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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국제포교에 나선 까닭은-상

“40년전 미국 처음 갔을때 세계일화 발원했습니다”

▲ 필리핀 천주교당의 교인들이 아기예수(Santo Nino)를 모신 가운데 불광산을 순례하고 있다.

“불광산 창건 이후인 1975년 정부에서는 미국 건국 200주년 경축행사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또 저를 파견하였는데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니 저에게 불교를 위해서 한바탕 사업을 펼쳐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삼천 세계에 두루 비추고 불법의 법수가 오대주에 널리 흐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마음에 중생제도의 자비원력을 품고 몸은 법의 바다와 같이 배를 묶어 두지 않으며 일생으로 무엇을 추구했는지 나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빈승은 끝없이 ‘평안함과 행복으로 오대주를 비추리라’라고.”

빈승은 동년에 출가한 이후로 자신의 앞날을 이끌어줄 좋은 인연이 달리 없음을 자각하면서 가장 먼저 뜻을 둔 것은 절 집에 살면서 밥 짓는 소임을 해야겠다고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남경 서하사와 초산에 있을 때 간혹 채공을 대신하여 음식을 만들게 되면 모두들 칭찬해 주었기에 자신이 음식을 하는데 소질이 있다고 빈승은 느꼈습니다.

밥 짓는 소임을 맡고 매일 대중들과 인연을 맺는 것도 인생에서 하나의 즐거운 일이지만 불교의 낙후한 병폐는 인재가 없고 교육이 없으며 청년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문화와 교육적인 면으로 불교에 이바지 하고 싶다고 빈승은 발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단지 미약한 생각뿐이었지 큰 원력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1963년 정부에서 빈승을 인솔자로 하여 중국불교회를 대표하여 동남아 방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화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어서 많은 독자들의 환대를 받았지만 저 개인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 방문에 대한 소감과 기록은 전부 ‘해천유종(海天遊踪)’이라는 책에 담겨 있습니다.

불광산 창건 이후인 1975년 정부에서는 미국 건국 200주년 경축행사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또 저를 파견하였는데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니 저에게 불교를 위해서 한바탕 사업을 펼쳐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삼천 세계에 두루 비추고 불법의 법수가 오대주에 널리 흐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성공여부에 상관없이 저 자신의 안락은 마다하고 천하에 불법을 널리 펼치겠다는 원력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광산에서 총림교육을 더욱 잘 시켜 국제적인 홍법 인재를 길러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40~50년 전 대만 불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젊은이가 아주 적었기에 청년 학인 가운데 누군가 영어를 배우면 저는 매월 7500원의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불법을 홍법 포교하고 세계와 왕래하려면 필히 국제통용 언어를 할 줄 아는 국제적인 인재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기만 하면 저는 학생들이 외국에 나가도록 격려해주었고 인도성지 순례로서 불교에 대한 신심을 키우도록 하였고 유럽이나 미주지역의 여행으로 자신의 시야를 넓히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앞날이 험난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이러한 마음과 원력이 있으니 성공여부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국제적으로 홍법 포교를 하게 된 것은 땅을 기증할 테니 얼른 사람을 파견해서 절을 지어달라는 미국 신도 왕량신(王良信) 거사가 미국 LA에서 걸어온 전화를 받고서 입니다. 그 당시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저에게 절이나 땅을 주겠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지만 인재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던 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뉴욕의 응금옥당(應金玉堂)은 대승사를 저에게 맡아달라고 했고 캐나다의 첨려오(詹勵吾)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땅 170에이커(1에이커=4047㎡)를 저에게 줄 테니 ‘세계불교홍법센터’를 개설하자고 했습니다. 왕량신 거사의 끊임없는 재촉과 요청으로 저는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자장 스님과 영어를 할 줄 아는 의항 스님에게 2만 달러를 조성해 지원하면서 미국에 가서 절을 창건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신도들도 아주 흥분하여 타이베이 원산대반점에서 환송의 자리를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여 조사를 해보니 그 땅은 종교구역 내에 있지 않아서 주택만 지을 수 있고 사찰은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 하우스 한 채가 적어도 10만 달러나 되는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단지 2만 달러 뿐인데 어떻게 사찰을 창건할 수 있겠습니까? 두 제자는 다시 대만으로 돌아올 심산으로 사찰건립이 어렵다면서 대만으로 돌아오는 게 좋겠다고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너희는 이미 원산대반점에서 사람들의 열렬한 환송식도 받았는데 그냥 돌아오면 무슨 얼굴로 대만에 있는 어른들을 대할 것이냐. 며칠만 기다려라. 내가 심정 스님과 바로 미국에 가마”라고 곧바로 경고를 하였습니다.

신도가 기증한 땅에 절을 지을 수 없고 집 한 채를 사려고 해도 10만 달러가 넘는데 불광산이 부담할 수 있는 여력은 오직 2만 달러이니 어떻게 해야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왕신량 거사의 차를 타고 LA의 큰길 작은 길 이곳저곳을 돌아 다녔습니다. 셋째 날 황혼 무렵 길을 지나고 있는데 자장 스님이 길가에 있는 작은 교회를 가리키면서 “이 교회가 매물로 나왔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매매가가 20만 달러에요”라고 했습니다. 빈승이 “우리 한번 들어가 보자”고 했더니 “보더라도 사지도 못할 걸 무슨 소용이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20만 달러짜리 물건이 어떤지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들어가 보니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교회에 응접실, 사무실이 있었고 그 옆에는 4~5명이 살 수 있는 숙소가 있었으며 또한 어린이 집 용도의 교실이 한 칸 있었고 40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들이 미국에서 발전하고자 하는 최초의 공간으로 아주 적합하였지만 20만 달러는 실제로 천문학적인 숫자였습니다. “은행에서 대출받으시면 되잖아요”라고 옆에 있던 왕양신 거사가 말했습니다.

빈승은 일생 남들에게서 돈을 빌려본 적이 없었기에 ‘대출’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대만에서 불광산 창건초기에 은행대출을 받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은행에서는 일말의 고려도 없이 “절은 대출받을 수 없어요”라고 단번에 거절했었습니다. 설마 미국의 법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서 왕 거사의 건의에 따라 은행을 찾아 갔습니다.

“대출을 받고 싶다”는 말을 들은 미국 은행의 매니저는 우리를 특별히 융숭하게 접대하면서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우리는 보증인이 없어요”라는 제 말을 들은 매니저는 아주 의아하게 물었습니다.

“왜 보증인이 필요하지요? 당신들이 산 교회가 바로 보증이잖아요.”

저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쉬운 일이 있나 싶어서 바로 그 사람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미국에 살지 않고 대만에서 살고 있는데 상관없나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대만에 우리 미국은행이 있으니 그 곳에서 분할 납부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우리 불광산의 일행들은 2만 달러를 첫 할부금으로 내고 이 교회를 사들여서 절로 바꾸고 이름을 ‘서래사(西來寺)’라고 했는데 “중국의 불법이 서쪽에서부터 미국으로 왔다”는 뜻으로 마침내 “위대한 불법이 서쪽으로부터 왔다”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광산이 국외에서 사찰을 짓는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절로 바꾸는 것은 서양에서는 신기한 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우리가 홍법 포교하는 상황에는 굴곡을 겪게 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신도들이 예배를 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는데 중국의 신도들은 절에 와서 예불을 마치면 집으로 가지 않고 절밥을 먹으려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겨우 7~8명이 식사할 수 있는 주방시설로 어떻게 신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미국에서는 차가 없으면 외출을 못하니 세상을 알 수 없고 텔레비전을 살 돈 조차도 없는데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개방된 나라 미국에 살고 있어도 날마다 ‘무문관’ 수행을 하는 ‘방’에 갇힌 것과도 같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45호 / 2016년 6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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