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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선사들은 왜 시를 지었는가? - 상

기자명 명법 스님

파격적·비논리적 대화방식이 새로운 문체와 문학 탄생시켜

▲ 일본화가 셋슈 토요(雪舟等楊, 1420~1506)가 1496년 그린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법을 구하려 자신의 팔을 잘랐다는 이 고사는 진실여부를 떠나 깨달음에 대한 간절함과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상징해왔다.

선종은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스승과 제자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묵계(黙契)의 종교이다. 이른바 ‘불립문자’라는 선종의 모토는 선의 목적이 문자를 벗어나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청정한 자성을 깨우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선적인 깨달음은 사람들이 각자 자증자오(自證自悟)를 통해 얻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은 일깨워줄 수만 있지 가르쳐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스승과 제자는 묵계에 의지해야 하지 언설에 의지할 수 없다.

선종 언어 일반적 언어와 달라
언어 벗어난 이치 언어로 설명

모순되고 불합리한 언어 사용
고함치거나 때리는 것도 표현

선어록 흥성과 대중적 보급은
중국문학에 있어 커다란 변화

스승과 제자 사이 평등한 대화
간결 담박한 선시 융성 이어져

하지만 제자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여부를 인정하기 위해 선에서도 깨달음을 객관화할 방법이 필요했다. 결국 선에서도 언어가 사용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선종의 언어는 일반적인 언어와 달리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선종에서 언어는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과 달리 그 의미를 타파하기 위해 사용된다.

어느 수행자가 대주혜해에게 물었다.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이에 대답하여 말했다.
“자네는 어떤 것이 불(佛)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가리켜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러자 수행자가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좌주(座主) 스님이 물었다.
“부처는 어떠합니까?”
이에 대답하였다.
“푸른 연못에 비친 얼굴(靑潭對面)이 부처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좌주 스님이 망연하여 다시 물었다.
“선사께서는 어떤 법을 말하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십니까?”
선사는 “아직 법이 없다”고 대답했다.
좌주 스님이 말했다.
“선사께서는 무지몽매(無知蒙昧) 하시군요.”
선사가 이에 물었다.
“법사는 어떤 법을 말하시는지요?”
좌주 스님이 “‘금강경’ 20여 좌를 강론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선사가 “‘금강경’은 누가 말한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대답하여 이르기를 “선사는 어찌 부처께서 말씀하신 것도 모르십니까?” 했다.
선사가 말했다.
“만약 여래가 말한 법이 있다면 즉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되는데, 이는 사람들이 부처께서 말한 바의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전이 부처께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즉 경전을 비방하는 것이니 이것을 노승은 설명해 보시오.”
법사가 대답하지 못했다.

선은 대단히 엄밀하고 정치한 불교의 논리적 사유를 가차 없이 버리고 모순되고 불합리하며 심지어 황당무계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풍격을 만들었다. 선종은 언어적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본래 청청한 마음에 바로 계합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는 언뜻 보기에 모순된 주장을 한다.

따라서 선종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비유와 상징, 생략, 암시 등등 독특한 수사법을 활용할 뿐 아니라, 주먹으로 치거나(拳打) 봉할(棒喝), 즉 방망이로 치거나 큰 소리를 내지르며 또는 손가락을 들고 불자를 높이 치켜드는(揚拂) 등 비언어적 표현법도 광범위하게 활용한다. 더 나아가 시가문학까지 그 표현 방법으로 끌어들여 ‘선시(禪詩)’라고 하는 독특한 풍격을 만들기까지 했다.

이처럼 선종이 언어를 활용하는 상황은 당나라 때 사찰의 기능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해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사찰을 조용히 수도하는 곳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좀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당나라 때 불교사찰이 번화한 성시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온갖 문화의 교류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 민간문학의 효시라고 하는 강창(講唱)은 사찰 안마당이나 사찰 부속 마당에 설치된 희장(戱場)에서 공연되었는데 희장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 여흥을 즐기는 장소이자 공회장소이기도 했다.

사찰에서는 승려들을 위해 강경(講經)을 하기도 했지만 일반인들을 위해서도 강경법회를 열기도 했다. 일반인을 위한 강경을 특별히 ‘속강’이라고 불렀지만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승려를 위한 강경과 다른 점은 거의 없다. 속강이 열리는 날이면 성시의 모든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바탕 야단법석이 이루어졌는데, 강경법회는 차분하게 경전의 문구를 해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부분 경전의 제목을 한글자씩 상세하게 설명한 다음, 경전의 서분에 해당하는 부분을 강설하고 그 다음 모임이 이루어진 연유와 축원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전의 강설 역시 고승의 법문이 단조롭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창도승이 먼저 경전 구절을 읽으면 그 구절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경전을 운율에 맞춰 소리 내어 읽는 이른바 전경(轉經)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소(疏), 장구(章句), 현의(玄義) 등의 이름을 가진 경전 주석서들은 이런 강경의 결과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좌가 우가 여기저기에서 불경을 강설하는데/ 종치고 나팔 불며 궁정 안까지 시끄럽구나.

죄니 복이니 너스레 늘어놓으며 유혹과 협박거리를 삼고/ 청중들 좋아라고 이리저리 떠들썩하는구나.

황의 입은 도사도 강설하지만/ 그 자리에는 샛별 하나 뜬 것처럼 사람 없어 쓸쓸하구나.’

이 시를 통해 당시 강경법회가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는데, 도관에서 이루어진 법회는 청중이 모이지 않아 한산한 반면, 사찰에서 벌어진 강경법회는 종과 나팔 등을 불며 분위기를 고취하고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선종 역시도 이러한 강경법회의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선종 초기에는 선회(禪會)를 할 때 단을 세우고 설법을 했는데, 그 때 설법의 기록이 바로‘단경(壇經)’‘단어(壇語)’ 등이다. 그 후 총림이 설립되고 스승이 상당(上堂)하여 설법할 때에는 더 이상 일장 연설 같은 강설을 하지 않고 제자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판가름했다. 총림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형식의 선회는 스승과 제자의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선은 자신의 깨달음에 의지하며 제자의 깨달음이 스승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평등한 대화의 어록 문체가 형성되었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기록하는 것에 중점을 둔 과거의 어록과 달리 선종어록이 스승과 제자의 대화를 기록한 대화체로 이루어진 것은 선의 평등하고 독자적인 인간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선종사찰이 기존의 교종사찰을 대신하게 되자 선회에도 강경법회 못지않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전에 비릉사에 묵은 적이 있는데(一住毗陵寺)/ 그 절은 믿음의 인연에 응함이 있었다(師應隻信緣).
절은 가난하여 사람들이 먹을 것을 보시하고(院貧人施食)/ 고요한 창가에 새들이 참선하는 모습을 훔쳐보네(窗靜鳥窺禪).
묵은 경쇠소리 은은하게 퍼지는데(古磬聲難盡)/ 가을 등잔불 더욱 선명하네(秋燈色更鮮).
그래도 강경 열리는 날에는(仍聞開講日)/ 호수에 고깃배 적어지고 뱃사람들 몰려들겠지(湖上少魚船).’

-요합(姚合) ‘증상주원승(贈常州院僧)’ 전당시(全唐詩) 권497

선종 어록의 흥성과 보급은 중국 문학과 학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문인들과 학자들은 서로 다투어 어록 문체를 모방한 결과, 어록은 송대 이후 일반적인 저술 형식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어록식의 백화체와 구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오고간 평등하고 간결한 질문과 대답은 사람들에게 자유롭고 독창적인 정신을 수립하도록 일깨웠다.

역설적이게도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고 바로 일깨우는 선의 대화방식은 새로운 문체와 문학형식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시에서도 격률과 대우 같은 복잡한 수사를 배제하고 간결하고 담박한 성정을 표시하는 선시의 융성을 가져왔다. 창작의 진정한 번영기는 마조(馬祖)·석두(石頭)의 2대 이후인데, 이는 어록의 번영기와 대체로 동일한 시기이다.

당대 시가 창작의 발달과 보급으로 말미암아 총림에 시를 잘 알거나 시 짓는 데 능한 사람이 매우 많았고, 그들이 지은 게송은 자연히 시가의 형식과 기교를 잘 차용했다. 게송은 예술 면에서도 시에 유사한 형태로 발전했다. 하지만 선사들의 게송은 한산이나 교연 등의 시승이 쓴 시와는 성격이 다르다.

당나라 중반 선에 대한 이론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한편으로, 대중에게 보급하기 위해 운문, 특히 민간 속곡(俗曲)과 게송 형식을 이용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초기의 선종도 이러한 유형의 작품을 다량으로 창작하였다. ‘달마론’ 등 선종이 새롭게 저술한 논서가 전통 경론에 대립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민간 곡사(曲辭) 형식의 작품은 실제로 불교의 강창과 다른 새로운 형식이었다. 선가의 곡사(曲辭)는 경론과 벗어나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했을 뿐 아니라 내용과 형식이 모두 매우 자유로웠다. 민간에서 통용되는 속곡을 이용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는 선종이라는 교파가 처음부터 민중에 깊이 들어갔던 것을 암시한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47호 / 2016년 6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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