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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아차산 영화사-고구려정-대성암-온달샘

산이 품은 녹음 속 천년 보물 ‘고려탑’을 만나다

▲ 952년 무너졌는데 1996년 다시 제 모습을 갖췄다. ‘범굴사 3층석탑’이나 ‘대성암 3층석탑’으로 불려야 할 듯한데, 학술적 검토가 없어 ‘아차산 3층석탑’으로 불린다.

28번의 웅혼한 범종 소리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 들기 시작한다. 한 선사가 빈 하늘을 응시하듯, 수령 400년에 이르는 느티나무가 대웅전을 마주한 채 묵묵히 서 있다. 한 거사가 작은 숲으로 난 길을 따라 미륵전으로 걸어가고 있다. 세조가 기도해 지병을 치유했다는 입소문 깃든 미륵불이다. 고려후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니 어언 800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온 부처님이시다. 이 절 영화사는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지켜보았다.

의상이 해돋이 명소에 지은 절
화양사에 뿌리 둔 곳이 영화사
범굴사 명맥 이은 절이 대성암

고구려·백제·신라 서로 탐한
군사전략상 핵심요충지 아차산
한강 이북 되찾으려 전선 찾은
온달은 이곳서 화살 맞고 전사

산 기단 삼아 우뚝 선 삼층석탑
그 아래 앉아서 한강 굽어 보면
의상·온달 누구도 부럽지 않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대사는 서울서 해돋이를 가장 먼저 만끽할 수 있는 아차산에 두 개의 절을 두었다. 산 중턱(지금은 주택가로 변했다)에는 화양사(華陽寺)를, 산 정상 바로 아래엔 범굴사를 지었다. 화양사에 뿌리를 둔 절이 지금의 영화사고 범굴사 명맥을 이은 절이 대성암이다.

미륵전서 내려와 느티나무 시선이 머문 대웅전 주련을 살폈다. 저 산 위 범굴사를 중창했다는 희대의 선객 나옹선사가 지은 발원문 일부다. ‘바라옵건대 이 몸이 세세생생 날 적마다/ 언제나 반야서 물러나지 않을지니/ 내 이름 듣는 이는 온갖 고통 벗어나고/ 내 모양 보는 사람 생사번뇌 해탈하리라/ 이와 같은 교화행 세세생생 행할지니/ 부처와 중생의 차별은 없어지리라.’ 저 느티나무, 이 뜻 전하려 저토록 굳건히 서 있었나 보다.

▲ 800여년 동안 기도객의 마음을 헤아려 온 영화사 미륵불.

대웅전 벽화를 따라가면 곧바로 선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누가 ‘불법의 대의’를 물으면 손가락 하나만을 들어 보였던 구지선사, 스승의 말 한 마디에 무작정 솥을 아홉 번이나 다시 걸었던 구정선사 등 당대 내로라했던 선사들의 활구가 그려져 있다. 중국 신찬 선사의 일화가 일품이다.

백장선사 법좌서 한 소식 한 신찬 선사가 스승인 계현 스님 문하로 다시 돌아왔다. 오늘처럼 화창한 어느 봄날, 벌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다시 나가야 하는데 열린 문은 놔둔 채  닫힌 창문에만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창호지에 비친 빛만 쫓은 탓이다. 이 풍광을 지켜보던 신찬이 게송을 읊었다. “활짝 열어놓은 문은 마다하고/ 굳게 닫힌 창문만 두드리는구나./ 옛 종이 백년 동안 뚫으려 한들/ 어느 때 벗어나길 기약하리오. (공문불긍출 空門不肯出/ 투창야대치 投窓也大痴/ 백년찬고지 百年鑽古紙/ 하일출두기 何日出頭期)” 문자에만 골몰하고 있는 스승을 일깨우는 일언이다. 제자의 선기를 알아 챈 스승 계현 스님은 대중을 불러 모아 법회를 마련하고는 제자 신찬을 법좌에 앉히고, 자신도 그 아래서 대중과 함께 법을 들었다.

햇살이 내리는 동쪽으로 걸음을 옮겨 다시 산을 올랐다. 대성암이 자리한 산 언저리에 고려탑이 있다는 풍문을 들었기에 나선 길이다. 영화사 미륵불 보다 좀 더 먼저 조성된 고려전기 석탑이라고 한다.

▲ 의상대사가 수행할 당시 쌀을 내려준 바위(쌀바위)가 있는 대성암.

이 산에는 지금의 초소라 할 수 있는 ‘보’가 유독 많다. 삼국시대에는 한강을 차지한 나라가 패권국가였다. 고구려 장수왕 재위 초기 때만 해도 한강과 아차산을 경계로 북쪽은 고구려, 남쪽은 백제 땅이었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전초기지로 보를 설치했다. 주둔군 대부분은 기마병이었다. 보와 보를 잇는 산길이었지만 말 한 마리가 뛰어다니기에 충분했기에 가능했다. 백제는 고구려의 남침을 의식해 풍납토성을 쌓고는 몽촌토성과 연결한 산성을 쌓아 방어진을 구축했다.

풍납토성은 지하철 8호선 천호역 부근이며, 몽촌토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역 부근이다. 광나루는 광진교와 천호대교가 있는 곳이다. 한강 이남서 아차산을 향해 한강 이북으로 건너면  바로 닿는 곳이 광나루다. 광나루 위로는 아차산(이웃 산인 용마산도 원래 아차산이었다.)이 천연요새로 서 있는데, 산 정상에서는 한강을 한눈에 내려 볼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신라마저도 호시탐탐 아차산과 광나루를 노리고 있었던 이유는 이 곳이 군사전략상의 핵심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기마병을 동원해 백제를 급습 7일 만에 두 토성을 무너뜨렸다. 이후 76년 동안 한강 이남의 서울은 고구려 땅이었다.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동맹을 맺고 551년 고구려를 쳐 한강유역을 되찾는다. 2년 후 진흥왕은 동맹을 일방적으로 깨고 백제를 쳐 한강유역을 손에 쥔다. 한강유역을 백제에 빼앗겼을 때 분연히 일어 난 고구려 장군이 있었다. 평강공주의 낭군 온달장군이다.

▲ 한 거사가 이른 아침 영화사 미륵전으로 향하고 있다.

평강공주가 울기만 하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던 왕이 끝내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평강은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남자도 식언(食言)하지 않는데 하물며 왕께서?” 온달 어머니도 두 사람의 혼인을 반대하고 나섰다. “자식이 비천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집이 가난해 귀인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평강공주의 대답이 걸작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한 두(斗)의 곡식이라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척(尺)의 옷감이라도 바느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진실한 마음을 갖는다면 반드시 부귀를 얻어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아차산성이 있는 저 어디쯤일까? 대성암이 자리한 2보루 어디쯤일까? 한강 이북을 되찾겠다며 전선에 뛰어 든 온달은 끝내 원을 이루지 못한 채 이 산 어디에서 화살 맞고 전사했다. 고구려군이 장사를 지내려 했으나 온달의 유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낭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평강이 한걸음에 달려와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삶과 죽음이 갈렸습니다.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평강의 손길이 닿자 유구는 움직였다. 사람들은 온달샘(지금의 진달래샘) 부근에 서 있는 바위에 그들의 애잔한 사랑을 새겨 넣고는 ‘온달 주먹 바위’ ‘평강공주 바위’라 불렀다.

▲ 영화사와 대성암을 잇는 산길은 호젓하면서도 두물머리로부터 광나루에 이르는 한강을 굽어 볼 수 있어 호쾌하게 다가온다.

큰 암릉 아래 자리한 대성암은 작지만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굽어보고 있었다. 나룻배에 오른 조선 문인 서거정이 이 암자를 바라보며 한 수 읊는다.

‘절이 어디있는가. 저 멀리 흰구름 속에 보인다./ 산 그림자 지는 곳에 나그네는 말을 타고 가고, 가을소리 들려오는 곳에 스님은 종을 치는구나./ 단풍숲은 붉고 강물은 푸르게 흐른다./ 언덕 저 쪽의 촌가 조용하니 돌아갈 마음 진하다.’

아차산이 천년을 품고 있었다는 고려탑은 어디있나? 대성암 아래서 ‘아차산 삼층석탑’ 이정표를 보았으나 산림이 우거져 먼 곳으로의 시야확보가 어렵고, 산길 또한 여러 곳으로 갈라져 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다. 벌써 한 시간째 암자 주변에 흩어져 있는 암릉에 올라 살폈지만 탑은 보이지 않는다.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일까?

▲ ‘온달주먹 바위’다. 저 바위 주변 어딘가 ‘평강공주 바위’도 있을 듯싶다.

잠시 앉아 물 한 모금 하는데 암자서 계곡으로 이어진 수관(水管)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쪽으로 내려섰다. 아주 오래된  돌계단. 그 어떤 힘이 나그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계곡 건너고 보니 길이 없다. 아니, 저만치께 있다. 폭 40cm의 길. 누군가 걸었던 오솔길이다.

호젓한 산길 끝에 크나큰 암릉이 갑자기 툭 튀어 나온다. 시선을 하늘에 두었다. 아! 3층석탑이다. 아차산이 천년동안 품어 온 보물은 산을 통째로 기단삼은 채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 탑 아래 앉았다. 굽이치는 한강이 한 손에 잡힌다. 산바람 또한 청량하기 그지없다. 오늘만은 나그네가 홀로 이 탑을 품었다. 온달, 평강, 의상, 구지, 구정, 신찬은 더 이상 부럽지 않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서울 아차산주차장(만남의 광장). 휴게소를 지나 고구려정에 닿으면 거의 절반을 오른 셈. 나무계단에 이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곧장 오르면 해맞이 광장에 닿고,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대성암에 닿는다. 해맞이광장과 아차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택하면 능선을 타며 서울과 구리시를 감상할 수 있다. 아차산 1보루를 지나 5보루를 휘돌아 내려오면 바로 6보루에 이른다. 여기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2보루에 닿는다. 약 100m 지점 오른쪽에 암벽을 따라 밧줄이 길게 늘어져있다. 10분 정도 걸으면 바로 대성암이다. 대성암서 고구려정으로 회귀하는 길은 체육시설 앞으로 난 길과, 체육시설 아래로 난 길 두 길이다. 확인 결과 위치만 다소 다를 뿐 두 길은 동선이 거의 같은 쌍둥이 길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한강과 어우러진 도심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온달샘 표지판을 만나면 잠시 아랫길로 내려가 온달바위를 보고 온달샘(진달래샘)서 목을 축이는 것도 좋다. 10여분 거리다.(처음 본 온달샘 표지판으로 다시 올라와야만 한다) 고구려정서는 아차산성을 휘돌아 나오는 길을 따라 하산하는 게 좋다.


이것만은 꼭!

 
아차산 3층석탑 가는 길: 대성암서 10분 거리에 있지만 자칫 길을 잘못 들면 1시간을 헤매도 찾을 수 없다. 대성암 앞 체육시설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대성암을 지나 산으로 들면 ‘아차산 3층석탑’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후부터 표지판은 없다. 대성암서 계곡으로 이어진 수관(水管)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돌계단이 나온다. 돌계단을 다 내려서면 한걸음에 넘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계곡이다. 계곡을 넘어 오른쪽으로 휘돌아 난 작은 산길을 약 100m 정도 걷다가 다시 왼쪽으로 휘돌아 돌면 한걸음에 넘을만한 작은 계곡을 만난다. 이 계곡을 넘으면 정면에 돌계단이 보이고 그 곳에 3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1346호 / 2016년 6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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