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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 뜨니, 답답하고 힘들던 군대가 벅찬 수행현장

기자명 법보신문

[신행수기 당선작] 불교방송 사장상-상병 이건한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스물 넷 겨울, 다소 늦었지만 군에 입대한지도 벌써 오백일이 지났다. 군 생활은 반년여 남았고 전역 후 나이는 벌써 스물일곱을 바라본다. 입대 전 사회 경험을 많이 쌓지 못한 탓에 스스로가 군 생활을 통해 성장하고자 하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꿈꾸었던 외적, 내적인 성숙을 충분히 이루었는지 내게 묻는다면 답은 ‘아니요’다.

군복무하며 내면갈등 커져
수행 강조하는 불교 선택

설법 매번 열심히 들으며
일상 속에서의 수행 결심

보이지 않던 의미에 집중
마음 바꾸니 모두 새로워

집착 않는 마음의 유연함이
번뇌 벗어나 사는 길 확신

체력단련은 피곤함을 핑계로 소홀히 했고, 겉으로 보이는 성격과 달리 내 속마음은 가시가 돋친 듯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남들은 잘 모를지라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마음과 행동의 엇박자가 커질수록 풀기 힘든 답답함만이 커져갔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좋다는 책이나 글도 많이 찾아보았지만 근본적인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고민하는 날이 길어질 무렵, 문득 불교에 입문해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종교를 그리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불교란 맹목적인 신앙추구보다 내면의 수행을 강조하는 종교였다.

그렇게 찾아간 군대의 ‘절’은 외부의 절과 많이 달랐다.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병사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오다보니 평범한 사찰의 경건함보다는 요란한 생기가 흐르는 곳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적어도 법회가 시작된 후에는 말씀의 무게가 눈꺼풀을 누르는 몇몇 전우들을 제외하고 설법에 귀 기울이는 병사도 많았으니, 그 나름의 특징이라 생각된다.

애초에 목적을 확실히 하고 찾아갔기 때문에 법회가 진행되는 동안은 마음을 크게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임했다. 법회가 끝난 뒤에는 반드시 그날 설법의 요지를 정리하여 수첩에 메모했고, 일정기간 집중적으로 실천하는 시기를 가지는 식으로 일상 수행을 시작했다. 그 덕분일까? 하루하루 믿기 힘든 변화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첫 번째 법회와 두 번째 법회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인간의 마음이 지닌 큰 힘에 관한 깨달음이었다. 법사님께서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존재하는 육신이 진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사건, 그리고 나라고 느끼는 자신마저 전부 내 마음이 끌어당겨 만든 것이라 하셨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사상이었다. 이 말은 즉 하루에도 몇 번씩 배고프고, 졸리고, 피곤하고 귀찮음을 표현하는 내 몸과, 이 몸이 보고 듣고 만지는 세상이 작디작은 내 마음 하나에서부터 만들어졌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마음만으로 현실 세계를 바꾼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스스로에게 절실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에, 일단 행동으로 도전해 볼 필요가 있었다.

군인인 우리는 매일 아침 7시에 연병장에 모여 점호를 받고 체력단련을 실시한다. 이 때 모두가 기피하는 것이 흔히 ‘알통구보’라고 부르는 것인데, 흔히 TV에서 보는 것처럼 웃통을 벗고 뜀걸음 코스를 따라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이른 아침에 실시하다보니 봄, 가을, 겨울에는 춥거나 쌀쌀하고, 여름에는 무더위 탓에 땀을 줄줄 흘리게 하니 보통 사람이라면 기피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 당시는 1월 초였다. 동장군의 힘이 절정에 다다르는 시기다. 무거운 군화를 신고 뛰는 것보다 영하의 날씨와 바람 앞에서 옷을 벗는 것 자체가 살 떨리게 멀리하고픈 일이었다. 실제로 베레모를 5분만 벗어두어도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정도라면 이해될지 모르겠다.

첫 도전으로 이 고통의 구보 시간을 변화시켜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처음 배웠던 가르침들을 떠올리며 고민해보니 의외로 답은 금방이었다. 우선 마음보다 앞선 구보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생각은 바로 몸의 거부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척 했겠지만 솔직하게도 내 마음은 알고 있었다. 이른 아침 이 단련이 강한 면역력과 체력, 정신력까지 모두 높여주는 일이라는 것을. 현역 군인일 때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단지 내 육신이 느끼는 고통만이 여과되지 않고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몸이 보내는 잡다한 생각은 다 접어 보기로 했다.

오직 내 마음이 알고 있는 대로만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물론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내 피부는 여전히 닭살을 곤두세우고 강렬한 추위 자극을 주며 경고음을 울려댔다. 땡땡땡…. 그만! 이것은 단지 본능적인 욕구에 따른 반응이다. 본능을 뛰어 넘어 더 높은 가치와 본질에 내 몸을 맡겨야 할 때였다.

정신을 집중하고 내 마음에서부터 자극에 동요하지 않으니 이내 놀라운 변화가 느껴졌다. 구보 코스를 달릴 때면 추위에 가려 느끼지 못했던 이른 아침의 신선함과 상쾌함이 전해져 오기 시작한 것이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시간의 하늘빛은 서늘함 속에서도 부드러운 따스함을 감추고 있었고, 바람은 여전히 차지만 순수하고 조용한 아침의 기운과 맞물려 그 차가움이 오히려 내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채워주는 듯하였다.

아!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마음이 달리고자하니 무거웠던 두 다리도 한 층 가볍다. 그렇게도 싫었던 추위 속 달리기가 처음으로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여태까지 이런 감각이 내 안에 숨겨져 있음을 모르고 지내온 시간이 안타까웠다.

다음으로 기세를 몰아 그간 비슷한 이유로 기피하던 일들을 하나하나 극복하기 시작했다. 군인을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새벽 시간 근무, 잦은 청소, 일과 후에 실시되는 체력단련 등등 각기 사소하지만 보이지 않던 의미에 집중했고, 보지 못한 것을 보고자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몇 달이 지난 지금은 예전만큼 그 모든 것들이 힘들지 않다. 비록 몸이 거부하더라도 그 몸을 움직이는 내 마음이 동하면 힘들어도 힘들지 않게 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껍데기가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할 때 이를 한번은 걸러낼 마음만 있으면 되는 문제였다. 본능의 껍질을 한 꺼풀 들어내고 나면 그 밑에는 마음이 보는 지혜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일체유심조! 이것이야 말로 진실로 내 마음이 끌어오는 세상인 것이다.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뜨니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옴을 느낀다. 이것이 나의 소중한 첫 깨달음이었다.

이후 몸과 마음은 한결 가볍고 평온해졌으나 무언가 얽매인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무의식과는 별개로 의식적으로도 선한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압박감 같은 것이었다. 때마침 이 무렵, 법사님께서 “너무 옳은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나쁜 길에도 치우치지 말라. 진정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으니 삶에는 중간을 걷는 ‘중도’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설법하셨다.

내게 부족한 것은 바로 선(善)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치우침이었다. 애초에 선악(善惡)을 부족한 나의 잣대로 구분하는 것은 절대적이라 할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행위의 주체와 의도에 따라 달라질 뿐,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는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보편적인 질서와 법, 그리고 반인륜적이라고 부르는 행위에 대한 경계점이 있을 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자의적인 해석일지는 모르나 이 기준에 따라 선악의 나눔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유연함을 얻는 것이 번뇌를 벗어나는 삶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길이라는 것이 내 작은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선과 악에 너무 얽매이지 않되, 지속적인 정신수행을 통해 ‘선업’과 ‘덕’이라고 부르는 생각과 행위가 자연스럽게 의식 속에 흐르도록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라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지금은 내 생각과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때면 잠시 멈추고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너무 의식한 채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닌지, 부득이하게 나쁜 일을 하였을 때는 반드시 반성하고 개선의 계기로 삼고 있는지 말이다. 이제는 그 어느 쪽의 결과에도 연연하고 얽매이지 않으려 하니 일상의 근심과 걱정 또한 많이 줄어들었음을 느끼고 있다. 단지 내 안의 바른 불성이 보는 길을 따라 치우침 없이 걸으려 하면 될 뿐이니.

가끔 이런 생각이 흐려질 때면 전도몽상(顚倒夢想)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이 순간 어떤 길이 진리에 더 가까운 것인지, 일시적 욕심이 헛된 꿈을 우선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멈추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길 위에 서는 것을 바로잡는데 큰 도움이 된다. 더불어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불교적 가르침의 근본이 다르지 않고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그 자체로도 일상 수행의 재미와 감동이 더해짐이 느껴진다.

올 3월 초 휴가를 갔을 때 내 반쪽이라 여기던 애완견 사랑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도움이 된 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이었다. 일전에 법사님께서 “영원한 것은 없으니 눈앞에 주어진 상황에 마음을 일희일비하지 말라. 모든 것은 계속해서 변한다”고 하셨다. 잊으려는 마음조차 아팠지만 이 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 되지 않을 것임을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잦아들면 마음도 분명 안정을 찾아갈 터이니 그 생각에만 집중하며 슬픔 속에 나를 온전히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했다. 휴가 마지막 날에는 가족들과 근처 절에 들려 사랑이의 극락왕생을 빌어주고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부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다음날 법회의 가르침은 이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법사님은 “우주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항시 우리를 도우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무엇 덕분에’와 같은 마음씨로 감사하며 그 도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이번 일에 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 만큼 상황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비슷한 말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던가. 언제나처럼,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다.

‘마음공부를 하자.’

작은 고민에서 비롯된 이 결심이 부처님과 큰 인연을 맺는 복이 되어 돌아왔다. 법사님께서는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매주 한 번의 법회일 뿐이라도 이곳에 찾아온 여러분의 세상 보는 눈을 새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고작 세 달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벌써부터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과, 세상이 더욱 넓고 밝은 빛으로 가득 차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를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나의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할 일이자 몫이다.

다짐하건대, 나는 전역 후에도 변함없이 불법(佛法)과의 연을 이어 평생을 통해 큰 깨달음과 덕을 쌓고자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나의 경험들이 다른 이에게 부처님의 법을 찾아가도록 하는 작은 빛이 되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끝으로 언제나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셨던 육군 제 6군단 군종장교 불이사 법사님께 현역 군인의 예로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를 전해드리고 싶다. 진군(進軍)!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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