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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 감성

기자명 함돈균

다시 거리는 색색이 붉고 노랗고 연둣빛이다. 하늘에 걸린 작은 연꽃 행렬은 우리가 현대적이고 서구적이며 도시적인 삶에 익숙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역사와 문화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저변의 신심과 감성을 일깨운다.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자라서기도 했지만, 우리를 둘러싼 삶의 ‘현대적’ 풍토와 교육의 산물 때문에라도 도시 아이였던 나는 어릴 때는 ‘연등’을 친근한 사물로 여기지 못했던 듯하다. 그런 감성이 어쩌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친숙했던 신앙에 대한 배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나이가 한참이나 먹게 되어서였다. 최근에는 이런저런 일로 불가와 친해지면서 불자가 아니면서도 절을 제법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 되었다.

감수성의 회복이라고 할 만한 개인적 변화가 있은 후에야 비로소 나는, 이렇게 하늘에 파스텔톤으로 걸린 아름다운 꽃들의 음력 사월 밤거리가 연애하기 최적인 도시 풍광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감수성은 사물에 대한 상상력으로 확장되기도 하였는데, 언젠가 그 상상력은 세계적인 두 종교 축제를 상징하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연등의 비교에 관한 것으로 촉진되기도 하였다. 나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연등이 중요한 인문적 관점의 차이를 표상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일단 크리스마스트리와 연등 사이의 형상에서 큰 차이를 발견한다. 크리스마스트리는 하나로 서 있는 반면에, 연등은 늘 여러 개의 ‘행렬’이다. 그래서 성당이나 교회 앞에 세운 크리스마스트리는 한 그루 나무를 크게 세울지언정 나무로 ‘숲’을 만들지는 않는다. 반면 연등은 크기가 작은 등들이 여러 개 늘어져 있으며, 다양한 빛의 행렬이다. 다른 식으로 말해서 연등은 작지만 여러 개의 개별성이 같은 높이로 이어져 하늘에 내걸린다. 그래서 연등(燃燈)은 연꽃으로 피었다는 의미에서 연등(蓮燈)인 동시에 이어져 있다는 뜻에서 연등(連燈)이기도 하다. 둘은 공통점도 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연등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밤이라는 것이다. 둘 다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사물일 때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는 이러한 외형적 모습에서 두 종교 간에 존재하는 세계관의 차이를 암시받는다. ‘하나’인 크리스마스트리는 나무의 형상으로 ‘수직적인’ 이미지로 서 있다. 그것은 유일신이면서 구원자가 지닌 유일무이한 절대성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반면에 연등은 작고, 다양한 빛깔로, 서로 같은 높이에 줄지어 있다. 불교에서 엄밀히 말해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부처(buddha)라는 말 자체가 다만 ‘각성한 존재’라는 뜻일 뿐이지 않은가. 부처는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 같은 천지창조와 인간 구원의 유일무이한 실행자가 아니다. 부처란 명칭 자체가 ‘여호와(야훼)’처럼 특정한 신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며, 모든 인간에 내재한 참된 가능성을 뜻하는 ‘보편 명사’다. 의미심장한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해, 그러니까 범상한 인간이 각성된 존재로 진화하는 것은 특정한 유전적 구조나 우주의 신비한 선택이 아니라고 본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무지한’ 상태를 벗어나고자 마음먹는 그 순간 이미 일상인은 각성의 잠재적 담지자인 ‘보살(Bodhisattva)’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주 간단하게만 알고 있는 불교의 이런 세계관을 난 연등의 이미지에서 읽곤 한다. 저 작은 불빛들은 나태한 일상과 편견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삶 자체를 그런 거짓인식 안에 가둬두었던 평범한 개인들이, 그 상태를 깨고 나오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그런 개인적 각성들이 저렇게 공중의 연등들처럼 비슷한 높낮이에서 ‘연대’를 이룰 때 그것이 각성된 개인들이 모은 힘들로 만들어나가는 불국토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불국토는 모든 갈등과 불만이 해소된 기독교적 파라다이스라기보다는 각성된 개인들의 공동체가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총선이 끝나고 바로 맞이한 ‘부처님오신날’이다. 변화의 기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동네와 사람들에게서 의미심장한 변화와 각성의 열망을 본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부처님은 구원자로 ‘오시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각성된 개인들의 연대가 출현하는 그 자리가 바로 불국토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husaing@naver.com
 

 [1344호 / 2016년 5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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