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베껴 쓰기 유행과 사경문화

필사문화의 정점은 불교
2천년 동안 수행법 승화
최고의 가피 얻는 방편

필사(筆寫)가 유행이다. 베껴 쓰기가 외국어 공부에 좋다는 얘기가 나오는가 싶더니 요즘엔 시와 소설을 따라 쓰는 이들도 크게 늘었다. 서점가에서도 필사와 관련된 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필사는 스트레스 감소, 어휘력·맞춤법·띄어쓰기 능력 향상, 생각의 정리 및 글쓰기 실력 고취, 작가와의 교감, 명상 및 기억력 향상 등에 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자판을 두드려 자신을 표현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필기구와 종이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쓰는 행위 자체가 색다른 경험일 수밖에 없다. 눈으로만 읽는 독서법에서 벗어나 하나하나 문장을 음미하는 시간이 마음의 이완과 사색으로 이어지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인쇄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필사는 일상이었다. 특히 불교에서 경전을 필사하는 사경(寫經)은 단순히 베끼는 행위를 넘어 전법이자 수행이었다. 불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경의 공덕이 탑을 조성하는 것보다 수승하다.’(도행반야경) ‘부처님께서는 살갗을 벗겨 종이로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쓰기를 수미산만큼 하였다.’(화엄경) ‘만약 이 경을 수지·독송해 바르게 기억하며 익히고 베껴 쓰는 중생이 있다면 이 사람은 나를 만나 직접 내 입에서 이 경전을 들은 것과 같으며, 나를 공양함이며, 내가 옷으로 그 몸을 덮어줌과 같으니라.’(법화경)

불경을 옮겨 적는 사경의 기원은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구전으로 전승되던 경전은 부처님이 입멸한지 400~500여년이 지나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종려나무 껍질에 팔리어로 기록했다. 비슷한 시기 대승불교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수많은 경전들이 편찬되면서 사경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됐다. 경전을 쓰는 행위 자체가 부처님의 법신사리를 모시는 일로 간주된 것도 이 무렵이다.

우리나라에도 사경의 역사는 깊다.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백제 성왕 때 겸익 스님이 인도에서 범본 경전을 가져오면서 시작됐다. 이후 수많은 경전들이 신수봉행을 발원한 불자들에 의해 옮겨졌고, 세계 최고의 활자 인쇄본인 국보 126호 ‘무구정광대다라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고려시대에도 사경문화는 크게 발달해 금과 은을 이용해 정교하게 글을 쓰는 등 사경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조선시대 사경은 지극한 신심의 표현이었다. 조선초 금강산 마하연의 석하 스님은 10년 동안 혀의 피로 ‘화엄경’ 80권을 사경해 완성했으며, 2000년대 초에는 1835년 건봉사 보리암에서 사미승이 피로 쓴 ‘불설아미타경’과 ‘보현행원품’이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이재형 국장
인터넷과 활자가 넘쳐나는 오늘날에도 사경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제 경전을 유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산란한 마음을 없애고 일념의 상태로 몰입하게 하는 수행법으로 정착했다. 많은 사찰에서 사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불교서점가에서 사경 관련 책자들이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사경과 관련된 불가사의한 가피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가장 큰 가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김으로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평안’을 얻은 것이리라. 요즘 유행하는 필사문화의 정점에 불교가 있다. 그 오랜 세월을 거치며 체계화된 사경의 오묘한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불자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재형 mitra@beopbo.com
 

 [1346호 / 2016년 6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