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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자유를 향한 선택] 6. 나의 출가이야기

큰 삭도 무명초 자르자 어둠의 장막 걷히는 듯 했다

 
처음이었다. 환희심이라는 의미의 감정을 난생 처음으로 느낀 것은 불교를 접했을 때였다. 제법 긴 시간 다른 종교인으로 활동 했었다. 하지만 늘 마음 한 켠에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공간이 머물러 있었다.

구원 교리에 의문 품던 시기
지장보살 원력 환희로 다가와

‘부처님이 출가 권했다면
분명 희유한 이유 있으리라’
삭발 순간의 감동 지금도 생생

출가 길 나서 대웅 기지 갖추고
고행 능히 이겨 정각 이뤘기에
위대한 성인 부처님 완성된 것

처음 본 불교교리에서 지장보살의 중생구제 서원을 접하게 되었다.

‘어떠한 이유로 지옥에 갔는지는 일체 생각지 않으시고, 오직 마지막 한 중생까지 구원하고자 서원하시고 연민하시는 보살’이라고 했다. 실상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교리로 괴로워했던 터라 이 구절은 내게 뜨거운 감동으로 닿아왔다.

‘참으로 이 세상에 참다운 종교가 있구나’하는 감격이 자꾸자꾸 밀려들어왔다. 몇 날 며칠이 어떻게 지났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깊이 빠졌던 환희심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불교를 믿어야겠다’고 서원하고 조계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종교란 사람들의 잘잘못을 심판하기보다는 자비의 마음으로 구원의 실상을 펼치는 것이 본연의 가치라는 확신이 점점 더 견고해졌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불교 교리의 매력에 흠뻑 빠져 조계사를 다닌지 6개월쯤 되었을 때 하나의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석가세존께서는 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출가수행하기를 그토록 권하셨던가?’

막연한 질문이 들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도 그 의문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께서 권하셨으니 출가에는 반드시 지금 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매우 희유한 일이 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존께서 출가의 길을 권하셨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출가는 순식간에 내 온 맘을 사로잡아버렸다.  삶에 있어서 더 이상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토록 소중히 생각했던 가족과 친구 등 모든 인연까지도 한순간에 빛이 바래고 말았다.

송광사 사자루에서의 삭발은 더없이 큰 감격과 환희 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고향을 향해 배례하고 나자 ‘자르르’ 큰 삭도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오랜 세월 나를 덮고 있었던 무명의 장막이 확 걷혀지는 듯 환한 밝은 빛을 느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무명초라 했던가!

삭발은 단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 아니다. 첫 삭발은 단순한 의식의 차원을 초월했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가득히 환희의 감격이 차올랐다. 마치 어린 시절 대나무로 만든 물총을 쏠 때의 기분이 생각났다. 내 몸통이 대나무 물총이 되고, 치밀어 오르는 감격은 그 대나무총 속에 가득 차오른 물을 힘차게 밀어내는 피스톤과 같았다.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감격에 벅차올라 어찌 할 수없이 몸속의 물 기운들이 눈 주위로 끝없이 끝없이 밀려나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 할 것 같다.

삭발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행자님 속가에 미련이 엄청 많나보네,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걸보니…”
“이래서 어디 중노릇 잘 할 수 있을까?”

환희에 찬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던 나는 아무도 몰래 혼자 빙긋이 미소 지었다. 세상 누구인들 이 엄청난, 벅찬 감격을 알 수 있을까? 나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감격에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세존이 옳았다. 출가는 미련을 가진 세속을 떠나는 일이 아니다. 출가는 지금까지 알지도 느껴보지도 못한 한없는 감동 그 자체다. 지금도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자꾸 그날의 감동이 생생이 전해 올라 자꾸 가슴이 벅차오른다.

참다운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을 자꾸 눈여겨보고 있다. 그들에게 자꾸 출가의 길을 권한다. 이 길의 환희로움에 만나는 사람마다, 소중히 인연 이어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세존이 하셨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출가, 출가 권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

세존께서는 룸비니 동산에 태어남에 위대성을 점지 받은 것이 아니다. 모두가 잠들은 깊은 밤 카필라성을 넘어 출가의 길을 나서면서 대웅의 기지를 갖추셨고, 고행을 능히 이겨내시어 정각을 이루시어 온 세상의 존중사가 되셨던 것이리라.

언제 생각해도 가슴 설레는 이 벅찬 감격을 온전히 전할 수 없어 오늘도 부처님 앞에 지난날의 행복한 추억으로만 펼쳐두고 홀로 행복한 삶의 여정을 꾸려가고 있다. 추억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는 출가의 환희는 지금까지도 늘 내 삶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자양분이 되어 준다.


 
성원 스님은 혜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에서 수다라 편집장을 역임했다. 송광사 율원을 졸업하고 제방선원서 참선정진했다. 한국국제교류단 Koica 자문위원, Unicef 서귀포후원회 자문위원, 서귀포불교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제주 약천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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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만화·복지 불교와 접목
새로운 도전하며 열정 바쳐도
몸 지치고 인간관계는 힘들어

더 바쁘게 사는 스님들 보며
해답 찾고 싶어 출가 결심

여전히 열정 갖고 생활하지만
자신을 잊지 않고 행복 느껴
나와 세상 바꾸는 평화로운 길

출가 전 일을 이야기 할 때, 어른 스님들께서는 가끔 ‘전생’이란 말을 쓰신다. 처음에는 이 단어가 출가 전 삶을 표현하는데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지금은 나도 이 ‘전생’이란 말을 가끔 사용한다. 출가 전과 후의 삶을 표현함에 참으로 적당한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출가전의 삶이 불만인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나로 있게 한 고마운 삶이다.

‘6월 항쟁’으로 불리는 1987년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는 불타는 청춘의 마음으로 최루탄을 맞으며 투쟁했다. 새로운 민주화 법령은 생겼지만 생각과는 달리 세상 사람들의 삶은 같았다. 대학 졸업 후 학원 강사로, 잡지 편집장으로, 만화가로 여러 직업을 가졌다. 내게 맞는 삶을 참 부지런히도 찾았던 것 같다.

불교와 인연 맺은 것은 어린 사촌동생의 49재였다. 이후 불교공부를 시작했고 불교출판사, 불교만화연구소장 소임을 맡으며 10년 이상을 교계와 깊은 인연 지으며 살았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불교사회복지로 할 만큼 불교가 삶의 전부였다.

한번 마음먹으면 미친 듯 빠져드는 성격이라, 일에서도 모든 걸 던졌다. 특히 2000년에 개원한 교계 최초의 불교만화연구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불교만화잡지 판매부터 공모전 후원을 위해 전국을 다 돌아다녔다. 스님들을 만나 활동을 설명했고, 큰 단체부터 조계사 근처의 작은 불교 상점에 이르기까지 발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많은 큰 행사를 진행하고 여러 소임을 맡으며 최선을 다했고, 운 좋게도 결과는 항상 좋았다. 반면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자신과의 싸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더 깊고 고통스러웠다.

충실하고 절실하면 할수록 나 자신은 더 힘들었다. 모든 것에 온 힘을 다해도 마음은 고통 속에 있었고 인연 짓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승속, 성별, 나이, 직위 등에서 오는 갈등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우울할 때도 있었다. 잠자는 시간도 없을 만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쉴 틈이 없었다.

10년 동안 불교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분들이 스님들이었다. 하지만 출가자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나보다도 더 바쁘고 더 많은 일을 해 내는 스님들을 만나면 그에 따라오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아무리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납득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했다. 그 세상이 어떤지, 내가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 보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면 다시 세속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출가 결정은 빨랐고 가족들과의 의논이나 허락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토록 가벼운 출가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면, 그 많은 활동을 접지도 못했을 것이며, 어쩌면 아직도 출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깨달음을 성취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이상적인 목적은 아니었지만, 고통 속에 있던 내겐 무엇보다 현실적이고 절실한 결정이었다. 절실함과 경험은 출가 후 공부와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출가 후 몇 년이 흐른 뒤에야 내가 원하는 답을 얻었다. 물론, 이 과정이 쉬웠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겠다. 마침내 답을 찾을 때까지 수행자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할 만 하다. 아니, 다행 정도가 아니라 가장 큰 복이었다.

출가는 모습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모든 것, 삶 자체를 바꾸었다. 과거 대학 시절에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세상은 여전했고, 재가자로서 불교 공부를 했지만 나를 바꾸지 못했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면서 특별한 것을 얻고 싶어 했지만 실패했다. 순간순간 모든 것에 대해 뜨겁고 열렬했지만 만족된 것은 별로 없었다.

나는 여전히 바쁘고 쉴 틈 없지만, 평온하고 행복하다. 열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기도와 강의, 어린이·청소년법회, 명상법회 등의 여러 활동을 하고 나 자신을 위한 수행을 지속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처럼 많은 이들이 삶의 어려움을 행복으로 바꾸는 모습을 본다.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방법이 여기에 있다. 세상을 변화 시키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꿈을 다른 방법으로 실현 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원하기만 하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확신하며,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행복에 이르기를 바라면서. 이것이 지금 나의 행복이며 새로운 삶이다. 다른 이들의 행복으로 내가 더 행복해지는, 아름다운 나를 만나는 삶의 여행이다. 몸은 같지만 전혀 다른 나다. 그러니 출가 전후를 가히 ‘전생’과 ‘금생’이라 할 만 하지 않은가.

 
금해 스님은 동국대 불교사회복지학 석사, 삼선승가대학, 삼선불학승가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해인사 약수암, 무일선원 무문관 등 선방에서 정진했다. 삼선승가대학 부교수를 역임하고 연담 묘순 스님에게 전강 받았다. 현재 서울 관음선원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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