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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하리티(Hāritī) 또는 귀자모(鬼子母)

질병의 신이 불교로 들어와 다산 상징하는 여신으로 변모

▲ 페샤와르 시크리 사원지의 하리티. 대략 3∼4세기경. 라호르 박물관 소장.

벌써 십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필자가 전남 화순의 한 사찰을 방문했을 때 한국 사찰에서 귀자모상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현대에 조성한 것이었지만 ‘귀자모상(鬼子母像)’이 중국과 일본 등에 다수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사찰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당연히 그 때 만났던 귀자모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경주지역에서 발견된 소위 ‘숭실대학교 소장 귀자모상(또는 九子母像)’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고중세에 조성된 귀자모 상은 국내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초기힌두교나 민간 신앙에선
아이 해친 질병 신으로 존재

마녀 하리티의 만행 알아챈
빔비사라 왕의 도움 요청에
부처님이 직접 교화에 나서

자녀 잃은 고통 경험한 하리티
부처님 가르침서 잘못 깨달아
오계를 수지하고 불법에 귀의

귀자모는 산스크리트 하리티(Hāritī)를 의역한 말이라기보다 불교적 맥락에서 적당히 창안한 말이라 생각된다. 본래는 ‘(아이 목숨을) 빼앗는 여자’의 뜻인데 음사하여 하리제모(訶利帝母), 하리제(訶梨帝), 하리지(訶梨低)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는 더 큰 신들의 집단 개념인 야차군(群) 속에 포함시켜 대야차녀(大夜叉女)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귀자모 상은 대체로 아이의 출생과 죽음, 또는 가족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한다. 어린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을 달래거나, 또는 반대로 아이의 출산을 기원하거나 질병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민중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 귀자모 신앙은 실로 방대한 지역에 걸쳐있는데,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전체에 퍼져있었으며, 네팔 지역에서나(예를 들어 스와얌부나트)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귀자모 신앙이 여전히 살아있다. 이러한 신앙은 문헌과 고고학적 단서들을 통해서, 또는 의례 등을 통해서 추적해볼 수 있다.

아마도 불교적 변모를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이른 하리티의 단서는 쿠샨시대의 간다라(대략 1세기 이후부터)와 마투라의 유적들일 것이다. 이 지역에서 다수의 조각들이 등장하는데 여신이 어린 아이를 안고 있거나 다수의 어린 아이와 함께 등장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는 그녀의 배우자인 판치카(Pañjika)와 함께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 여신은 일찍부터 불교의 독립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것이 분명하다. 힌두교나 다른 지역에서 유래한 신들이 상당수 불교 속에 들어왔지만 독립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부각된 신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리티의 존재는 다소 각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하리티의 존재가 어디서 어떻게 유래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불확실하다.

중요한 점은 하리티 또는 귀자모로 번역되고 있는 이 여신이 불교로 들어오기 이전에 초기 힌두교나 민간신앙 차원에서 어린이를 해치거나 병들게 하는 질병의 신으로서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이러한 흔적은 그 이름 자체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하리티는 ‘(탈취해가거나) 빼앗아 가는 여자’라는 뜻이다. 보통은 ‘하리니(Hāriṇī)’나 ‘하라니(Hāraṇī)’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하리티도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팔의 불교도들이나 힌두교도들은 하리티나 하라티(Hārātī)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석문에는 ‘하라티’라고 명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태아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병(病)을 인격화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라모뜨(E. Lamotte)는 스카라흐 데리(Skārah ḍherī)의 하리티 조각 명문을 번역하면서 천연두를 쫓기 위한 기원문을 찾아낸 적이 있다.

네팔에서 하리티는 또 다른 신 시탈라(śītalā)와 거의 같은 신적 기능을 하는데, 두 신은 천연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다른 여신의 이름 샤슈티(ṣaṣṭhī) 역시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샤슈티는 ‘여섯 번째’라는 뜻인데 아이가 태어난지 6일째 되는 날 이 신에게 아이를 지켜달라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 이러한 여신들의 모습은, 앞서 소개한 적이 있는 스칸다(역시 기원이 불분명하고 질병과 관련이 있다)의 휘하로 재편되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인도의 의학서적을 통해 좀 더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 서울국립박물관. 하리티로 추정되는 여인과 아이들의 상. 지역 및 시기 미정.

하리티 신이 어디서 기원했던지, 이 여신은 불교 속으로 들어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모신(母神)으로서 그리고 아이를 점지하고 보호하는 여신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과정은 불교의 여러 경전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어린 아이를 잡아먹거나 빼앗는 여인의 모습에서 아이의 출산과 성장을 보호하는 신으로 전회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에 따르면 부처님이 라자그리하에 거주하던 때 아이들이 계속해서 행방불명되거나 죽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의 왕이었던 빔비사라는 그 사건이 마녀 하리티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 귀신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부처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 말을 듣고 부처님은 하리티를 직접 찾아 나선다. 그녀의 집에 도착했으나 그 마녀의 아이들 500명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 중에서 부처님은 하리티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막내 아이 한 명을 데리고 돌아온다. 그리고 발우로 덮어 이 아이를 감추고 눈에 띄지 못하게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하리티는 아이가 사라진 것을 알고 미친 듯이 아이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자 법력이 뛰어난 부처님을 찾아와 자신의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호소한다.

그 때 부처님은 하리티에게, 그동안 하리티가 해친 어린 아이들의 부모들 심정을 헤아려보라고 꾸짖는다.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막내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어린 아이를 해치지 않겠노라고 맹세한다. 그제서야 부처님은 발우 아래 숨겼던 하리티의 아들을 보여주는데 그 아들을 빼내려고 해도 하리티가 발우 밑에서 아들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하리티에게 오계(五戒)를 수지할 것과 불법에 귀의할 것을 권하게 된다. 불법에 귀의한 하리티는 마침내 아들과 상봉한다. 이 사연 이후, 부처님은 불법에 귀의한 하리티에게 그의 전생을 들려준다. 왜 500의 자식을 두게 되었음에도 어린 아이들을 해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그녀는 전생에 임신 중이었음에도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다가 도가 지나쳐 아이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 슬픔 속에도 독각승에게 500개의 망고를 보시한 공덕으로 인해 500명의 아이들을 다시 얻을 수 있게 되었고 부처님을 만나 불법에 귀의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 것이었다.

이 내용은 ‘잡보장경’이나 ‘귀모자경’, 밀교경전인 ‘환희모성취법’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또한 중국 구법승 현장(玄奘)과 의정(義淨)을 통해서도 전해지고 있다. 경전에 따라서 이 이야기는 공간적 배경을 달리하면서 증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불교 설화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하리티의 기능적 양면성을 엿볼 수 있는데, 하리티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임신한 여성으로 등장한 하리티는 태중(胎中)의 아이와 마찬가지로 (귀신과 같은) 외부에 취약한 존재이며 악귀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인도의 전통적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하리티와 같은 반(半)악귀의 존재는 과거의 자기 전생과 같은 임신부나 아이에게 위험한 존재일 수 있으며 동시에 수호신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양면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특징은 하리티의 도상에서도 잘 나타난다. 어떤 간다라의 하리티 상은 자비롭게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반면, 또 어떤 도상은 다소 위협적이고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자손을 통해 번영을 누리고자 하는 희망은 비교적 일찍부터 불교 사원 내에서도 강력한 하리티 신앙으로 이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사원 내에서 이 하리티 여신이 차지하는 위상에서 나타난다. 하리티와 판치카를 모신 아잔타 석굴(특히 2번 석굴)은 아마도 대중의 세속적 희망과 불교에 대한 지지를 동시에 얻고자 했던 교단의 흔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신중들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별도의 신단을 갖추고 채색된 석굴과 조상(造像)의 규모 또한 다른 신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 석굴에서 확연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엘로라의 석굴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하리티 상은 현장이 ‘대당서역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손을 얻고자하는 세속적 목적을 위해 불교 신자들에게 상당히 유행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하리티의 신앙이 불교 사원 안으로 유입되어 사원에서도 일정한 공양 의례가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의정(義淨)의 ‘남해귀기내법전’에서는 인도의 모든 사찰의 문과 식당에 하리티 상을 조성하고 그 신에게 공양하면 병든 아이가 낫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에게는 아이를 점지하는 풍습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전통은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나 ‘증일아함경’ 등에서는 하리티에 대한 매일의 공양을 강조하는 대목도 발견된다. 

심재관 상지대 교양과 외래교수 phaidrus@empas.com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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