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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경북 봉화·영주 복고풍 석불상들, 조성 시기와 연대

기자명 주수완

유사한 양식 석불상들 조성 연대는 삼국일까? 통일신라일까?

▲ 경북 봉화 북지리 출토 석조반가사유상편.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997호. 높이 1.67㎝.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특별전에서 유독 관람객의 관심을 받았던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거대한 석조반가사유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국보 78호와 83호 반가상이 나란히 함께 전시된 것도 화제였지만, 이들 두 국보 반가상은 원래부터 유명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석조반가상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었는데 상반신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그 크기, 그리고 돌을 마치 흙을 빚어낸 듯 부드럽고 섬세하게 조각해낸 뛰어난 기량에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았다.

경주서 먼 곳 대규모 석불 조성
문헌적 근거나 명문 전혀 없어
오로지 조각 양식만으로 판단

앞선 연구서 삼국 불상에 비견
편년은 7세기 후반 추정하지만
문화재청 공식 설명은 신라시대

미술사 양식적 측면에서 보면
삼국까진 북제·주∼수 양식 주류
통일신라 땐 당나라 양식 유행
조성주체나 스타일은 수수께끼

도대체 이 거대한 반가상은 어떤 연유로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원래 이 상은 경북 봉화 북지리에 위치한 대형마애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인근을 지표조사 하다가 발견되었다. 이들 두 불상은 조각 양식이 유사하여, 원래부터 상호간에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반가상이 단순히 마애불의 협시보살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충주 봉황리의 햇골산 마애불에서도 마애불상과 마애반가상이 서로 대칭을 이루듯이 표현되어 있는데,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함께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 경북 봉화 북지리 마애불좌상. 국보 제201호. 높이 4.3m. 7세기 후반.

실제로 북지리의 반가상이 출토된 지점을 1960년대에 발굴 조사한 결과 반가상이 놓여있던 자리 주변으로 기둥이 서있던 주초석 자리가 확인되어 이 반가상이 법당의 주존이었음이 밝혀졌다. 어쩌면 처음에는 반가상이 삼존불의 한 협시로서 표현되었다가 그 중요성이 점차 커지면서 불상과 반가상 두 존상이 서로 대칭을 이루는 구조로 변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발굴에서는 반가상의 사라진 상체를 찾는데 주목했지만, 연화대좌를 발견하는데 그쳤다. 상체의 크기도 어마어마한 규모였을 텐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아마도 발견만 된다면 1993년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반가상이 대체로 미륵보살로 해석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들 도상을 미륵보살과 석가모니불로 볼 수도 있다. 석가모니불이 미륵보살에게 수기를 줌으로써 이 세상에 부처가 지속적으로 출현할 것임을 경전에서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게 아니라면 통일신라시대인 719년에 만들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미륵보살 입상처럼 강당에 아미타불, 금당에 미륵보살을 봉안하여 각각 불전의 주존을 담당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간 북지리, 봉황리, 감산사의 이들 도상들은 서로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듯하다.

▲ 경북 영주 가흥동 마애삼존불. 본존 높이 3.2m. 보물 제221호. 7세기후반.

북지리 불상들과 매우 유사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마애불이 영주 가흥동에도 있다. 북지리 불상보다 훼손이 덜해 원 모습을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전반적인 양상을 보면 북지리 반가상의 조각기법과 많이 닮아있다. 굵직굵직한 옷자락이 두텁게 조각되었으면서도 유려하고 섬세하다. 더불어 인체의 처리는 양감이 풍부하고 동글동글한 얼굴이 마치 경주 배동의 선방사 삼존석불과도 닮아있다.

가흥동 마애불은 좌협시 보살상의 보관에 화불이 묘사되어 있어 관음보살로 추정되고, 따라서 본존불은 아미타불로 생각된다. 가흥동 마애불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군위삼존석굴의 삼존불도 아미타삼존불이어서 도상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가흥동 마애삼존불의 인체 처리가 보다 자연스럽고 활달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들 북지리·가흥동의 불상들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진, 당시로서는 외진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곳에 이런 대규모 석불상들이 들어선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들 불상에 대한 문헌적 근거나 명문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로지 조각양식만으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이들 불상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나라 조각사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었던 고 황수영, 진홍섭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논문에서 다루어왔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선학들의 글에서 보면 양식적으로 분명히 삼국시대의 불상들에 비견되고 있음에도 그 편년은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멸망당한 것이 660년, 668년이므로 이들 시기가 7세기 후반인 것은 맞다. 따라서 북지리, 가흥동의 불상이 7세기 후반이라면 삼국시대 말이나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걸쳐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사실 연구자들은 삼국보다는 더 늦은 통일신라 초기로 보는 경향이 많다.

▲ 가흥동 마애삼존불의 ‘X자형 천의’를 걸친 우협시보살상. 높이 2.3m.

앞서 잠시 설명했지만, 이들 불상들은 옷자락의 처리를 보면 삼국시대의 불상들과 닮아있다. 예를 들어 북지리 반가상의 옷자락은 국보 83호 반가상의 옷자락을 닮았는데, 국보 83호 반가상은 7세기 전반으로 편년되고 있다. 하지만 북지리 반가상은 이보다 늦은 7세기 후반으로 내려 보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여하간 북지리 마애불에 대한 문화재청의 공식 설명에는 신라시대로 편년되어 있다.

더불어 가흥동 마애불상의 우협시 보살상은 천의자락이 소위 ‘X자형 천의’라고 해서 양 어깨에서 내려온 옷자락이 무릎 부근에서 ‘X’ 형태로 교차하는 모습인데, 이는 6세기 불상들에서 보이는 매우 오래된 양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흥동 마애불은 공식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되고 있다.

원래 선학들은 이들을 모두 유사한 시기로 보고 7세기 후반으로 편년했지만, 이제 하나는 신라로, 하나는 통일신라로 나뉜 셈이다. 사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7세기 후반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는 아니지만 미술사에서의 양식적 측면에서 보자면, 삼국시대까지는 대체로 중국의 북제·주~수나라 불상양식이 주류였고,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당나라 양식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조각인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인가의 시각 차이는 그리 작은 차이가 아니다. 때문에 서로 비슷해 보이는 두 마애불을 놓고 하나는 신라, 하나는 통일신라로 놓는 것은 보다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사실 북지리 마애불도 삼국시대보다는 가흥동 마애불처럼 통일신라시대로 보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북지리에서 반가상이 출토되면서 마애불과 원래 하나의 세트처럼 간주되는 가운데, 국보 83호 반가상과 흡사한 북지리 반가상이 신라시대로 점차 편년됨에 따라 북지리 마애불도 연대를 올려보면서 삼국시대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가흥동 마애불상만 원래대로 통일신라 초기로 편년되고 있는 상황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왜 이들 불상들은 오래된 양식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학자들은 7세기 후반으로 보고자 했던 것일까? 그것은 비록 X자형 천의자락이나 은행잎 형태로 접히는 옷자락 처리 등은 삼국시대 불상들에서 보이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인체를 다루는 방식은 양감이 풍부하고 자세가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표현되는 등 새로운 표현기법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60호. 높이 2.4m. 통일신라.

이러한 양식의 불상은 북지리, 가흥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특히 영주 이산면 신암리 마애불은 가흥동 마애불과 매우 유사한 양식을 보이는 불상이다. 원래 바위면 사방에 조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정면의 불상만 알아볼 수 있다. 또 여기서 멀지 않은 영주시 영주동에는 무려 2.4m에 달하는 대형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양식적으로는 가흥동 마애불과 유사하다고 설명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통일신라 후기로까지 연대를 내려 보기도 한다. 이렇듯 이 지역의 불상들은 대형의 석조상이면서 고전적 조형성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지만 연대는 제각각 편년되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이 지역의 조각들이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시대적으로 과도기라면 과도기이고, 공간적으로 삼국의 문화적 교집합지대라고 한다면 그렇게 볼 수 있는 그야말로 “문화의 충돌”이라 부를만한 곳이다.

7세기 후반 이러한 문화적 복합 양상은 충청남도 연기군 지역에서 유행했던 불비상들에서도 엿볼 수 있었는데, 양식은 삼국시대 양식이었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직은 신라의 관직이라는 점에서 통일신라 초기 신라의 영향을 받은 백제 지역의 불상임을 알 수 있었다.

여하간 학자들은 이 지역이 고구려, 백제로부터 신라로 문화가 유입되던 초입부였다는데 대체로 동의한다. 나아가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이런 대형 조각상 조성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문물이 유입되는 통로상의 중요성 때문이라는 점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들 대형불상이 세워진 곳은 문화고속도로 중간 중간에 위치한 휴게소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더욱 새로운 문물과 양식에 민감하게 반응했어야 할 이 지역에서 이렇듯 마치 의도적인 것처럼 옛 스타일을 고수해가면서 불상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고속도로를 오고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신라 스타일이다!”라고 보여주기라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지방양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조형성, 그리고 문화가 오갔던 길목에 위치한 특별한 장소에 복고적 성향을 지닌 조각들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음에도 막상 그 조형 주체는 누구였는지, 왜 이런 스타일을 택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46호 / 2016년 6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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