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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자유를 향산 선택] 2. 싯다르타 태자 출가의 의미

기자명 이필원

욕망에 묶인 세상 발견하고 스스로 택한 ‘위대한 포기’

▲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 간다라. 2~3세기. 인도 캘커타박물관 소장. 유근자 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제공

매년 맞이하는 부처님오신날이다. 부처님오신날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을 의미한다. 우리가 태자의 탄생을 기리는 이유는 태자가 훗날 출가 수행하여, 부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만약 태자가 단순히 왕의 길을 걸었다면, 훗날 우리들이 그분의 탄생을 기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삶으로의 역사적 전환
욕망·근심 버린 자유로의 출발
‘비장한 노력’ 병행돼야 완성

부처님 향한 진실한 믿음 전제
믿음 없으면 수행정신 훼손시켜

‘라훌라’에 준 가장 큰 유산도
무너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출가’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일이 있다. 부처님오신날이 갖는 의미이다. 흔히 불교의 4대 명절이라고 하면, ①탄생 ②출가 ③성도 ④열반이다. 탄생은 역사적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하는 인물의 탄생이니, ‘부처님오신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가는 고타마 태자가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수행자라고 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 역사적 전환점이다. 이렇게 보면 이 날은 제2의 탄생으로 볼 수 있고, 역시 부처님오신날이 될 수 있다. 성도는 출가 수행자 고타마가 드디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신 날이다. 이렇게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명실상부하게 부처님오신날은 깨달음을 얻은 날이 된다. 열반은 궁극적 완성의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열반이야말로 부처님오신날이 된다. 결국 부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신 셈이 된다.

그 가운데, 육신의 오심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출가’가 갖는 의미는 매우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있어, 우리 모두가 붓다의 제자로서 그분의 삶을 따라가는 첫 걸음은 역시 ‘출가’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고타마 태자는 왜 출가했을까? 왜 그분은 화려한 태자의 삶을 버리고, 버려진 헝겊을 기운 옷을 선택했을까? 왜 그분은 사랑스러운 아들과 아내, 그리고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 하고 홀로 외로운 길을 선택했을까? 태자의 출가라는 사건을 두고,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실로 많다. 이러한 질문에 우리가 직접 부처님으로부터 답변을 들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분의 시자 아난다 존자의 입을 통해 우리는 그 이유를 들을 수 있다. ‘숫타니파타’에는 ‘출가의 경’이라고 하는 작은 경전이 들어 있다. 그 작은 경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눈을 갖춘 분께서 출가하신 그대로, 그분께서 생각하신 그대로, 출가를 기뻐하신 그대로 나는 (그분의) 출가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눈을 갖춘 분(cakkhumā)’이란 표현은 부처님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다. 지혜의 눈을 갖춘 분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리의 눈을 갖추신 분이란 의미도 될 것이다. 요즘 우리가 흔히 ‘안목을 갖추다’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보는 눈을 갖춘 분이 바로 부처님인 것이다. 아난다 존자는 태자의 출가를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이 재가의 삶은 거치적거림이 많고 먼지가 쌓이는 장소이지만, 출가는 자유로운 공간이라 보고서 그분은 출가했습니다.’

재가의 삶은 이런 저런 인연의 사슬로 묶인 삶이며, 온갖 근심과 원망 그리고 욕망들이 쌓이는 곳이란 의미이다. 그렇지만 출가의 삶은 사슬로부터 풀려난 삶이며, 근심과 원망, 욕망들을 날려 버린 탁 트인 자유로운 삶의 방식임을 태자는 보고서 출가했음을 말하고 있다.

확실히 재가의 삶과 출가의 삶은 다르다. 재가의 삶에서 출가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해야 한다. 세상에서는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 긍정되지만, 그러한 삶이 지닌 위험을 보고 싫어하는 관점을 갖지 않으면 출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확고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의 삶을 선택한 고타마는 당시 강대국의 왕인 빔비사라의 정치적 권유를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각적 욕망에서 위험과 재난을 보고서, 욕망으로부터의 떠남이 안온이라고 보고서 나는 정진하고자 합니다. 나의 마음은 이것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욕망이 충족된 삶이 편안함을 준다고 본다. 하지만 수행자 고타마는 욕망에서 떠날 때 편안함이 생겨난다고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처럼 달라질 때, 우리는 기꺼이 출가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은 기쁨에 찬 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욕망을 버린 태자의 선택을 ‘위대한 포기’라고 부른다. 정진(padhāna)은 ‘노력’의 의미이다. 수행자 고타마는 욕망을 위험한 것으로 보고, 그것에서 떠나 진정한 평온의 삶을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의 삶을 이후 6년간 이어가게 된다. 여기서 출가의 두 번째 덕목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바로 ‘노력’이다. 재가의 삶을 버리는 것은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삶을 버리고 선택한 출가의 삶에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자기와의 투쟁에서 물러서지 않는 ‘비장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수행자 고타마가 빔비사라왕에게 말한 바는 그러한 삶을 진정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며 선택한 것임을 보여준다.

태자는 삶에서 지쳐서, 뜻대로 세상일이 되지 않아서 도피하고자 출가한 것이 아니다. 태자는 흔히 말하듯이 금수저로 태어나 이미 갖추어진 삶을 기쁘게 포기하고 출가한 것이다. 따라서 니까야의 많은 경전에서는 많든 적든 소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 출가라고 한다.

그럼, 우리는 왜 소유를 포기하고 출가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이 ‘디까니까야’의 ‘마하고윈다 경(Mahāgovindasutta)’에 잘 설해져 있다. 여기서 바라문 마하고윈다는 출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존자들이여, 나는 존자들로부터 받은 재물만 해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나 출가하고자 합니다. 내가 듣기에는 범천이 말한 세속의 비린내들(분노, 거짓말, 기만, 질투, 탐욕, 어리석음 등)을 재가에 머물면서 몰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존자들이여, 그래서 나는 집을 떠나 출가하려 합니다.’

재가의 삶을 살면서 번뇌를 극복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출가의 이유는 바로 번뇌를 극복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이것 외에 어떠한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출가하는 경우도 있다. ‘맛지마니까야’의 ‘더러움없음의 경(Anan. gaṇasutta)’에서 사리풋타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가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벗이여, 양가의 자제로서 믿음 없이 생계를 위하여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이는 출가의 기본은 부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함에도 믿음 없이 단순히 생계수단으로 출가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믿음이 없는 자가 출가하면, 버림을 기반으로 한 출가가 되지 못하며, 세속의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자의 삶을 살기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이러한 믿음이 없이 출가한 사람들은 감각기관을 지키지 못하고, 음식에 절제를 모르고, 수행자의 정신이 없으며, 배움에 전념하지 않고, 사치스럽고 태만하며, 퇴락에 앞장서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출가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너뜨리는 일이 됨을 알아야 한다. 반면 믿음을 잘 갖추고 출가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진실된 수행자가 된다.

또한 ‘맛지마니까야’의 ‘날라까빠나경(Nal.akapānasutta)’에서는 아누룻다, 난디야, 킴빌라자, 바구, 쿤다다나, 레와타, 아난다 등이 출가한 내용을 전하다. 이들은 석가족의 왕족출신이다. 그리고 이때, 이발사 우팔리 역시 출가하게 된다. 이들에 대해서 부처님은 “양가의 아들들이 나에 대한 믿음으로 집을 나와 출가했다”라는 말씀과 함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전한다.

‘그대들 양가의 아들들이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청정한 삶을 기뻐하는 것은 그대들 모두에게 훌륭한 일이다. 아누룻다여, 그대들은 꽃다운 청춘을 갖추고 아주 검은 머리를 하고 있고 인생의 초년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빠질 수도 있으나, 아누룻다여, 그대들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빠지지 않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그대들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것은 왕의 명령 때문도 아니고, 도둑에 쫓겨서도 아니고, 부채 때문도 아니고, 공포 때문도 아니고, 빈궁 때문도 아니다.’

출가는 청정한 삶을 기뻐하는 마음에서, 기꺼이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고귀한 삶이다. 그것은 ‘앙굿따라니까야’의 ‘재가의 경(Gihīsutta)’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진정한 “행복의 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깨달음 후 처음으로 고국 카필라왓투를 방문했을 때, “아버지, 유산을 주세요”라고 말한 라훌라를 출가시킨 것이다. 온갖 재보는 결국은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이기에, 결코 무너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유산으로서 ‘출가’를 건넨 부처님의 뜻을 오늘 다시금 되새겨 보면 어떨까.


 
이필원은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 졸업. 박사과정 재학 중 일본 북쿄대학 박사과정 입학, ‘아라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교수로 ‘붓다와의 대화’(번역) ‘사성제 팔정도’(저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명상 100문 100답’(공저) 등이 있다.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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