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 실천력이 미약한 한국불교

기자명 김정빈

종교의 힘은 실천서 나온다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를 중심으로 하는 테라와다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로 대표되는 대승불교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고, 그 힘이 ①통일된 교리, ②현실성, ③명상 수행에 있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중 ①에 대해 2회에 걸쳐 논의했으므로, 이제는 ②현실성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육바라밀과 팔정도 성패
실천 여부에 달려 있어
테라와다 불교 실천력으로
한국불교 약점 보강해야

필자가 현실성을 거론하는 취지는 종교의 실천성과 관련해서이다. 종교는 단지 믿기만 하는 체계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체험에 이르고자 하는 체계이다. 종교는 신자에게 신념을 제공하고, 그 신념은 실천을 통해 구현되며, 그 구현을 통해 신자는 안심입명을 얻게 된다. 단지 신념만을 갖고 있을 뿐 실천이 없으면 종교의 힘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신념은 신념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미약한 신심이라는 의미이다.

한국불교의 실천력은 어느 정도일까. 필자가 보기에 한국불교의 실천력은 테라와다 불교의 실천력에 비해 약한 편이다. 잘 알려져 있듯 테라와다불교를 대표하는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서 불교를 제하고 사회 현상을 논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에 비해 한국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은 제한적인데, 이는 한국불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기 때문이며, 그러한 적은 영향력은 실천력의 미약에 뒤따라온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테라와다불교는 교리가 매우 간결한 사성제로 요약되어 있고, 실천 항목 또한 좁게는 삼학, 조금 넓게는 팔정도이다. 불제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 팔정도는 ①정견(正見), ②정사(正思), ③정어(正語), ④정업(正業), ⑤정명(正命), ⑥정정진(正精進), ⑦정념(正念), ⑧정정(正定)이며, 이중 ①, ②를 혜학으로, ③, ④, ⑤를 계학으로, ⑥, ⑦, ⑧을 정학으로 묶으면 삼학이 되며, 테라와다불교는 이를 실천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는 어떠한가. 대승불교 또한 삼학을 말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대승불교는 삼학보다 더 많이 육바라밀을 말하며, 육바라밀은 ①보시(布施), ②지계(持戒), ③인욕(忍辱), ④정진(精進), ⑤선정(禪定), ⑥반야(般若) 등 여섯 덕목으로 짜여 있다. 

육바라밀은 더 확장돼 십바라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십바라밀은 육바라밀에 ⑦방편(方便), ⑧원(願), ⑨역(力), ⑩지(智)를 더한 것인데, 이들은 독자적인 덕목이라기보다는 육바라밀을 보조하는 바라밀이다. 즉 방편은 보시, 지계, 인욕을, 원은 정진을, 역은 선정을, 지는 반야를 보조하는 바라밀이다. 이런 보조적인 성격 때문에 십바라밀을 이루는 뒤의 네 덕목은 탈락하여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을 대승불교의 실천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육바라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팔정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육바라밀은 팔정도를 재편성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육바라밀의 지계는 팔정도의 정어, 정업, 정명(삼학의 계학)을 하나로 묶은 것이고, 정진은 팔정도의 정정진, 선정은 팔정도의 정정과 온전히 같으며(삼학의 정학), 지혜는 팔정도의 정견, 정사(삼학의 혜학)에 해당한다. 이렇게 되면 육바라밀이 팔정도와 다른 점은 보시와 인욕뿐이다. 그런데 이들 덕목이 테라와다 불교에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팔정도의 정정진을 넓게 해석하면 인욕을 수용할 수 있고, 보시는 테라와다불교에서 팔정도를 수행하기 전 단계에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현장에서 테라와다불교인들은 보시를 육바라밀에 포함하고 있는 한국불교인들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생활화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은 보시뿐 아니라 팔정도(삼학) 자체를 실제로 실천하는 신행 생활을 한다. 그에 비해 한국불교인들은 육바라밀을 말로만 욀 뿐 실천은 등한시하는 편이라고 해야 한다. 심지어 한국불교인들 중에는 육바라밀을 덕목을 외지도 못하는 이들까지 있는 형편이다.

 실천력이 약한 종교가 힘을 갖기는 어렵다. 종교는 교리를 아는 데서 끝나는 체계가 아니라 실천으로써 체험하고, 그 체험이 자신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체계인데, 한국 불교는 이 점에서 큰 약점을 보이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그에 대해 다음 주에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김정빈 밝은불교신행원장 jeongbin22@hanmail.net
 

 [1344호 / 2016년 5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