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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백거이와 조과도림선사

기자명 명법 스님

조과 선사 촌철살인 한마디 말에 백거이 은인의 삶 추구

▲ 남송 양해(梁楷, 12-13세기 활동, 정확한 연대 미상)의 팔고승도권(八高僧圖卷) 중 ‘백거이공백거역공알·조과지설’. 중국 상하이박물관 소장.

나무 둥지에 웅크리고 앉은 선사와 그 앞에 관복을 입고 합장하고 있는 벼슬아치를 그린 이 장면은 한국 사찰벽화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는 그림으로, 남송대 화가 양해(梁楷)가 그린 ‘백거이가 합장하며 여쭙자 조과 선사가 말씀하시다(白居易拱謁, 鳥窠指說)’이다.

위험한 나무 위 정좌한 선사
공손히 머리 숙인 고관 모습
당 말기 지식인의 삶 드러내

유가적 정치개혁 꿈과 기개
투쟁·모함 난무 정치에 꺾여

스님들 교류하며 함께 결사
스스로를 ‘향산거사’라 불러

밖으로는 유가로 몸을 닦고
안으로 불교로 마음 다스려

양해는 그 특유의 감필법으로 나무 위에 몸을 웅크리고 얼굴만 드러낸 조과 선사(鳥窠道臨, 741~846)의 튀어나온 광대와 이마, 부릅뜬 눈을 그려 선사의 카리스마를 표현했는데, 백거이를 향하고 있는 선사의 오른손 집게손가락만으로도 선사의 날카로운 선기를 느끼게 한다. 등을 굽혀 공손히 합장하고 있는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모습은 그것과 대조를 이루어 이 장면의 팽팽한 긴장감과 생생한 활력을 더하며, 그 옆에 엉거주춤 서 있는 하인의 모습은 다시 한 번 이 장면의 예외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조당집’ 3권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백거이가 항주자사로 부임하였을 때(822) 도광(韜光) 선사와 왕래를 했다. 도광 선사가 조과 스님의 괴벽을 말하는 것을 듣고 조과 스님을 찾아갔더니 과연 듣던 대로 스님이 나무 위에서 단좌하고 계신 것이었다.

“스님, 나무 위에 계시면 너무 위험하니 속히 내려오십시오.”

조과 선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태수, 사실은 그대가 있는 곳이 더 위험하네.”

백거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뜻을 몰라 반문했다.
“저는 조정의 관리이고 지위가 강산을 제압하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번뇌의 불이 그치지 않고 생각이 서로 다투니 어찌 위험하지 않은가?”

백거이가 다시 물었다.
“무엇이 선적인 지혜입니까?”

조과 선사가 말했다.
“악은 모두 행하지 말고 선은 모두 받들어 행하라. 그 뜻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백거이가 말했다.
“그것은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아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뛰어난 견해가 없는데요?”

조과 선사가 엄숙하게 말했다.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지만 백세 노인도 하기 어렵지.”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해당되지만 당시 백거이에게 더 특별했을 것이다. 비록 고관대작은 아니지만 대대로 벼슬을 한 전통 있는 유학자 집안 출신으로,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여 과거에 합격했던 백거이는 조상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성공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의 엘리트 의식은 당말기 혼란에 빠진 사회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하는 사명을 스스로 떠맡게 했다. 이 사명감은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새로운 국가 건설을 기획한 송대 지식인에 의해 공유된 것이지만, 기존 제도를 유지하려는 구지배 계층과 대립해야 했던 당대 말기의 지식인에게는 위험한 것이었다.

36세에 한림학사, 37세에 좌습유를 겸임하며 승승장구하던 백거이는 순진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서 지배층을 풍자하는 풍유시를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또 그의 직무와 유가적 사명감에 따라 황제에게 정치적 잘못을 시정하기를 직언했다. 그러나 그의 기개와 자신감은 곧 꺾이고 만다. 815년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이 문제가 되어 이 해 8월 강주사마로 폄적 당한다. 생애 최초로 좌절을 경험한 그는 벗 원진에게 보낸 글에서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궁하면 홀로 그 몸을 잘 보존하고 달하면 천하를 구제해야 한다고 들었다. ··· 대장부로서 지켜야 할 것은 도이며 기다릴 것은 때이다. 때가 오면 구름을 타는 용이 되고 바람을 타는 붕새가 되어 돌연히 힘을 펼쳐 나와야 하고, 때가 오지 않으면 안개 속 표범이 되고 어둠 속 큰 기러기가 되어 고요하고도 텅 빈 듯 몸을 받들어 물러나는 것이다.” (여원구서)

그 후 818년 충주 자사로 발령이 났으며 비교적 순조로운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그는 목종 장경2년(822) 51세에 외직을 자청해서 항주 자사로 떠났다. 조과도림 스님을 만난 때가 바로 이즈음이다.

조과 선사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예상을 깬 파격적인 것이었다. 편안하고 여유 있게 정좌를 하고 있어야 할 선사가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위태롭게 앉아 있는 것부터 그렇다. 괴팍한 성품의 선사에게 높은 관직의 풍채 좋은 벼슬아치가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있는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제3의 인물인 시종은 이 장면에 당황해하고 있다.

‘나무 위보다 땅 위가 더 위험하다’는 조과선사의 말씀에는 백거이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본 촌철살인의 지혜가 번득인다. 투쟁과 모함이 난무한 조정에서의 삶이 어찌 나무 위의 삶보다 위태롭지 않겠는가! 양해의 그림은 선사의 구부정한 자세와 부릅뜬 눈, 예리한 손가락으로 그 활발발하고 촌철살인의 기상을 전하고 있다.

그저 공손히 선사의 말씀을 듣고 있는 백거이는 한편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처럼 뜨끔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괴팍하고 타협을 모르는 선사의 확고한 태도는 비록 자청했지만 내키지 않았을 항주 자사의 직위를 천명으로 여기고 받아들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백거이 역시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뿐만 아니라 유가 엘리트로서 경세제민의 이상도 확고했다. 하지만 그 꼿꼿한 자부심과 우월감조차 백거이가 살던 중당 사회의 불안한 정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당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가 무너져 내렸지만 마지막까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세력들과 서로 다른 이념과 욕망이 엉켜 모순덩어리가 된 중당사회에서 백거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관료사회의 암투에서 이겨내는 것이지만, 그것은 유가적 이상을 따르는 사대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한직으로 물러나기로 결심할 즈음, 그는 더 이상 ‘겸제(兼濟)’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가족을 부양할 정도의 낮은 보수를 받는 한직을 선택하여 정치세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일신을 보존하는 ‘독선(獨善)’을 결심한 것은 이러한 시대 인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거이는 비록 벼슬길에서 적지 않은 풍파를 만났지만 기본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유지하였다. 중년 이후 우이당쟁(牛李黨爭)이 일어났으나 그는 거기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초탈하고 유유자적하게 벼슬살이를 했다. 그것은 그가 이치에 맞게 처신하여 스스로를 잘 보존하고, 아울러 구차히 벼슬할 것을 탐내어 작당하여 사리사욕을 꾀하는 것을 피한 덕분이다.

이러한 처세에는 그가 받아들인 홍주선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홍주선은 “행주좌와(行住坐臥)할 때 기미(機微)에 응하고 사물과 마주하는 것이 모두 도(行住坐臥,應機接物,盡是道)”라고 주장한다. 이는 작위하지 않고 모든 변화(萬變)에 응하고 개인의 심성을 유지하여 외부의 혼란함을 입지 않는 것이다.

백거이는 말년에 곤궁해진 뒤에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불교를 좋아해서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선을 배웠다. 백거이가 일생동안 활동한 네 곳의 주요지역은 장안·강주·항주와 소주·낙양 등으로, 이 네 지역 모두 불교와 관계가 깊다. 강주에 있을 때, 그는 일찍이 여산 동림사 옆에 방결초당을 만들고, 혜원과 거사 류유민 등과 결사한 이야기를 흠모하여 동·서림의 승려들과 결사를 했다. 만년에는 낙양 용문 향산사에 거처하면서 스스로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불렀다.

이 두 시기에 그는 불교에 깊이 매료되어 참선에 마음을 기울였으며 여러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구했는데, 그의 문집과 선어록, ‘전등록’ 등을 검토해보면, 백거이와 교류한 스님은 백 명이 넘는다. 만년에 낙양 여산에 문인원림의 원형이 되는 초당을 짓고 반은반관의 생활에 만족했다고 전한다.

백거이의 행동에 대한 후세의 평판은 둘로 갈린다. 하나는 안으로 욕망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채 겉으로만 유유자적 위선을 떨었다는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 정신에 마음을 깃들여서 세상의 물욕에서 완전히 초월하여 안심입명의 경지에 들었다는 평가이다. 유가적 입장에 서느냐, 선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둘 중 하나의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지만, 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뜻은 겸제(兼濟)에 있었고, 행동은 독선(獨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독선’ 과 ‘겸재’는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그에게 참선은 ‘독선’의 도였으며, 시와 술, 거문고와 마찬가지로 ‘겸재’가 불가능할 경우의 방편에 따라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길이었다. 그것은 바로 조과도림 선사와 만남이 전하고 있는 격외의 도리와 상통하는 정신이었다.

그의 묘지명은 다음과 같이 그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밖으로는 유가의 행동으로 자신의 몸을 닦고, 안으로는 석가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옆으로는 산수와 풍월과 시가와 음주로서 그 뜻을 즐겼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45호 / 2016년 6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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