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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끝없이 불안한 세상 속에서

기자명 성원 스님

지장의 대원보다 관음의 자비에 기대는 중생

▲ 일러스트=강병호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다고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 일이. 엊그제가 부처님오신날이라고 경축에 들떴던 마음이었는데, 벌써 아스라한 일같이만 느껴집니다. 앞으로 다가올 많은 일들에 관한 망상들이 우리들의 시간을 훔쳐가 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행복의 첩경이라 가르치지만
차가운 현실 속 맨발은 시려워
슬픔 감내해야 하는 사바에서
진정한 자비의 길은 무엇일까

늘 앞에 둔 듯한 가르침인 제행무상한 일들을 자꾸 만들어 가는 사이에 시간이 화살같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늘 세상사의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아려내는 듯 애통하기만 하고, 희망은 자꾸만 머나먼 빛인 듯합니다. 뉴스의 사건사고 소식을 접하다 보면 저 사건과 사고를 왜 온 국민이 다 알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 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루 사고 없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한 10만대의 차량은 소식이 되지 못하고 그중 한 대의 사고차량 소식은 전 국민에게 알려져서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유난히 우울증을 호소하는 상담을 많이 받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건전한 사회의 일상을 뒤로한 채 뉴스가 없다면 알지도 못할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해 자꾸 마음에 작은 상처들을 쌓아가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 상처에 함몰되어가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그 누구도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객관적으로 라고 소리치지만 결국 자신이라는 여과지로 걸러낸 지극히 주관적인 상황만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세상을 바로 본다는 일이 참으로 어럽고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이야 말로 행복의 첩경이라고 많은 선사들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불행해서 우리들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름다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삶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자각만이라도 하는 것이야 말로 마음공부를 하는 첫걸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론적 설계에 자신의 사고를 맞추다가도 현실을 디디고 서있는 발이 한없이 시려 오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사실 세상에서 먼 출가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초연함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어 하다가도 지난 편지글같이 세상 살아가는 소식을 듣고 함께 아파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심성에 자꾸 숙연해지곤 한답니다. 아직은.

출가자의 초연함을 온전하게 견지하면서 초연히 살아간다면 사고 난 1대의 차량을 향한 아픈 마음을 하루의 주행을 무사히 마친 9만9999대의 차량들로 위안 받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을 아파하는 지장보살님보다 자비의 손길 쉬지 않는 관세음보살님께 더 많이 예경하나 봅니다.

언젠가 보스턴에 있을 때 겪은 일입니다. 일요법회라는 것이 신행활동의 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민들 간 친선교류의 장 같은 분위기가 더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한때 어느 신도분이 ‘매주 와서 밥만 먹고 시주도 한닢 안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불평했습니다.

한번은 보스턴 시내에 있는 대만 불광산사 비구니스님이 매주 많은 사람들에게 힘닿는 데까지 무료급식을 하는 것을 보고 ‘무의미한 일을 무엇하러 자꾸 하느냐’고 했었습니다. 그러자 그 비구니스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중생들은 그저 자꾸 먹여줘야 먹고 난 다음에야 마음을 연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무심히 들었는데 오래토록 울림이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지난 부처님오신날이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이날 만큼은 누구나 사찰에 와서 밥을 공짜로 먹을 수 있다고 하며 모두들 너무도 당당하게 공양을 요구합니다. 오전 10시 법요식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저녁공양까지 쉬지도 않고 후원에서 공양을 대접했을 뿐만 아니라 수십 가마니의 쌀로 떡까지 빚어 나누어주었습니다. 후원 봉사자들이 지쳐서야 마감을 했는데 이 일은 비단 우리 사찰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배고픈 사람이 없는 오늘날에는 한편의 문화와 미덕같이 여겨지는 것만 같습니다. 이번 편지글을 보다 보니 이러한 작은 일도 부처님 재세 시절부터 그 연원이 있어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네요.

배고픈 자에게 밥이 아니라 법을 전하려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찔한 일인 것만 같습니다.

강원에 다니는 시절 모두 젊었을 때라 너무 쉬이 배가 고팠습니다. ‘금강경’을 배울 때는 ‘금강산(金剛山)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말에 빗대어 ‘금강경(金剛經)도 식후경(食後經)’이라 떠들며 허기진 배를 우선 채우려 허덕였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원효 스님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생생한 발심수행장의 글귀는 허기를 잊게하고 정진에 매진토록 견책하였습니다. ‘飢餐木果하야 慰其飢膓하고 渴飮流水하야 息其渴情이니라. (기찬목과하야 위기기장하고 갈음유수하야 식기갈정이니라) 배고프면 과실을 먹어서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이 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갈정을 달랠지니라.’

어쩌겠습니까? 일생을 먹이고 먹여도 이 몸의 식탐은 줄어들지 않고, 가져도 가져도 탐욕심은 줄어들지 않는 것이 중생살이인 것을…. 다만 우리들이 불세존을 의지하고 수행정진하다 보면 언젠가 이러한 식탐과 탐심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흔들림이 없어야겠지요.

나 스스로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욕망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자유로운 삶의 기쁨을 전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포교요 중생사랑이지 않겠어요. 아쉽게도 아직 스스로 온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여 저도 늘 마음 아프답니다.

세상 사는 일로 격분하여 직접 마음 아파하는 일과 세상의 아픈 소식을 어찌하지 못해 스스로 속마음 아파하는 일이 다를 뿐 참으로 우리들 세계는 아픔을 감내해야하는 사바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먹는 일로 시작한 글이 이렇게 길어졌네요. 이런 생각 속에 오늘 하루도 쫓기 듯 내게서 떠나가 버리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삶이란 희망의 노란 손수건을 엮어 마냥 펄럭이게만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곳 국토 최남단에는 벌써 남풍이 자꾸 뜨거워지고, 햇살은 거침없이 우리들에게로 다가와 청량한 바람이 더욱 그리워지는 계절인 듯합니다. 늘 북녘의 시원한 바람으로 청량함을 유지하시기를.

여름 앞에서 사문 성원드림

성원 스님 sw0808@yahoo.com

[1347호 / 2016년 6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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