‘홀로 존귀하다’는 건 ‘윤회를 끊은 생명이 존귀하다’는 뜻의 다름 아닙니다. 그렇기에 태어나 일곱 걸음을 걸으셨다 함은 육도(六道)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욕계와 색계를 넘어 무색계까지 고통의 세계(삼계개고 三界皆苦)라 하신 이유가 확연해 집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삼계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을 내가 편안케 하겠다(아당안지 我當安之)’하셨습니다.

“고해(苦海)서 허덕이고, 화택(火宅)서 몸부림치는 중생을 ‘진리’로써 편안케 해주겠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말씀 하신 이유가 있지요. 깨달음에 이르신 부처님께서 중생계를 살펴  보니 사람마다 모두 부처가 될 종자 즉 ‘불종자’, ‘불성’이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을 보신 겁니다. 따라서 천상천하에 존귀한 사람은 싯다르타 뿐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모두 존귀한 존재인 겁니다. ‘나 홀로 존귀하다’는 건 역설적으로 ‘무릇 생명 있는 것은 모두 다 존귀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갖고 있다는 ‘불종자’도 틔웠을 때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저는 불자라면 누구나 수지하고 있는 오계를 실천하는 게 첫 걸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계를 각각의 나무 다섯 그루라 본다면 비구가 지켜야 할 250계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348계는 다섯 나무 각각의 가지에 해당합니다. ‘살생하지 말라’는 건 자비종자를 틔우는 일입니다. ‘훔치지 말라’는 건 복덕종자를 기르는 일이고, ‘음욕하지 말라’는 건 청정종자를 가꾸는 것이며, ‘거짓말 하지 말라’는 건 진실종자를 다스리는 것이고, ‘술 먹지 말라’는 건 지혜종자를 발현시키는 일입니다.

▲오계에 담긴 의미를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문제는 실천의지일 터인데요.

“바다를 뒤흔든 풍파를 헤치고 보물섬에 도착했습니다. 한 걸음만 내딛으면 눈앞에 놓인 보물 상자를 손에 쥘 수 있는데, 좀 힘겹다고 발길을 돌린단 말입니까? 하늘 위,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사람이 되려고 오계를 수지한 겁니다. 한 걸음만 떼면 됩니다. 좀 버겁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제 오계 중 하나의 계를 어겼다면 참회와 함께 오늘부터 다시 지키겠다는 서원을 그 자리에서 세우셔야 합니다.”

▲오계실천 의지가 퇴색해지려 할 때, 그 의지를 다시 굳건히 할 방도는 없을까요?
“우리 사회 저변에 흐르는 광고를 보세요. 대부분의 광고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탐심을 최대한 끌어 올리려 합니다. 도시에 즐비하게 서 있는 대부분의 시설물 또한 그 맥을 같이 하지요. 오계를 파괴할 만한 술책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오계실천을 개인의지의 문제라 한정하면 제 스스로 포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의지문제라기보다 업장이 두터워서 그런 겁니다. 업장이 조금씩 소멸되기 시작하면 생명의 존엄성을 절감하며 연기로 이뤄진 이 세상을 바로 보게 됩니다. 웬만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지요. 업장을 소멸하는 가장 좋은 방편은 참회기도입니다.

▲ 묘관 스님은 해인사 강원 제3기 졸업생이다. 사진 위쪽 줄 왼쪽부터 명주, 묘관, 창일, 법조, 명철, 명진, 태정 스님. 사진 아래 줄 왼쪽부터 지관, 지월, 운허, 자운, 영암 스님. 묘관 스님은 맨 끝의 한 스님의 법명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부처님 탄생게는 ‘자아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일성일 수 있겠습니다.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과정을 성찰해야 합니다. 자아상실의 첫 발단은 대부분 ‘저 사람은 저 정도’인데 ‘난 이것 밖에 안 돼’라는 상대 비교서 비롯됩니다. 그 격차를 줄이려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 어느 단계에서는 스스로 만족하고 쉼표를 찍어야 하는데, 그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결국 두 갈래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자포자기에 이른 사람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더 큰 욕심만 부리는 사람은 돈과 쾌락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이 세상의 돈과 권력도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잠시 필요한 도구일 뿐이지요. 자신의 존엄성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간에 사는 사람으로서 만족할 줄 안다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출세간에 사는 사람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인간이기에 어려운 듯합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능인자안 지족상락(能忍自安 知足常樂)!’ 참으면 편안하고, 만족하면 항상 즐겁다. 어떻게 참느냐? 시비와 폭력은 ‘나만 옳다’고 고집부리면서 발생합니다. 그러니, 웬만한 일이면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어떻게 만족 하느냐? 무엇이든 ‘감사’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물 한 잔 건네거나, 자리 하나 양보해 주는 것만도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누군가 나를 배려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나와 숨을 쉬며 우리 앞에 놓인 5월의 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경전에 나오는 금귀 중 저희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일언을 전해 주세요.

“과거 일곱 부처님께서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 즉 ‘칠불통게’라 하지요.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알음알이로만으로는 마음이 깨끗해지기 어렵습니다. 수행이 동반 되어야 합니다. 불자님들도 여기에 기반 하셔야 합니다. 바다 속 눈먼 거북이가 100년에 한 번 물 밖으로 나와 구멍 뚫린 판자를 만날 만큼의 인연이 닿아야 사람 몸 받는다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 법 만나기는 더더욱 어렵다 했지요. 지금, 정진하셔야 합니다.” 

▲법보신문 독자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 한 가지 부탁드립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마음 잘 다스리면 행복에 이른다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다만,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보았다고’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눈의 경계에 걸린 착각일 뿐입니다. 기도하시며 경전을 늘 가까이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기에 하루 10분만이라도 참선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묘관 스님 주요 약력

1936년 출생. 1947년 해인사서 정인 스님 은사로 출가. 1962년 10월 해인사 승가대학 3기 졸업. 1966년 9월 해인사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구족계 수계, 1979∼2003년 합천 용흥사 주지. 2003∼2014년 약수암 죽림선원 선덕 역임. 2011∼2013년 조계종 계단위원회 비구니 갈마아사리. 2014∼2015년 조계종 계단위원회 비구니 전계화상. 2016년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원로의원 추대. 현재 합천 용흥사에 주석.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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