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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경주 황룡사-분황사-백률사 일대 순례 현장

부처님이 사는 땅 옛 신라 수도에서 불교와 문화를 품다

▲ 자장 스님의 건의에 따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립한 9층 목탑 등 황룡사의 웅장했던 건축물 모두가 몽고 침입 때 불에 타 소실됐다. 발굴조사를 통해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사찰의 모습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문수보살로부터 법을 부촉 받았음에도 신라 왕족의 일원으로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자장 스님. 어느날 그 앞에 나타나 황룡사 호법룡이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밝힌 신인은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왕업이 길이 편안해질 것이며,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은 이렇듯 자장 스님의 신이로운 경험에서 시작됐다.

신라의 화려한 불교문화 총체
황룡사지서 옛 모습 그려보고
분황사선 원효 화쟁사상 새겨

불굴사지의 석조사면불상과
이차돈 유물 출토된 백률사
불보살 앞 두 손 모아 기도

신행지침서 삼국유사 성지서
“선우 되어 함께 공부” 발원

이렇게 신비로운 일이 어우러져 세워진 경주 황룡사 9층 목탑(645년)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안타깝게도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진 이후, 근래 들어 발굴 작업을 거쳐 드러난 중문·목탑·금당·강당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 원효 스님의 화쟁사상을 떠올리며 분황사 모전탑 앞에 선 순례단.

황룡사와 9층 목탑이 형체를 잃은 지 800년 가까이 된 2016년 4월30일, ‘법보신문 삼국유사 성지순례단’은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던 그 자리에서 “신라의 땅이 곧 부처님이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난 곳”이라는 문무왕(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박사의 설명을 들으며 화려했던 옛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고려시대 국존으로 추대된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는 불교 역사를 비롯해 고승 및 재가불자, 문화재, 신행형태, 영험 등 불교문화 전반이 상세히 기록돼 있어 신행지침서로 불리기도 한다. 그 ‘삼국유사’ 속 성지를 찾아 나선 순례단이 처음 발을 디딘 이곳 황룡사의 9층 목탑과 장육존상은 천사옥대와 더불어 ‘신라의 3가지 보물’로 불렸었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4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됐고, 높이 182㎝에 이르는 치미(옛 목조건물 지붕의 용마루 좌우 끝에 장식된 기와)가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해 이곳이 신라불교문화의 총체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이차돈공양석당’ 등을 직접 보기에 앞서 성덕대왕신종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꽃잎을 펼치기 시작한 황룡사터 노란 유채꽃을 뒤로하고 분황사로 들어서자 모전석탑(국보 제30호)이 순례단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걸작으로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됐다. 최근 들어 전체 높이가 지금의 3층이 아니라 9층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중이다. 분황사는 무엇보다 원효 스님이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의 저술을 남긴 곳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원효 스님을 위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고려 명종이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했으나, 지금은 비석 없이 추사 김정희가 받침돌에 글귀를 새겨 둔 ‘분황사화쟁국사비부’만을 확인할 수 있다.

원효 스님은 이 절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앉아 글을 쓰고, 세상을 바라봤을까. 또 오늘날 우리사회의 온갖 갈등과 다툼을 목도했다면 뭐라고 했을까. ‘화쟁’을 강조했던 옛 선지식의 향훈이 어느 때보다 그리워지는 시절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화두 삼게 하는 순간이었다.

▲ 순례객들은 네 면에 불보살의 상이 새겨진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을 향해 손을 모았다.

원효 스님을 그리며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돌우물까지 확인한 순례단은 차례로 보광전에 들어 약사여래부처님 앞에 엎드렸다. 그 모습은 무엇을 이루게 해 달라는 간절함보다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어, 보는 이들마저 저절로 합장배례하게 했다.

분황사를 나선 순례단의 발걸음은 이차돈 순교 관련 유물이 발견된 백률사로 향했다. 그리고 백률사로 오르는 길목에서 전설 같은 이야기를 간직한 생소한 불상을 만났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제 121호)’이다. 경덕왕이 백률사로 행차할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그곳을 파보니, 4면에 불상이 새겨진 돌이 나와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해서 굴불사다. 이 각각의 면에 새겨진 불보살상은 사방정토에 있는 대표적 상들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사면불상을 가운데 두고 탑돌이 하듯, 두 손을 모으고 불상 주위를 돌아가며 기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순례단원 중에도 몇몇은 그렇게 불상을 돌다 각각의 면에 자리 잡은 불보살을 마주하고 예를 갖추기도 했다.

지금은 백률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이 석조사면불상을 지나면 위쪽으로 백률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률사 역시 예전의 웅장함은 간데없고 조선 선조 때 중창한 대웅전과 자연암벽에 조각된 마애탑이 객을 맞았다.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 중 하나로 꼽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중이다. 또 하나, 이 불상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겨진 유물이 바로 신라불교가 꽃피울 수 있는 시금석을 놓았던 이차돈을 기려 조성한 ‘이차돈공양석당(異次頓供養石幢)’이다.

‘삼국유사’ 속 옛 이야기가 전하는 곳에서 직접 보지 못한 두 유물은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신라불교와 문화를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경주국립박물관은 손에 손 맞잡은 가족은 물론, 어린이·어른 단체 관람객까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 주조를 발원한 후 혜공왕 때인 771년에 완성한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그 종에 새겨진 아름다운 비천상을 눈에 담고 들어선 박물관에서 ‘이차돈공양석당’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차돈 순교 이후 신라는 불교국가로 완전히 탈바꿈 했다. 법흥왕은 흥륜사를 지어 신라에 법륜을 일으켰고, 궁궐을 지으려던 자리는 황룡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신라 민간 신앙의 근거지라 할 남산 역시 불교로 채색되면서 노천의 불교박물관으로 변모하는 등 기존의 전통을 넘어 불교가 신라 땅에 완벽하게 자리 잡게 됐다. 비록 마모가 심해 새겨진 글자를 알아보기는 힘들어도, ‘백률가육면석당비(이차돈공양석당의 본래 이름)’에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는 이차돈 순교 당시의 모습은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례객들에게 한 마디 이르고 있는 듯했다. “서로 갈등하고 다투지 마라. 이 땅이 불국정토가 될 수 있도록 저마다 마음속에 등불을 밝히고 불법을 널리 전하라.”

그리고 순례단은 집으로 향하는 길에 “이 귀한 자산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도록, 부처님을 멘토로 모시고 선우가 되어 함께 공부하는 모임”이 되기를 발원했다.

경주=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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