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1. 백련암 찾은 서정주 “성철 스님 뒤에 어린 분홍꽃빛 후광을 봤다”

기자명 김택근

▲ 백련암 마당에서 자리를 함께 한 성철 스님과 서정주 시인.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저는 육십이 멀지 않은 나이인데도 이쁘게 보이는 여자를 만나면 연연한 마음이 생기는 걸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떠신지요?” 서정주의 능글맞은 고백이었다. 성철은 소리 내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정주씨는 큰 시인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직 모르시오? 아 그러니까 중들은 날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예불도 하고, 불경도 배워 읽고, 참선도 하고, 마음을 바로 닦으며 지내는 것 아니요.”


백련암은 가야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백련암(白蓮庵)은 이름처럼 흰 연꽃으로 피어 있었다. 성철의 법문과 오도(悟道) 후 불사가 향기롭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 향기를 좇아 숨을 헐떡이며 백련암을 찾아갔다. 종교계, 학계, 정계 그리고 예술계 사람들이 성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기 분야에 일가를 이룬 이들은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성철에게서 자신의 인생을 검증받고 싶어 했다. 세속에서 이름이 높을수록 붙들고 있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숨겨놓은 것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꺼내 성철 앞에 펼쳐보였다. 성철은 그들에게 ‘불교’를 얘기했다. 간결하면서도 쉬웠다.

하지만 성철의 말은 간결하기에, 또 쉽기에 깊었다. 어떤 때는 경(經)이었고, 어떤 때는 잠(箴)이었다. 사람들은 성철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시인 서정주도 1973년 봄 백련암의 성철을 찾아갔다. 농익은 시어로 절창을 뽑아내던 시기였다.

서정주는 19세에 박한영 스님을 만나 머리를 깎고 불경을 공부했다. 박한영은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한 학승이었다. 이광수, 최남선, 신석정 등도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서정주는 동대문 밖 개운사에서 절밥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연애소설을 읽고 기생집도 드나들었다. 1934년 6월 서정주는 참선을 하겠다며 홀연 금강산 장안사를 찾아갔다. 장안사에는 당대의 고승 만공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만공이 보기에 서정주는 중이 될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선을 하려면 거사로는 안 되고 아주 중이 돼야 한다. 뒤에 후회하지 않겠는지를 많이 생각해보라.”

만공은 여승들과 어울릴 뿐 서정주는 본체만체했다고 한다. 서정주는 이튿날 금강산을 떠나왔다.

‘대선사 만공의 눈에도, 석전(박한영)의 눈에도 수행은 않고 절간 처마 밑에서 담배나 피우고 연애소설이나 읽는 서정주가 선이나 중과는 거리가 멀게 보였을 것이다.’ (이경철 ‘미당 서정주 평전’)

서울 거리를 배회하며 김동리 등 문우들과 어울리던 서정주는 신식 여성 임유라를 사랑했다. 그것은 짝사랑이었고, 실연은 그를 방랑으로 내몰았다. 서울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서정주는 시인 이상과 서울에서의 마지막 술잔을 기울였다. 초저녁부터 마신 술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이상과 헤어진 서정주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서정주는 1936년 4월 해인사 일주문을 넘었다. 주지를 찾아가 김동리가 써준 소개장을 내밀었다. 그렇게 해인사 품에 들었다. 마음 속 울화와 근심을 씻으려 했지만 젊은 시인의 눈에는 젊은 아낙들만 눈에 들어왔다.

“몹쓸 마군이여, 무명의 혼돈이여.”

머리를 흔들었지만 여인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소쩍새가 길게 우는 밤에는 수음(手淫)을 했다. 해인사 주변 여관에서 여류화가의 유혹을 받고 시 ‘대낮’을 쓰고, 몸뚱이가 울긋불긋한 꽃뱀을 보고 ‘화사(花蛇)’를 썼다.

‘절 근처 밀주집에 안주로 북어를 쫙쫙 찢어 다시 살생해 가며 도무지 여자답지 않은 주모를 희롱하기도 하고 총각 머슴과 안주인이 땀 뻘뻘 흘리며 하는 그 짓거리를 훔쳐보기도 했다. 그러다 성이 안 차면 불경 공부하러 온 거사들과 어울려 절 아랫마을 색싯집으로 내려가 술을 고래로 마시고 색시들을 꼬여내 혼숙하기도 했다.’ (이경철 ‘미당 서정주 평전’)

서정주가 해인사 산문을 넘기 한 달 전 성철은 해인사에서 삭발을 했다. 1936년은 성철과 서정주 모두에게 평생을 걸어가야 할 길이 열렸다. 서정주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고, 성철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해 늦봄과 초여름을 성철은 해인사 선방에서, 서정주는 해인사 사하촌에서 보냈다. 서정주가 들었던 소쩍새 울음을 성철도 똑같이 들었을 것이다. 같은 햇살과 바람을 맞았지만 두 사람이 길러낸 것은 물론 달랐다. 시인은 방황의 탈출구를, 선승은 영원히 사는 새 길을 찾았을 것이다. 성철은 그 유명한 출가시를, 서정주는 관능의 이불 위를 맨몸으로 뒹구는 시를 썼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새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웬몸이 달어……’ (서정주 시 ‘대낮’)

‘머리도 식힐 겸 서울서 합천 해인사로 내려가 구상한 작품. 그러나 실연(失戀)의 터질 듯한 아픔, 번열기를 삭히려 들어간 한갓진 산속이기도 했다. 못 이룬 사랑 때문인가. 대낮에 펼쳐지는 육욕(肉慾)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 몸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형용사의 꾸밈이 아니라 동사로 육욕과 관능과 원초적 생명을 향하여 100미터 달리기 경주하듯 온 몸이 터질 듯 달려나가고 있는 시가 ‘대낮’이다.’ (이경철 ‘미당 서정주 평전’)

거의 같은 시기에 승려와 시인이 되어 해인사의 품에 안겼던 두 사람은 그 후 37년 만에 백련암에서 만났다. 1973년 초파일이었다. 서정주는 큰절을 올린 다음 무릎을 꿇었다. 젊은 날에는 서로 존재조차 알지 못했지만 백련암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그 명성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성철 62세, 서정주 59세였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섰을’법한 서정주는 그때 이런 질문을 했다.

“저는 육십이 멀지 않은 나이인데도 이쁘게 보이는 여자를 만나면 연연한 마음이 생기는 걸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떠신지요?”

서정주의 능글맞은 고백이었다. 시로써 젊은 날의 바람기를 잡았지만 아직 욕심의 꿈틀거림이 남아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고도의 농일 수도 있었다. 성철은 소리 내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정주씨는 큰 시인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직 모르시오? 아 그러니까 중들은 날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예불도 하고, 불경도 배워 읽고, 참선도 하고, 마음을 바로 닦으며 지내는 것 아니요.”
서정주는 이때 구도자의 솔직한 모습을 발견했다고 술회했다. 시인은 선승을 친견한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참 이상했던 것은 이때 그의 상반신의 주위에서는 아련한 후광(後光)이 일어나서 비치고 있던 일이다. 그 빛은 아주 엷은 분홍빛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이 빛깔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온 성인화(聖人畵)들에 나타났던 그 후광들의 빛깔과는 다른 빛이어서 아직껏 그것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성철 큰스님의 앉으신 몸 뒤에 어리었던 그 영원히 청정하게 꽃다운 정신생명을 느끼게 하던 엷은 분홍꽃빛이 실제 후광의 본색이고, 지금까지 화가들의 성인화에 나타났던 그것들은 상상으로만 그럴싸하게 덧붙여 놓은 장식일 뿐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두 사람의 인연에서 영감을 얻어 시인이며 평론가인 송희복은 이런 시를 지었다.

‘한 편의 시(詩)를 쓴다는 것/ 말(言)이 절(寺)을 만나는 일 아니랴.// 서정주 시인이 성철 스님을 만났을 때/ 백련암 선방에서 보았다는 보랏빛 후광처럼// 거침없이 말하고 때로 웃음을 터뜨리며/ 천진한 표정을 짓고 하던// 성철 스님의 배경에/ 드러난 보랏빛 후광처럼// 흰 빛이나 금빛이 아니라/ 석산(石山)의 해돋이와 해질녘에// 엷은 보랏빛으로/ 둥두렷이 어리는 그 빛처럼// 신기한 일 아니라//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 마음속의 절 한 채/ 저마다 짓는 일 아니랴. (송희복 ‘보랏빛 후광’)

우리네 삶과 우리 고유의 것들, 그리고 사람들을 담아온 사진작가 육명심도 성철을 찾아갔다. 그는 사진에 관한 통념을 깨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사물의 본질을 ‘마음으로 찍는’ 육명심에게 성철은 독특한 존재였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렌즈에 담고 싶은 대상이었을 것이다.

육명심은 특유의 배짱으로 해인사 백련암을 향해 무조건 ‘진격’했다. 삼천배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던 성철이 웬일로 그를 맞았다. 육명심은 성철을 친견하는 순간 엄청난 기운을 느꼈다. 눈앞의 선승이 태산 같은 기세로 자신을 압도했다. 평생 수많은 인물들을 찍었지만 그런 경우는 없었다.

“사진은 뭐 하러 찍을라 하나?”
“스님, 만약 부처님 생전에 사진술이 있었더라면 세상의 불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철이 씨익 웃었다.
“그럼 한번 찍어봐라.”

육명심의 ‘작전’은 성공했다. 그런데 막상 성철의 얼굴을 살피던 육명심은 생각이 달라졌다. 성철의 눈두덩이 좀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어?”
“안 찍는 게 아니라 못 찍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장이 좋지 않아서 겨울철이면 가끔 그렇게 눈두덩이 부어올랐다. 성철은 날이 풀리는, 부처님오신날쯤 다시 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육명심은 가지 않았다. 결국 성철의 사진은 다른 작가가 찍었다. 성철의 사진을 모아 ‘포영집’을 출간한 주명덕 작가였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육명심은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카메라로 찍는 사진이 아니고 자신의 눈으로,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천하무구(無垢)의 사진 한 장이 남은 셈이었다. 육명심은 이런 글을 남겼다.

“누군가가 그 사이 스님을 찍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누가 찍었든지 일단 찍었으면 되었다. 그 모습은 앞으로 기록으로 남을 테니까. 어떤 점에서 사진은 꼭 카메라로만 찍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오히려 내 육안의 망막으로 찍는 무집착의 촬영법이 이 선승이 두는 단수 높은 인생의 바둑 한 판의 대국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육명심은 성철을 친견했던 그날,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사진작가로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던 내 생의 최고의 순간이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46호 / 2016년 6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