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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속가 아내도 출가 “전생 승려들이 모여있다 흩어진 것 아닌지”

기자명 김택근

▲ 가야산 금강굴에서 성철 스님 사진 앞에 서있는 불필 스님. 불필에게 수행이란 성철을 아버지가 아닌 스승으로 받드는 것이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내가 낳았지만 독사보다 지독하다.’ 이렇듯 산으로 들어간 남편을 원망하며 홀로 한 서린 세월을 삼켰지만 이덕명에게도 출가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석남사에서 윤회와 인과응보에 대한 인홍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마침내 성철의 도반 자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법명은 일휴(一休)였다.”

시부모가 세상을 뜨자 고향집은 며느리 이덕명이 지켰다. 덕명은 출가한 딸을 기다렸다. 그러나 수경(불필 스님)은 오지 않았다. 성전암에 있는 성철을 찾아가 딸을 돌려달라고 악도 써보고 애원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성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산청 묵곡리에 홀로 남겨진 덕명은 외로웠다. 그 많던 식솔들은 흩어져갔고 경호강은 그저 무심했다. 숲속에서 떨어진 바람이 담을 넘어와 감히 방문을 흔들었다. 유림의 당당했던 며느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눈 오는 밤이면 딸이 그립고, 달 밝은 밤이면 보고 싶었다. 덕명은 딸을 찾아 나섰다. 마지막 인사를 받은 지 10년 만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가지산 석남사에서 만난 수경은 딸이 아닌 스님이었다. 세속 인연을 끊어버린 불필에게서는 찬바람이 일었다.

‘비련의 여인이 따로 없었다. 사십 대에 딸을 절로 보내고 오십대 후반에 이른 어머니에게서는 벌써 노년의 체취가 묻어났다. 소쩍새처럼 그리움을 노래해도 받아줄 사람 하나 없이 세월이 너무나 쓸쓸했을 나의 어머니. 그러나 나는 10년 만에 찾아 온 어머니를 지나가는 행인보다 더 무심히 대했다.’ (불필 스님 ‘영원에서 영원으로’)

불필은 곁을 내주지 않았다. 딸은 아버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세속은 윤회의 길이요 출가는 해탈의 길이었으니, 혈육이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정(情)이라는 보따리를 이고 딸을 찾아간 어머니는 매번 눈물바람을 하면서 돌아섰다.

“내가 낳았지만 독사보다 지독하다.”

이렇듯 산으로 들어간 남편을 원망하며 홀로 한 서린 세월을 삼켰지만 이덕명에게도 출가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석남사에서 윤회와 인과응보에 대한 인홍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마침내 성철의 도반 자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법명은 일휴(一休)였다. 유림 이상언의 속가를 벗어나 남편과 딸이 있는 불가(佛家)에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휴는 16년 동안 불필 곁에서 기도하며 절밥을 먹었다. 그리고 1981년 여름 저녁에 떡국 한술을 뜨고 입적했다. 성철이 막 종정에 추대되어 한국불교의 상징이 되어 있을 때였다. 고단하고 쓸쓸했던 생이었지만 마지막 모습은 사뭇 달랐다.
‘가신 모습에서는 모든 상이 다 떨어져서 그리움도 애착도 기다림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사흘 후, 장작더미에 불이 활활 타고 육신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다시 그 재를 동서남북으로 뿌리니 사람의 한 생이 허무하였다.’ (불필 스님 ‘영원에서 영원으로’)

그날 불필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슬픔은 법랍 25년의 비구니를 더 이상 흔들지 못했다.

불필은 이미 법력이 깊었다. 20대에는 성철이 써준 법문노트를 품었고, 30대에는 ‘운달산 법문’과 해인사에서 들은 ‘백일법문’을 받들었다. 아버지 성철처럼 곁눈 팔지 않고 수행에 전념했다.

백일법문을 들은 후 1년쯤 지났을 때 불필은 은사인 인홍 스님이 이끄는 석남사에서 대중과 3년 결사를 했다. 장우, 성우, 혜관, 혜춘 등 원로와 법희, 법용, 백졸, 혜주 등 젊은 비구니들이 마음을 모았다. 석남사는 성철의 가르침을 가장 반듯하게 실천하는 비구니 도량이었다. 선방을 지었을 때도 성철은 심검당(尋劍堂)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혜의 검을 찾아서 어리석음을 베라’는 시퍼런 원이 서렸을 것이다. 이후 심검당은 비구니들의 수행 명소가 됐다.

3년 결사가 시작되자 성철은 이들을 격려하는 법문을 했다.

“사력을 다한 노력으로 열심히 공부하라. 그렇지 않고 방일(放逸)하면 미래겁이 다하여도 공부는 성취하지 못한다. 정진은 일상과 몽중, 숙면에 일여가 되어야 한다. 잠시라도 화두에 끊어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결사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진행됐다. 하루 300배 참회기도를 하고 능엄주를 독송하고 모두 좌복을 떠나지 않았다. 도량 전체에 사람 소리가 끊겼다. 말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방에 든 사람이나 이를 외호하는 대중이나 모두 비장했다. 결사에 참여한 비구니는 3년 동안 석남사 일주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내일은 없었다.

“온 도량의 분위기가 칼날처럼 살아있어 누구 하나라도 태만하면 스스로 살이 베일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던 시간이었다.” (불필)

결사의 끝이 보이자 마지막으로 100일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100일 동안 한 순간도 눕지 않고 정진한다는 것은 죽을 각오 없이는 할 수 없었다. 불필은 밤에 졸음이 오면 밖에 나가 산길을 걸었다. 짐승이 나타나도 피하지 않았다. 용맹정진은 듣고 보는 것조차 없어야 했다. 치열하게, 아니 그 치열함도 지워지도록 정진했다.

마침내 100일 용맹정진을 마쳤다. 3년 결사를 해냄은 조계종 전체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13인의 비구니는 회향 법문을 들으러 성철을 찾아갔다. 성철은 겉으로는 무심하게 공부의 경계를 물었지만 속으로는 대견해했다. 음성에 칭찬과 격려가 녹아있었다. 대중은 그걸 간파했다. 비구니들의 3년 결사는 실로 장엄했다. 우리 불교사에 아로새겨야 할 쾌거였다.

불필은 출가 이후 해인사 청량사, 태백산 홍제사, 문경 대승사 윤필암, 해인사 국일암, 지리산 도솔암과 대원사, 오대산 지장암 등 제방에서 수행했다. 그리고 석남사 심검당을 선(禪)의 본향으로 삼아 정진을 거듭했다. 불필은 성철에게 필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또 다가갈 수도 없었다. 수행을 거듭할수록 성철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나는 지중한 인연으로 큰스님의 딸로 태어났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했다. 그리고 열여덟 살에 안정사 천제굴에서 뵌 순간부터 큰스님은 내게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주변 분들은 나를 큰스님의 딸로만 바라보는 듯하다.”

열세 살 때 묘관음사에 찾아가 처음 아버지 얼굴을 보았지만 아버지는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소리쳤다.

“가라 가.”

불필은 성철의 성정을 많이 닮았다. 맺고 끊는 게 분명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굳건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길을 걸어야 했다. 출가 이후 불필은 성철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속세의 인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가의 인연이었다. 성철의 법문은 밥과 같은 것이었다. 먹지 않으면 죽어야 했다. 그래서 꼭꼭 씹어서 삼켜야 했다.

불필은 성철이 호랑이로 버티고 있는 가야산에 들었다. 권속이 늘어나니 떠돌 수만은 없었다. 36세에 첫 상좌를 받은 불필은 20여 년 동안 24명의 제자를 두었다. 손상좌까지 따르는 무리가 70여명이었다. 불필은 가야산에 금강굴을 지었고, 이 사실을 성철에게 3년 동안 숨겼다. 못난 중으로 숨어서 공부만 하겠다는 다짐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성철은 금강굴 옆을 지나가지도 않았다.

불필은 금강굴에서 성철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석남사의 수행가풍을 이어 봉암사의 공주규약을 지켰다. 또 삼천배로 상징되는 절 수행을 철저하게 시켰다. 절은 절하는 곳이었다. 성철은 이렇게 말했다.

“죄업이 멸하면 그 자리에 복이 생긴다. 그러니 참회정진으로 복을 지어야 한다.”
“절하다 죽은 사람은 없다. 누구든 참회의 절을 해야 한다.”

성철의 법문을 듣고 불필은 석남사에서 만배를 한 적이 있었다. 만배를 마쳤을 때 불필은 사람에게는 퍼내도 퍼내도 다 쓸 수 없는 무한 능력이 있음을 알았다.

불필은 일찍이 절을 해서 몹쓸 병이 나은 기적을 지켜봤다. 지리산 도솔암에 있을 때였다. 초등학교 친구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집을 찾아갔다. 눈썹이 하나도 없는, 의사들도 고개를 젓는 희귀병이었다. 불필은 문득 친구에게 삼천배를 시켜보고 싶었다. 삼천배를 하면 업력을 벗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 유교 집안의 친구는 불필의 말을 믿고 따랐다. 100일 동안 하루 천배씩 절을 시켰다. 아무도 없는, 침묵의 공간에서 친구는 홀로 엎드렸다. 거친 숨소리가, 때로는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백일기도 회향을 21일 앞두고서는 하루에 삼천배씩을 하도록 했다.

친구는 점차 기력을 회복했다. 친구는 내친김에 기도를 더해보겠다고 했다. 불필은 그런 친구에게 도솔암 근처의 응석사에서 삼천배 100일기도를 하도록 했다. 친구는 하루에 삼천 번을 엎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온 몸에서 흰 벌레가 빠져나가는 꿈을 꾸었다. 100일 기도 후 친구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사람들은 불필을 ‘절 시키는 선수’라고 했다. 불필은 성철이 왜 그렇게 삼천배를 시켰는지 몸소 깨달았다. 자꾸 엎드리다 보면 하심이 되고 참회가 되어 자신을 돌볼 수 있는 힘이 생김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참회기도의 으뜸은 삼천배다. 몸을 엎드리면 마음도 엎드려진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 몸을 상대방의 발 아래로 낮출 때 진정 참회가 되는 것이고, 그 참회 위에 세상과 사람에 대한 감사 그리고 부처로 살아가겠다는 발원이 선다.” (불필 스님 ‘영원에서 영원으로’)

불필은 성철의 딸이 아닌 제자로 엎드리고 또 엎드렸다. 성철이 열반한 후에도 성철의 사상을 전파하고 유지를 기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세상에는 불필만이 노승으로 홀로 서있다. 할아버지 이상언은 ‘성철 스님에게 간다’며 세상을 떴고, 할머니 강상봉은 보살 초연화로 평생 성철 곁을 맴돌았다. 또 아내 이덕명은 일휴라는 법명으로 딸 곁에 머물다 떠났다. 그렇다면 전생의 승려들이 모여 있다 흩어진 것은 아닌지.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47호 / 2016년 6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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