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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째 두 살로 살아가는 딸의 기적적인 한마디 “사랑해요”

기자명 법보신문

[신행수기 당선작] 총무원장상(대상)-황성희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한 참 바쁜 시간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들여다보니 ‘반야원’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언가 급한 일이 생긴 듯 했지만 바쁜 시간을 핑계대어 좀 늦게 전화를 했다. 딸의 담당 생활재활교사가 전화를 받았다.

폭행·괴성 등 이상행동 표출
담당 선생님 폐쇄병동 권유

무도병이란 난치병까지 발병
법화경 읽으며 일심으로 염불

백련암에서 삼천배 기도정진
딸 고통 거둬달라 눈물로 호소

절수행 40일 만에 일어난 기적
부처님이 내려준 놀라운 가피

“어머니…많이 바쁘시죠?”
“선생님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 가지도 못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언제나 죄인이다. 26년을 두 살 반의 지능으로 살고 있는 딸을 장애인시설에 맡기고 그 주변에서 서성이며 살아가고 있는 미안하고 부끄러운 죄 많은 어미다. 혼자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를 맡겨놓은 것도 미안하고, 그런 딸을 자주 가서 함께 돌보지 못해서 미안하고, 무엇보다 그런 몸을 갖고 태어나게 해놓고 함께 있어주질 못해서 나는 늘 죄인처럼 부끄럽고 미안했다.

하지만 삶은 좀처럼 그런 죄책감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15년 전 혼자가 된 나는 일상을 헤쳐 나가는 일 자체가 너무나 힘겨웠다. 그러나 딸아이 때문에 나를 지키며 살아야 했고, 혼자라는 생각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할 수 없었다. 딸 은영이도 살고, 나도 살기 위해선 우린 헤어져야만 했다. 아이는 장애인생활시설인 ‘반야원’으로 가게 됐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터전을 잡았다. 자주 보고, 자주 돌봐주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며 삶을 재정립해야 했던 시간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간혹 힘들고 지칠 때면 딸을 잊고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 바쁘시겠지만 한 번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7년 전에 난소암수술을 했던 아이라 늘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불편해도 불편하다고 표현하지 못하니 난소에 혹이 10센티나 자라서야 발견해 수술을 했다. 급하게 찾아간 대학병원 의사가 수술을 마친 뒤 그랬다. 아마 많이 아팠을 거라고. 그런데 아무도 몰랐다. 웬만해선 울지 않는 아이가 몇 날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이상해 시설 간호사가 병원에 데리고 갔을 때 아이의 몸속에는 이미 커다란 혹이 두 개가 달려 있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깨자 아이는 고통 때문에 자꾸만 스러졌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파리하게 스러져가는 아이를 두고 일터로 돌아오기 위해 병원을 나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온 몸에는 동전만한 두드러기가 솟아올랐다. 병원을 다녀올 때면 매번 그랬다. 가렵고 흉측한 두드러기가 무서웠다. 그리고 아이가 나를 두고 떠날까봐 두렵고 무서웠다.

다음날 오전 반야원을 찾았다. 새벽녘부터 시작된 5월 봄비가 약하게 흩뿌리고 있었다. 우산을 접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건물이 떠나갈 듯 커다란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건물 안 소리는 오로지 그 울부짖음밖에 없는 것처럼 크고 기괴하게 들렸다. 설마 했는데 딸아이의 소리였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나에게 담당 생활재활교사가 말했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저렇게 울부짖고 물건을 던지고 사람들에게 폭행합니다.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잘 움직이지도 않던 아이가 저래서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병원에 다녀왔는데 입원을 시키라고 합니다. 정신과 폐쇄병동에 한 달 정도 입원시키자고….”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 직업은 음악심리치료사다. 주로 나의 딸과 같은 장애아이들이 치료 대상자이지만, 마음이 아프거나 정신적인 문제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집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병원에서 나는 폐쇄병동에 있는 환자들을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곳은 딸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고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난 죄 많은 어미였다. 원망을 말할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할 수 있는 한 간곡하게 부탁했다.“은영이에게 한 달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은영이 마음을 달래볼께요. 은영이 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저렇게 된 것 같은데, 지금 병원에 보내면 더 아파할 거예요. 한 달만 시간을 주시고, 그때도 안 되면 병원에 보내겠습니다.”

간곡한 부탁에 그곳에서 한 달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때까지 사무실 바깥 어디선가 울부짖고 있던 아이를 누군가 데리고 들어왔다. 그런데 아이의 몸이 조금 이상했다. 얼굴은 눈물범벅인데 허리가 자꾸 뒤로 넘어가고 두 팔을 허우적댔다.

“어머니, 은영이가 ‘무도병’이래요. 검사를 몇 차례 받았는데 원인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무도병요?”
“신경계통의 퇴행성 질환인데 팔다리가 자기의지하고 상관없이 움직이는 병이에요. 그래서 허리가 자꾸 넘어가고 팔 움직임이 많아요. 앞으로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더 나쁜 건 아직 난치병이라 치료방법이 없다고 하네요.”

눈물 범벅이 되어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오랜만에 만난 엄마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면서 울부짖는 딸을 나는 꼭 껴안았다. 딸과 나, 천 길 낭떠러지에 흩날리는 꽃잎 되어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허하고 쓸쓸하고 아프고 무서웠다. 무섭고 두려워 아이를 더욱 꽉 안았다. 내 품에서 아이의 울부짖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날 저녁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책장에 꽂혀 있던 ‘법화경’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치는 가슴의 응어리를 이기지 못하고 어느 틈에 나는 기를 쓰고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나는 무엇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딸아이에게 갔다. 늘 시간이 모자라 뛰어 다니고 종종댔다. 어느 땐 아이 옆에 머무는 시간보다 오가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지만 조금의 자투리 시간도 아이 곁에 있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휘어지는 몸을 부축해 잠시 걷기도 하고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고 귀에다 대고 끝없이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엄마를 용서하라’고 속삭였다.

아이의 마음은 점점 안정돼갔다. 울부짖는 행동도 잦아들고 불안하고 노여운 눈빛도 점차 가라앉았다. 어릴 때 부르던 노래를 불러주면 간혹 함께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몸의 병은 점점 심해졌다. 몸이 뒤틀리는 게 심해지더니 어느 날부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말도 못하고 꼼짝도 못하는 딸아이의 몸과 마음이 되어주고자 애를 썼지만 나에겐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 어느 때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 행복했지만 고통스런 삶을 유지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 내 영혼은 언제나 깜깜했다.

어느 날 문득 아이를 보내는 것이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해줄 수 있는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해 기도를 했다. ‘이생이 이렇게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차라리 빨리 데려가기를… 그래서 다시 건강하고 어여쁜 중생으로 다시 태어나기를…내 딸 은영이는 여태 세상에 태어나서 나쁜 짓 한 번 안하고, 나쁜 말 한 번 안하고, 나쁜 생각도 한 번 안하고 보살처럼 살았으니까.’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합천 백련암에서 삼천배 기도를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절이라 육체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고통을 끝까지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과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마음의 갈등이 더 고통스러워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순간순간 가슴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응어리들이 숨을 멎게 만들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갑갑함에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부처님 살려 주세요. 은영이의 고통을 제발 거둬주세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다면 어서 부처님 곁으로 데려가 맑고 청정하고 건강하게 다시 태어나게 해 주세요. 살려주세요 부처님….’ 아파서 구부러지지 않는 다리를 접고 또 접었다. 꼼짝 못하고 누워 두 눈만 반짝이고 있는 아이를 떠올리며 일 배 일 배를 더해갔다. 어느 순간 나는 ‘은영이’를 부르고 있었다.

‘은영아! 살려줘…. 엄마 살려줘…. 제발 살려줘 은영아!’

저녁에 시작한 절은 밤새 계속됐고,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새벽이 밝았다. 삼천배 절이 끝날 즈음에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겸허함과 뿌듯함이 솟아올랐다. 그날 이후 나의 하루는 절수행으로 시작됐다. 매일 삼백배의 절을 하며 하루하루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40여일 지난 어느 날 아침, 아이의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문자하나가 도착했다.

‘어머니. 은영이가 일어나서 걷고 있어요!’ 그리고 함께 전송된 사진 속에 살이 쏙 빠진 딸아이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제까지도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아이가, 근 2개월을 그렇게 누워있었는데 정말 일어나 걷고 있었다. 반야원으로 달려갔다. 나를 본 아이가 “어…음…마…!”라고 부르며 다가왔다.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아이를 끌어안았다. 주위에 있던 다른 식구들과 선생님들이 신기하게 우리를 바라보았다. 은영이가 말을 했다. “어…으…음…마… 다랑…해여.” 특유의 아기 같은 목소리로 선생님들이 매일 가르쳐준 그 말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딸아이의 몸 상태는 한동안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했다. 어느 정도 말을 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보면 이름을 말하고, TV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약으로 무도병 증세를 조절하면서 미세한 몸의 떨림을 제외하면 거의 나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래 걷지는 못하지만 산책하고, 노래하고, 말을 시키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따라 하기도 한다. 전에는 전혀 하지 않던 말을 해 함께 사는 가족들과 선생님들을 놀래키기도 한다.

많이 달라진 은영이의 모습을 반야원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킨 은영이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주고 있다. 그런 관심과 사랑 속에서 이제 은영이는 행복한 모습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나를 반긴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오직 부처님만이 살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온전히 맡겼을 때, 은영이를 나의 딸이 아닌 고통 받는 중생으로 받아들였을 때 부처님께서 내려주신 사랑이었다. 지금도 나는 아침마다 삼백번의 절을 하며 원을 세운다.

“삼세의 모든 불보살님을 위해 이 기도를 바칩니다.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이 기도를 바칩니다. 몸과 마음의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이 기도를 바칩니다.“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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